[맷피터] 위장결혼 - 20

🕶x🕷/소설

2025. 8. 30. 23:07

맷은 데어데블이기도 하지만, 변호사다. 솔직히 말해서 진짜 계속하고 싶은 일은 데어데블이 되어 헬스키친의 범죄자를 향해 경고하고, 범죄를 막고, 주먹질하는 것이었으나 어쨌거나 맷 머독의 보여지는 직업은 변호사였다. 데어데블이라는 사실을 히어로 친구들에게 알리기 전부터, 맷은 히어로와 연관된 사건들을 자주 접했다. 어쩌다 보니 변호사 맷 머독을 자신의 변호사로 택해준 주머니가 넉넉한 히어로들 덕분이었는데, 덕분에 맷은 ‘히어로 전문 변호사’라는 타이틀까지 언론사로부터 받고 있었다. 그것은 칭찬인 동시에 비난이기도 했다. 히어로를 좋아하는 시민들이 있다면, 싫어하는 시민들도 많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데일리 뷰글의 편집장인 조나 제임슨이었는데, 그는 유독 스파이더맨만을 싫어해서 스파이디가 연관된 모든 사건은 우선 비난부터 하는 지독한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언제나 스파이더맨에게는 변호사 맷이 필요했다.

변호사 맷은 그 여론 앞에서 히어로가 세상에 필요한 이유, 그리고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말하며 마음을 이끌고 평가를 뒤집어버리는 게 특기였다. 증거나 이런저런 피해로 지고 있는 상황에서도 기죽지 않는 변호사는 지팡이를 쥐고 재판에 서 있었다. 초감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들은 맷의 색안경을 보고 마음이 누그러들고, 마음을 끄는 따뜻하고 진중한 발언에 다시 심장이 요동쳤다. 변호사는 언제나 그런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언론사의 기사와 뉴스에 휩쓸려 진짜 지켜야 할 것들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눈이 먼 변호사는 언제나 법정에서 보이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이들을 벌하려는 걸까요?

맷의 실력은 높은 승률이 말해주고 있다. 맷은 많은 영웅의 변호를 맡아왔는데, 그중에서는 변호사 맷 머독을 고문 변호사로 쓰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법적인 분쟁에 엮였을 때 상담부터 시작해서 소송까지 담당해 줄 변호사. 맷은 데어데블이 되는 것을 더 좋아했으나, 변호사의 일도 싫어하진 않는다. 히어로를 대변하는 일은 동시에 맷 자신을 대변하는 일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결국 맷 머독도 그들의 일원이었다. 정부의 허락 없이 마음대로 길거리에서 악당을 때릴 권리가 보장되어야만, 맷 머독은 데어데블일 수 있었다. 몇 번의 커다란 소동 끝에도 그런 권리는 법적으로 보장되지 않았고, 신원이 보증되지 않은 무허가 자경단원에 대한 시선은 나날이 나빠졌다. 그중 대표적인 인물이 스파이더맨이었고, 데어데블은 그보다는 나은 이미지였다.

어찌 되었든 법적으로 문제가 일어났을 경우를 대비해야 한다는 게 모두의 의견이었고, 그러다 보니 히어로 그룹과 나름의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는데, 그중 가장 오래된 고객이 ‘판타스틱4’였다. 이미 오래전부터 정체를 세상에 알리고 지지를 받는 히어로, 정확히 하자면 과학자 혹은 공학자에 가까운 위치였던 판타스틱4의 법률적 고문을 맡은 것은 맷이 변호사 사무실을 차리고 얼마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지금까지도 이어져서 가족들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언제나 변호사 맷에게 연락이 돌아오곤 했다. 대부분은 휴먼토치가 일으킨 화재 사건이었다.

“진짜 같이 들어갈 거야, 포기?”

맷이 걸음을 멈추고 물었다. 택시를 타고 왔기 때문에 백스터 빌딩 앞에서 내리면 되었지만, 굳이 한 블록 전에 내린 것은 포기를 떼어놓기 위함이었다. 히어로 관련 사건은 주로 맷의 담당 분야다. 포기가 맷이 데어데블이라는 사실을 알기 전부터 어쩐지 그렇게 담당을 나누게 되었고, 맷이 데어데블이라는 사실을 알린 뒤로도 그 업무 분담은 여전히 유지 중이었다. 포기도 함께 도와주긴 했으나, 대부분 맷의 지인이었기에 포기는 알아서 하라며 손을 휘휘 젓곤 했었다.

포기를 백스터 빌딩에 데려가도 되는가. 이미 포기 넬슨은 맷 머독이 데어데블이라는 사실을 전부터 알고 있던 친구이자, 동업자였으나 다른 자경단의 문제가 걸려 있으니 맷은 조금 망설여졌다. 판타스틱4는 이미 얼굴과 정체를 세상에 공개하고, 많은 것을 나누고 있는 히어로 그룹이니 굳이 숨길 것도 없겠으나— 문제는 역시 피터다. 맷은 비어 있던 제 침대 위를 떠올리며 바닥을 구둣발로 초조하게 두드렸다. 집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던 피터가 지금 백스터 빌딩에 있었다.

