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피터] 위장결혼 - 18
🕶x🕷/소설
2025. 8. 15. 14:47
재판 도중에 사라진 피고인을 어떻게 변호할 것인가. 넬슨 앤 머독은 커다란 문제에 맞닥뜨리고 있었다. 고작 열다섯밖에 지나지 않은 아이가 제힘으로 사라졌을 리가 없다는 것이 포기와 맷의 추측이었는데, 경찰의 생각은 다른 모양이었다. 아이에게 수배령까지 내리려는 강압적인 경찰에게서 목소리를 높여서 어떻게든 시간을 벌어낸 포기는 사무실의 전화가 불이 나도록 도움을 줄 수 있는 이들에게 연락 중이었다. 로스쿨을 함께 졸업한 힘이 있는 지인이나 경찰서에서 이따금 정보를 물어다 주는 입이 가벼운 이들에게 전화를 돌렸는데, 결국 얻어낸 게 고작 이틀이었다. 그 뒤에는 아이의 머그샷을 공개해 버리겠다며 으름장을 놓는 것을 보면 아이가 제 발로는 돌아오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는 듯했다.
돈도 안 되는 일에 왜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다른 로펌에서 일하는 친구가 포기를 나무랐지만 그것을 통화를 끊어버리는 것으로 답했다. 어디까지나 봉사심에, 돈과 상관없이 돕겠다고 선언한 케이스였지만 일단 넬슨 앤 머독의 일이 된 이상 제대로 해내는 것이 사무실의 철칙이었다. 프로 보노 활동은 사무실 재정 사정에 신경을 쓰느라 마음이 괴팍해지곤 하는 변호사에게 정의감을 고취해주는 중요한 일이었다.
강도 혐의에 도주까지 더해지면 망만 보았다는 것이 재판장에서 인정될지라도 실형을 피해 갈 수 없다. 보호 감찰 정도로 끝내보려던 노력이 헛수고로 돌아갈 위기였다. 어린 피고인을 찾아야 한다. 혹시나 제 발로 나온 것이라면 자수하도록 설득해야 할 것이고, 타의에 의해서 나오게 된 것이라면 생존 여부도 문제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 제대로 된 보호자나 가족이 없던 아이를 생각하면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검찰과 경찰에게는 고작 일감 중 하나일 테지만, 아이에게는 앞으로의 인생이 걸린 일이었다. 뉴욕에는 보호자가 없는 청소년이 많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맷은 이 일이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보호자가 사라지는 일은 뉴욕에서 아주 흔한 일이었고, 길바닥 자경단원은 자주 그런 아이들을 돌보곤 했다. 변호사 맷이 도울 수 없다면 데어데블이 도움이 될 것이다. 맷은 그런 생각으로 다시 슈트를 입었다.
피고인을 찾는다.
다시 검사와 협의한다.
FBI에게 진짜 강도 사건의 범인을 체포해 넘기며 재판에 도움을 받는다.
계획표라기에는 초라하기 그지없었으나, 그것이 맷이 지금 당장 내놓을 수 있는 답변이었다. 여기서 피고인을 찾는다는 부분은 데어데블의 일이다. 맷은 익숙한 경찰서 옥상에 서서 제 발아래에 놓인 건물을 살폈다. 추측이 맞다면 이 경찰서에서 근무하는 경관 몇몇이 강도에 가담했고, 스파이더맨이 체포한 범인들도 놓아줬을 것이다. 집중만 한다면 건물 안에 몇 명의 사람이 있는지 작은 숨소리까지도 알아낼 수 있는 맷의 레이더센스는 아이의 흔적은 발견하지 못했다. 발 아래의 두터운 천장을 지나서 더 아래로 감각을 넓혔다. 늦은 시간이긴 했지만, 레이더센스로 그려지는 경찰서의 모습은 평화로웠다. 마약 사건이 터지고, 강도 사건이 자주 일어났던 곳의 경찰서답지 않은 모양새였다. 간식을 먹으며 잡담을 나누는 사람들을 제외하고 다시 더 깊숙이 들어갔다.
집중해, 매튜.
맷은 자신을 다그치며 눈을 감고 깊이 숨을 들이마시고 다시 천천히 내쉬었다. 사람의 불분명한 형체들이 맷의 감각을 통해 분명하고 명확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아는 데어데블이 필요한 정보를 얻어내는 방식이었다.
“보석이 다 가짜였다니. 괜한 일에 엮여버렸어.”
작은 불평을 맷의 청각이 감지해 냈다. 피터와 함께 쫓았던 사람과는 다른 인물이었으나 같이 활동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강도이거나 뒤를 봐주며 보석 몇 개를 주머니에 넣는 경찰관 중 하나일 수도 있다. 데어데블이 턱을 만지며 추측했다. 기관의 모두가 정의와 공공의 이익을 추구했으면 하는 것이 맷의 오랜 바람이었으나 실상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았고, 진짜 정의감을 가진 이들은 얼마 되지 않았다. 주머니 사정에 따라 악인의 편도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는 변호사처럼, 범죄자의 편에 서서 주머니를 채우는 경찰관도 얼마든 존재할 수 있는 곳이 뉴욕이었다. 끝없이 일어나는 범죄와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있는 갱단, 그리고 그 위에서 군림하던 피스크는 뉴욕의 뒷세계를 콱 움켜쥐고 있는 커다란 판이었다. 홉고블린은 그 판에서 벗어나 새로운 루트 개척을 꿈꿨을지도 모른다. 킹핀에게 간섭받지 않고 마약을 거래하고 팔며 꾸준한 수입을 얻을 수 있는 창구. 이미 약에 찌들어 있는 이들보다는 든든하고 안정적인 수입원을 가진 평범한 사람들. 강도질 대신에 직접 일을 하는 평범하고 순수한 뉴요커를 노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마약은 평범한 사람들 대신, 강도들에게로 돌아갔다. 그 강도 중 일부에는 부도덕한 경찰도 섞여 있을 것이다. 가게 주인까지 엮여 있는지는 좀 더 조사해야겠지만 맷은 포기가 자주 보던 범죄드라마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나쁜 놈을 나쁜 놈이 방해하는 거지. 각자의 욕망이 얽혀서 결국 서로 무엇도 얻지 못하게 되는 거야. 줄거리를 설명해 주며 신이 난 포기의 목소리를 들으며 맷은 대충 대답을 해주곤 했었다. 그러고 보면 피터도 그런 드라마를 보는 것을 꽤 좋아했다. 피터의 취향은 범죄보다는 가족코미디나 멜로, SF 쪽이었다. 영화나 드라마 줄거리를 설명해 주거나 이따금 휴대전화나 노트북의 영상을 켜주던 피터는 화면을 보지 못하는 맷에게 상황을 말로 표현해 주는 것을 즐겼다.
“피터