무슨 일이 있으면 언제나 변호사 맷 머독을 찾으세요. 거의 메뉴얼이 되었던 터라 판타스틱4의 가정용 로봇이 전화를 걸어도 놀랄 것은 없다. 판타스틱4의 가정용 로봇 H.E.R.B.I.E.는 리드 리처드가 일러준 대로 문제 상황에 변호사를 찾았다. 이번에는 가족이 아닌, 스파이더맨의 문제로 전화를 걸어온 로봇은 차분히 문제 상황만을 알려주고 전화를 끊었다. 맷이 아는 것이라고는 백스터 빌딩에 스파이더맨과 그가 데려온 아이가 백스터 빌딩에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그리고 스파이더맨은 지금 경찰에게 수배당한 상태였고, 빌딩 밖에서 코스튬을 입는 순간부터 메타휴먼에 대응하기 위해 꾸려진 기동대에게 쫓길 예정이다. 이런 상황이 익숙한 맷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고, 어쩌다가 피터가 백스터 빌딩에 가게 된 것인지도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아마 리드의 연구실을 빌릴 생각이 아니었을까. 그렇게 생각하면 스파이더맨이 엮여 있는 방화 사건도, 그리고 아이 납치 사건도 모두 연결되어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데어데블이 경찰서 앞에 버려두고 온 약에 취한 경찰관이 진짜 방화범이며, 아이는 아마도 맷과 포기가 찾던 클라이언트일 것이다. 그리고 연구실이 필요했던 까닭은 가짜 다이아몬드 때문이겠지. 맷은 피터가 다시금 약에 취했을 가능성까지 떠올려야만 했다.

혹시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닐까.

맷이 걱정하는 부분은 피터의 수배보다도 그쪽이었다. 수배된 것은 변호사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이었으나, 약에 취해서 벌어진 일은 해결 범위 밖이었다. 사무실에 있었던 소동, 그리고 집에서 피터와 몸을 겹쳤던 것을 떠올리자 맷은 초조함을 감출 수 없었다. 가짜 보석에 있는 화학물질은 방사능과 연관된 맷과 피터에게는 다른 반응을 일으킨다. 이것은 이미 증명된 사실이었고, 피터가 그 상태로 백스터 빌딩까지 얌전히 들어가 사건을 해결했다면 다행이겠지만 그러지 못했다면—. 몸을 가누지 못한 채 과도한 감각에, 그리고 뜨거움에 헐떡이던 피터의 숨소리와 심장박동을 상기하며 맷은 주먹을 가볍게 꽉 쥐었다. 피터가 바깥에서 무언가를 저질렀을까—정확히는 당했다에 가깝겠지만— 걱정하는 마음에 가까웠는데, 실상은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는 남편과 같은 위치에 선 맷은 숨을 길게 내뱉으며 마음을 차분하게 만들기 위해 애썼다. 적어도 골목길이 아니라 백스터 빌딩이라는 사실에 차라리 감사해야 한다고 되뇌었다.

포기를 밖에 두고 홀로 들어간다면 상황에 대처하기 더 쉬울 텐데, 오랜 동업자인 친구는 굳이 맷과 함께 들어갈 생각인지 콧방귀만 뀌고 있었다. 도망자 신세가 된 아이의 변호는 맷보다는 포기가 더 애쓰던 사건이니 걱정이 된 모양이었다. 아이가 왜 갑자기 판타스틱4가 소유한 빌딩에 있는 것인지 알아야겠다는 포기의 기세에, 맷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백스터 빌딩으로 향했다. 빌딩 입구에 도착해 초인종을 찾아 누르기도 전에 출입문에 설치되어 있는 센서가 손님을 감지하고 맷과 포기를 가볍게 훑었다. 맷은 카메라가 움직이는 소리로 곧 문이 열릴 것임을 알았다. 맷 머독은 백스터 빌딩에 자주 들르는 손님이었고, 이따금 데어데블로 올 때도 기술이 집약된 센서는 마스크를 쓴 데어데블을 알아보고 금방 문을 열어주곤 했다.

기술의 발전은 그래서 피곤하다. 시한폭탄의 전선이 빨간색인지 파란색인지조차도 구분할 수 없는 맷은 제 눈으로는 알 수 없는 기술의 발전이 달갑지는 않았다. 빌딩으로 들어서는 내내 포기의 입에서는 탄성이 터져 나왔는데, 맷은 포기의 눈에는 빌딩에 엄청나게 멋진 것으로 보이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시각을 오래전에 잃은 맷은 그저 엘리베이터로 묵묵히 향할 뿐이었다.

 

“포기…, 여기서 일어나는 일은 다 기밀이야.”

맷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엘리베이터는 최상층으로 향하고 있었다.

“변호사잖아. 입이 무거운 건 상식이지. 난 우리 어린 피고인만 찾으면 돼.”

빌딩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보며 감탄하느라 바빴던 포기가 그 정도는 안다며 맷의 옆구리를 툭 찔렀다. 투명한 유리 벽으로 둘러싸인 엘리베이터 안은 뉴욕의 경치를 구경하기에도 딱 좋아서 포기는 기밀이네 뭐네 이야기하는 맷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예상 못 한 일이 있을 수도 있어. 예상치 못한 인물이라거나. 뭘 봐도 놀라지 마.”

“내가 데어데블이랑 친구인데 놀랄 게 뭐 있겠어? 난 네가 창문으로 뛰어내리는 게 제일 무서워, 맷.”

아까 사무실에서 뛰쳐나가려던 맷의 모습을 떠올리며 포기가 작게 몸을 떨었다. 겨우 와이어 끈에 의지해 공중을 날아다닌다니 조금만 잘못해도 고층에서 떨어져 추락사할 수도 있는 미친 짓이었다. 데어데블은 스파이더맨처럼 초인적인 힘을 가진 것도 아니었고, 휴먼토치처럼 날아다닐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냥 오로지 감각만 좋을 뿐인 일반인이면서 겁 없이 범죄자를 향해 달려드는 불 같은 성미의 맷을 포기는 그저 바라보고, 이따금 총이라도 맞고 올까, 걱정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맷이 사귀었던 이들도 포기와 비슷한 걱정을 하느라 잠 못 이루고 살기도 했는데, 맷의 오랜 숙적에게 목숨이 노려지는 것은 그보다는 차라리 나을지도 몰랐다. 게다가 맷은 존재하지도 않는 쌍둥이 형제인 척 연기를 하거나 실제로 죽은 척도 했다. 포기는 무엇을 보더라도 그보다는 덜 놀랄 것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데어데블을 지인으로 둔 죄로 포기 넬슨은 이미 많은 일을 겪었다. 그리고 이제 맷과 사귀고 있다는 피터 파커도 그러할 것이라는 생각이 이따금 포기의 양심을 쿡쿡 찔렀다. 아직 어린 편인 피터에게 미리 경고라도 해주는 게 옳지 않을까, 여러 참혹한 결말을 본 적 있었던 포기는 여전히 고민 중이었다.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먼저 내리는 맷을 따라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온 포기는 제 앞에 펼쳐진 광경에 숨을 크게 삼키며 놀랐다가 맷을 보았다. 포기가 볼 수 있는 것은 맷의 뒤통수뿐이었는데 맷은 말이 없었다.

오, 세상에—, 맷.

포기는 아까까지 맷의 새로운 애인을 걱정하느라 제 친구에 대한 염려는 하지 않았던 것이 후회되었다. 백스터 빌딩의 최상층, 판타스틱4가 생활하는 것으로 보이는 층은 고급스러운 소파가 놓여 있고 멋진 뉴욕의 전망을 볼 수 있는 거실이 있었다. 그리고 그 거실 한가운데 소파 앞에서 눈에 띄게 붙어 있는 두 사람 중 하나를 포기는 보자마자 누구인지 알아차렸다. 아래에 깔린 인물은 휴먼토치다. 뉴욕에서 저 금발을 보고도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뉴요커가 아닌 게 확실할 정도로 판타스틱4는 유명인이었다. 그리고 문제는 그 위에 올라타 있던 인물이었다. 갈색 머리카락, 얇은 허리, 그리고 조금 뭉툭한 코끝. 포기는 사무실에서 보았던 피터 파커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다. 얼굴을 기억하는 센스는 변호사의 기본 중 기본이다.

거실 중앙에 쓰러져 누운 휴먼토치의 허리 위에 올라타 있는 피터. 포기가 엘리베이터에 내리자마자 마주한 광경은 그것이었다. 게다가 피터는 아래에 잠옷인지 알 수 없는 붉고 파란색인 쫄쫄이바지만을 입고 있었고, 상의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포기는 제 앞에 선 맷의 등이 어쩐지 작아진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맷은 이미 이 상황을 포기보다 먼저 알아차렸을 게 뻔하다.

애인이 휴먼토치랑 바람피우는 현장을 검거한 거나 다름없잖아. 포기는 피터의 나이가 조니 스톰과 비슷할 것이라는 걸 그제야 떠올랐다. 그래, 어린 나이에는 불같은 사랑에 빠지기 쉽다. 이 이상한 상황에서 발을 움직일 수 없게 된 포기가 재킷만 꾹 쥐고 서 있었는데, 부엌 쪽에서 익숙한 머리통을 발견했다. 포기가 그토록 찾던 어린 의뢰인은 식탁에 앉아 과일 따위를 씹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맷…?”

휴먼토치의 위에서 그의 손목을 붙잡고 있던 피터가 엘리베이터 쪽을 보고 맷을 불렀다. 당황한 듯한 얼굴이 되더니 허둥지둥 소파에서 쿠션을 잡고 제 아래를 가리는데, 포기는 바람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야, 피터! 이거 받아!”

“나 지금 손이 없잖아, 조니! 우욱—, 야, 던지지 마…!”

피터가 제 아래를 가리느라 일어선 사이에 드디어 자유가 되어 일어난 조니가 무언가를 피터에게 던졌다. 작고 빛나는 무언가. 쿠션을 쥐고 아래를 가리느라, 갑작스럽게 헛구역질하느라 정신없던 피터가 받아내지 못하자 그것은 바닥에 부딪혀 데구루루 굴러 맷의 발끝에 부딪혔다. 도대체 무엇인가 싶어 포기가 힐끔 맷의 발아래를 보는데, 고급스럽고 비싸 보이는 반지였다. 다이아몬드니까 결혼반지일 텐데. 포기가 맷의 발 앞에 떨어진 반지를 쳐다보는데, 맷이 몸을 숙여 그것을 주워들었다. 선글라스를 쓴 탓에 맷의 표정을 알아차리기 어렵다. 포기는 얼른 제 의뢰인을 데리고, 그리고 친구까지 데리고 이 빌딩을 떠나고 싶다고 생각했다. 일단 상황을 벗어나서 제대로 침착하게 이야기를 해보자고 맷을 달래주고 싶었다.

“…둘 다 조용히 해.”

반지를 손에 든 맷이 단호히 말했다. 담담하고 조용한 어조였는데, 포기는 맷이 조금 화가 났을 때 저런 목소리를 낸다는 걸 알았다. 여전히 투덕거리며 말싸움하던 조니와 피터가 맷의 말에 잠시 입을 닫았다. 입을 닫은 사이에도 피터가 어깨를 들썩이며 구역질을 몇 번 했는데, 포기는 피터가 전날 밤 술을 마신 게 아닐지 추측했다.

“포기, 잠깐 의뢰인 좀 살펴줄래? 난 할 일이 있어서.”

“…어, 그래, 맷. 내가 알아서 할게! 상황 잘 정리해!”

포기가 당황했다가 고개를 끄덕이고, 종종걸음으로 식탁에 앉아 있는 의뢰인에게 향했다. 잠시 팔짱을 끼고 서 있던 맷은 조니와 피터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속삭였고, 셋은 다른 출입문을 지나 어딘가로 향했다. 사라지는 셋의 뒤통수를 보며 식탁에 어색하게 앉아 있는 포기에게 최신식 로봇이 웃는 얼굴을 전자기기 판에 만들고 소리를 내며 다가왔다.

“커피랑 티 중 무엇으로 드릴까요, 변호사님? 탄산음료랑 우유도 있어요.”

로봇의 물음에 포기는 지잉 소리를 내며 닫혀 버린 문을 쳐다봤다가 차가운 냉수를 부탁했다. 얼음도 아주 많이 넣어서. 속이 타들어 갈 정도로 놀랍고 무서운 상황을 목격해서, 무엇이든 시원한 것으로 속을 축여야 할 것만 같았다. 일이 끝나면 맷에게 펍이라도 가자고 해야겠다 생각하며 포기는 다시 제 옆의 앉은 의뢰인을 쳐다봤다. 모든 게 다 이상해서 여기에 탈옥한 아이 한 명이 더 있는 것은 덜 이상하게 느껴질 따름이었다.

 


 

피터는 우선 4라는 글자가 크게 적힌 회색빛 후드티를 급하게 입었다. 판타스틱4가 가진 여분의 옷 중에서 제일 평범한 것이었다. 아래의 바지는 어쩌냐는 피터의 물음에 조니가 머리를 긁적이며 옷장에서 청바지를 꺼내주어서 슈트를 입은 채로 바지까지 껴입었다. 허리가 조금 크고, 엉덩이가 좀 끼긴 했지만 흘러내릴 정도는 아니어서 벨트로 조절하니 입을만한 정도였다. 바지를 껴입는 동안 세탁해 오라며 장난스럽게 옆구리를 찔러오는 조니를 거의 무시하며 피터는 벨트까지 찬 뒤에 다시 털썩 침대에 주저앉았다. 한참 전보다는 나아지긴 했으나 여전히 멀미를 하듯 울렁거렸다. 이 증상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으니까 몇 시간 더 지나면 말짱해질 것 같다. 아이는 건강하고 마약의 후유증도 남아 있지 않은 듯해서 우선 안심이었으나, 문제는 맷과 함께 온 포기였다. 피터는 침대에 앉은 채 제 앞에 서 있는 맷을 올려다봤다.

“슈트를 봤을까요?”

거의 울듯 한 목소리였다. 팔짱을 낀 채로 문 쪽에 서 있던 맷은 그 목소리에 작게 한숨을 쉬며 피터의 옆에 앉았다. 손을 뻗어 후드티 위를 더듬으며 손으로는 피터의 상태를 살피면서 맷의 머리는 상황을 차분하게 정리하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포기는 못 봤을 거야. 그냥… 오해를 한 거 같아.”

“오해요?”

“응, 좀 큰 오해.”

피터의 등을 가볍게 만지며 맷은 피터의 몸을 점검했다. 저번처럼 호흡이나 심박이 심하게 빠르다거나 뜨겁다거나 하지 않았고, 혈류도 모두 정상적으로 흐르고 있었다. 피터의 심장은 본래도 운동선수처럼 크고 선명하게 울리는 편이니까 평범한 사람보다 빠르게 울리는 것은 문제가 아니었고, 어지러워하는 증상도 오래가지는 않을 듯했다. 말 사이사이에 토할 듯 움츠러드는 피터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싼 맷은 피터의 어깨를 손끝으로 힘을 주어 매만졌다. 증상을 조금은 덜 하게 할 수 있는 혈 자리를 알고 있다. 그곳을 엄지로 꾹 문지르며 맷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포기는 우리 둘이 사귄다고 생각해.”

“…둘이 사귄다고?”

맷을 보고 있던 조니가 피터를 휙 돌아보았다. 맷에게 슬쩍 기대어 있던 피터는 그 따가운 시선에 입술을 혀로 핥으며 눈을 피했는데, 조니의 시선이 너무 뜨거웠다. 마음 같아서는 맷의 등 뒤로 피해서 모든 변명을 맡기고 싶었다. 속도 안 좋은 데다가, 배도 고프다. 피터는 조니와 말싸움하지 못할 이유를 여러 가지 만들어낼 수 있었지만 조니 스톰은 당장 말하지 않으면 화를 낼 얼굴이었다. 아까까지 임신했냐고 장난이나 치던 여유롭던 얼굴은 또 어디 갔는지. 조니의 침대에 앉아 맷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 피터는 이 상황이 숨 막히게 느껴졌다. 피터의 몸이 굳는 것 같았는지 맷의 손이 어깨에서 내려가 피터의 등을 부드럽게 쓸었다. 엄지가 피부 위를 꾹 눌렀다가 다시 천천히 그 위를 빙빙 돌며 문지르는 게 감각이 나쁘지 않다. 롤러코스터에서 내리지 못한 채, 끊임없이 360도 회전을 하고 있는 지옥 같은 머릿속에 갇혀 있던 피터는 맷의 손길에 드디어 롤러코스터가 평지로 돌아간 듯한 기분을 느꼈다.

사귄다는 건 확실히 오해가 맞다. 확실히 말하자면 피터와 맷은 결혼한 부부였으니까. 피터는 맷이 말한 오해에서 문제가 되는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결혼했다는 사실을 사귄다는 걸로 오해하면 안 되는 걸까. 맷의 손길에 편안함을 느끼며 늘어지고 싶었는데, 조니의 따가운 불같은 시선이 피터의 휴식을 방해했다. 맷은 그런 시선을 보지 못하는 덕분에 담담히 피터의 몸을 만져주며 엉망인 감각을 풀어주고 있었는데, 그 덕분에 조니에게 말하는 것은 피터의 몫이 된 것만 같았다. 입고 있던 조니의 청바지를 손톱으로 가볍게 긁으며 말을 고르던 피터는 고개를 들고 맷을 힐끗 바라보았다. 대신 말 좀 해달라고 말하고 싶은데, 맷은 피터의 그런 간절함까지는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어…, 그게…, 음. 사정이 있어서, 맷이랑 그런 관계가 됐어.”

“그런 관계? 제대로 말해, web-head!”

“머리 울려, 조니…. 나 진짜 아프다고. 맷, 말 좀 해줘요!”

변호사에게 제 문제를 밀어버리며 다시 기댄 피터는 다시 침대에 누워 모든 걸 잊고 잠에 빠져들고 싶다고 생각했다. 맷의 손이 등을 꾹 눌러주고 있어서 침대에 드러눕지도 못하고, 맷에게 기대어 앉는 게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피터가 해명을 멋대로 밀어버리자, 매트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결혼한 사이야.”

맷이 담담히 사실을 말했다. 조니의 눈이 커지고, 기대어 있던 피터도 놀라서 벌떡 일어났다가 다시 울렁거리는 속에 앞으로 주저앉았다. 침대 앞에 쓰러진 피터의 등을 다시 문질러주면서도 맷은 침착하게 상황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포기가 너희 둘 사이를 오해한 것 같아.”

“내가? 거미줄이랑?” 조니의 목소리가 과장되게 커졌다.

“야, 나도 싫어! 욱—,”

조니가 소리를 치며 질색하는 모습에 조금 상처받은 피터가 소리를 치다가 다시 앞으로 고개를 숙이고 헛구역질을 했다. 맷이 한숨을 푹 쉬며 등을 토닥여준 덕분에 어지러운 머릿속은 금세 차분히 돌아왔다. 이런저런 오해를 받는 것은 익숙한데 이제 조니 스톰이랑 바람까지 핀다는 오해를 받다니, 피터는 제 삶에 드리운 불행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피터 머독이 되어도 인생에 깊숙이 스며든 불운은 끊임없이 피터를 뒤흔드는 것만 같았다. 무엇이든 망치는 삶이라는 게 그런 법이다. 맷과의 사이도 망치고, 끝내는 조니랑도 엉망이 되는 게 아닌가 하는 불안감이 피터의 발목을 쥐었다. 좋은 친구들을 잃는 일은 언제나 두렵고 무섭다. 이미 오해로 친구를 여럿 잃었던 피터는 제 발끝을 쳐다보며 거센 파도 위에 서 있는 기분을 만끽해야만 했다. 친구 잃기의 전문가가 있다면 당연히 피터가 꼽힐 게 분명하다. 오해받는 것에 너무도 익숙해져 있는 피터는 맷의 지인에게 나쁜 놈으로 찍히는 것 정도는 나쁜 축에도 들지 못한다고 자신을 달랬다.

배도 너무 고프고, 피곤했다. 맷과 포기가 백스터 빌딩에 오기 전, 침대에 늘어져 있던 피터는 배고픔에 못이겨 겨우겨우 거실로 나갔고 불꽃 쇼를 보여주던 조니랑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멀쩡한 얼굴로 피터를 쳐다보았고, 거기서 스파이더맨의 사진기자라는 이야기나 하며 어떻게든 상황을 빠져나간 피터는 소파에 앉아 과자나 한 봉지 먹으려고 했을 뿐이었다. 스파이더센스는 엉망진창이었고, 몸도 상태가 나빴다. 일단은 휴식이 필요하다. 가정용 로봇이 과일을 가져오는 사이에 피터에게 다가온 조니가 진지한 목소리로 피터의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인 게 문제의 시작이었다. 너 혹시 임신했어? 어이없을 정도의 말에 표정을 찡그리며 조니를 쳐다봤는데, 조니의 손에는 결혼반지가 있었다. 피터는 그제야 제 손에서 반지가 사라졌음을 깨달을 수 있었다. 반지가 끼워져 있어야 할 왼손 약지에는 그 대신 밴드 하나가 둘려 있었다. 반지를 내놓으라며 피터의 목소리가 커지자, 조니의 목소리도 덩달아 커졌다. 엎치락뒤치락 싸우기 시작하는 모습을 가정용 로봇은 익숙한 듯 두었고, 휴먼토치와 스파이더맨을 말려줄 판타스틱4의 다른 가족들은 없었다. 언제나 있는 가벼운 다툼. 그게 왜 오해를 받을 부분인지 피터는 이해할 수 없었다.

“너 괜찮냐?”

“안 괜찮아….”

토치의 물음에 피터가 조금 훌쩍이며 답했다. 세상에 억울하고 슬픈 일이 이리도 많다니, 스파이더맨의 삶에 바람둥이로 오해받기까지 있을 줄은 몰랐다. 이따금 친구들이 피터에게 스파이더맨과 사귀느냐고 물을 때도 있긴 했지만 이보다도 나쁘진 않았다. 엄연히 남편이 있는 기혼자가 되어버린 피터는 포기가 가진 오해가 너무도 부끄러웠다. 맷과 진짜 부부가 아니고, 이혼하게 될지라도 말이다.

“오해는 풀면 돼. 그보다 스파이더맨이 수배 중이니까, 아이부터 FBI에 인계해야 해.”

피터의 등을 토닥이고 있던 맷은 거실에서 아이에게 자초지종을 묻고 있는 포기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경찰에게 이끌려 나오게 된 것, 그리고 어느 집에 들어간 뒤로 기억이 없다고 설명하는 아이의 말을 들으며 경찰에게는 넘길 수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요원과 거래를 했으니까 그쪽으로 아이를 맡기는 게 훨씬 더 안전할 것이다. 맷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피터와 조니의 시선이 매튜를 향했다. 둘은 스파이더맨에게 수배령이 내려졌다는 사실도 전혀 모르고 있던 모양이었다. 여전히 정신적으로 자라지 못한 10대 히어로들을 마주한 기분에 맷은 한숨을 푹 쉬었다. 조니와 피터는 20대에 접어들어 곧 서른을 앞두고 있음에도 여전히 건물을 부수거나 화재 사고를 일으키는 녀석들이었다. 이 둘을 위해 소송을 담당하고 했던 맷은 지금의 문제도 차분히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 정도는 커다란 사건에도 들지 않는다. 아이의 안전이 확보되고, 진범이 밝혀지면 수배령은 곧 내려갈 것이니 크게 걱정할 것은 없었다.

아이는 우선 포기에게 맡겨두고, 피터를 챙기는 게 나을 것 같다. 백스터 빌딩에서 아무 일도 없었음이 확실한 피터를 안아 올린 맷은 피터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했다.

“…맷??”

“집에 가서 쉬자, 피터. 피곤해.”

갑작스럽게 맷에게 번쩍 들린 피터는 당황스러움에 눈을 끔뻑이며 맷의 얼굴을 쳐다봤다. 피터를 공주님 안기로 안아 든 맷은 두 팔에 잔뜩 힘을 주고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갔다. 내 발로 걸을 수 있다는 피터의 말도 무시한 맷은 피터를 든 채로, 거실로 나섰고, 맷의 돌발적인 행동에 제 방에 멍하니 서 있던 조니도 그 뒤를 따랐다. 할 말이 많은 듯한 포기의 신체 반응을 무시하며 맷은 피터를 안아 든 채로 한참을 서 있었다. 그 상태로 들려 있는 피터의 심박이 부끄러움 때문인지 빨라지고 조금 뜨거워져서 그 반응도 꽤 재밌다.

휴먼 토치와 바람피운 애인이라는 이름표가 피터에게 붙여지기 전에 맷은 확실한 연인 사이임을 보여주기 위해 제 두 팔에 힘을 꽉 주었다. 연인 사이를 확실히 증명하는 방법을 맷은 언제나 알고 있었다.

 


 

도대체 무슨 정신으로 돌아온 것인지 알 수 없다. 택시를 타고 집 앞에서 내린 피터는 계산을 마치고 택시에서 내리는 맷을 힐끗 돌아보다가 다시 익숙한 집의 풍경을 보았다. 맷의 집이자, 피터의 집. 잠깐 다른 곳에서 자고 왔더니 어색하게 느껴지는 게 참 이상하다. 여기서 맷과 키스도 자주 했었는데 그때를 떠올리자, 피터의 뺨이 조금 달아올랐다. 이웃이나 감시하고 있는 요원 때문에 부부인 걸 과시하려고 아침과 저녁에 도보 위에서 키스했던 것이 어쩐지 오래 전의 기억처럼 느껴지는 것은 역시 결국 다시 돌아가야 하기 때문이 아닐까. 맷과 입을 맞출 이유가 사라진 피터는 아까보다 훨씬 나아진 기분을 즐기며 허전함을 신경 쓰지 않으려 애썼다. 버릇이라는 게 참 무서워서 같이 돌아갈 때는 당연히 이곳에서 입을 맞추고 서로를 행복하게 바라봐야만 할 것 같은 기분이 되었다. 아주 잠깐 떨어졌을 뿐이지만, 다시 또 만나는 게 반가워서 서로를 껴안는 부부. 맷과 어깨가 닿을 듯 가까이 선 피터는 고개를 올려 제일 최상층에 있는 맷의 집 창문을 보고 있었다.

아이는 포기가 데려갔고, 조니는 백스터 빌딩에 남았다. 맷에게 안긴 채로 택시에 올라 집까지 돌아온 피터는 수배령이네 뭐네 하는 소식은 자세히 모르는 상태였다. 그저 맷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끌려온 게 전부였다. 배도 고프고, 좀 속상하고 슬픈 게 전부다. 오해받는 게 익숙한 피터는 스파이더맨에게 수배령이 떨어졌다는 말에도 담담히 그렇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넘겨버렸다. 오해를 하나 풀면 다시 또 다른 오해가 쏟아져서, 결국 다시 문제가 생기는 게 당연한 삶이었다. 이 정도는 불행도 아니야. 피터는 울적한 마음을 스스로 위로했다.

꼬르륵

피터의 텅 빈 위장이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가 부끄러워진 피터가 급하게 집으로 들어가려는데, 맷이 갑작스럽게 피터의 손을 붙잡았다.

“피터”

집으로 들어가려던 피터가 그 부름에 고개를 돌렸다. 색안경을 쓰고, 정장과 넥타이를 바르게 한 맷은 완벽한 변호사의 모습으로 피터의 앞에 서 있었다. 혹시 또 일으킨 문제가 있냐고, 그도 아니면 이제 헤어지자는 말일까 싶어 피터의 어깨가 조금 움츠러들었다. 문제를 일으키는 것에 질려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약에 취했던 동안 마주한 여러 얼굴들을 떠올리며 피터는 다시 누군가를 떠나보낼 준비를 했다.

“맷…. 혹시 나랑 있는 게 싫은 거면—, 웁!”

입술에 닿는 따뜻한 감촉. 피터는 그것이 맷의 입술이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다. 익숙한 부드러움과 뜨거움에 자연스럽게 입술이 벌어지고, 선글라스 뒤로 흐릿한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혀가 입천장을 쓸고, 피터의 입안을 누비는 사이에 맷의 손은 피터의 턱을 붙들고 있었다. 익숙한 뜨거움이다. 어색하게 굳어 있는 대신에 맷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팔을 가볍게 쥔 피터는 키스에 맞추기 위해 애썼다. 평소보다 뜨거운 움직임에 타액이 맞물린 입술 사이로 흘러내리고, 호흡이 흐트러졌지만, 맷의 옷을 꽉 쥐며 피하지 않았다. 울렁이고 어지럽던 속을 진정시켜 주었던 맷의 손이 다시 피터의 등을 감싸며 거리를 더욱 가깝게 만들었다. 입술이 떨어지고, 타액이 흘러서 엉망이 된 피터의 입술을 엄지로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맷의 행동에 피터의 뺨이 더욱 붉어졌다. 키스를 하는 동안 모자랐던 호흡을 찾아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피터는 맷의 얼굴을 보았다. 여전히 바짝 붙어 있는 탓에 가까이 있는 맷의 얼굴도 조금 붉어져 있었다.

“넌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맷이 속삭이듯 물었다. 귓가에 닿아 있던 탓에 그 숨소리가 간지러워서 움찔거리던 피터는 자신을 꽉 안는 맷의 팔에 이끌려 맷에게 더욱 바짝 붙어 있어야만 했다. 서로의 가슴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는 이제 이곳이 바깥이라는 사실을 잊을 만큼 따뜻했다. 잠시 멍하니 그 온기에 빠져 있던 피터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입안의 여린 살을 살짝 깨물었다. 맷은 언제나 차분하고 조용히 피터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의견을 물었다. 스스로 선택하는 일보다는 이끌리고 등이 떠밀리던 일이 많았던 피터는 그 물음 앞에서 잠시 머리가 멍해졌다. 난 어떻게 하고 싶은 거지. 제대로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저 언제나 다시 낡은 침대로 돌아갈 각오만 했을 뿐이지, 관계를 어떻게 해보겠다는 욕심을 크게 부려본 적이 없던 피터는 제 입안을 씹으며 잠시 길을 잃었다.

그냥 누가 있었으면 좋겠어. 떠나가지 않을 사람이면 더 좋아.

외로움과 불행에 익숙했던 피터는 아주 오랜만에 숨겨두었던 소망을 꺼냈다. 이미 오래전에 포기한 일이다. 망치는 게 익숙하다며 웃어버리고 떠나보내는 걸 당연하게 여겼던 피터는 문뜩 떠오른 생각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발끝으로 서서 까치발을 하고 맷의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다시 맞물린 입술은 아까보다 더 뜨겁다. 질척하게 섞이는 키스는 아까보다 더 달아올랐다. 맷에게 먼저 키스하고 혀를 넣었던 피터는 어느새 다시 맷에게 숨을 헐떡이며 끌려가고 있었다. 몽롱해지는 머리는 며칠 전의 기억을 끌고 와서 피터를 흥분시켰다. 몇 시간이고 뜨겁게 붙어 있었던 것이 꿈보다도 선명하게 떠올라서 피터의 손에 잡혔다. 맷의 등을 꽉 붙잡으며 매달려 있던 피터는 떨어지는 입술이 아쉬워서 축축한 입술을 혀로 훑다가 맷을 보았다.

“이제 잃어버리지 마, 피터.”

“아—! 반지!!”

손을 잡고 반지를 끼워주는 맷의 모습은 아까까지 키스를 하던 사람답지 않게 차분했다. 피터는 손을 들어올려서 제 손가락으로 돌아와 있는 반짝이는 반지를 쳐다보다가 다시 매튜를 보았다. 반지를 빼고 있어서 화났던 게 아닐까. 슬며시 미소를 짓고 있는 맷의 얼굴을 보며 짧게 추측했으나 굳이 묻지는 않기로 했다. 괜히 물었다가 맷이 화라도 내면 그것을 감당해야 하는 것은 피터 본인이었다. 맷의 입술이 부드러운 호선을 그리며 미소 짓고 있는 것을 보며 피터는 그냥 소리 내 웃었다.

잠깐만 이러고 있자. 맷을 꽉 껴안으며 피터가 생각했다. 헐렁한 후드티 아래로 허리를 감싸는 맷의 손길이 간지러워서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피터는 맷의 등을 두 팔로 감싸안았다. 그냥 조금 지쳤나 보다. 낡은 침대로 돌아갈 날을 잠시 미뤄둔 피터는 다시 제 선택에 변명을 했다.

피터의 위장이 다시금 배고픔을 호소하며 울리기 전까지, 맷과 피터는 길 위에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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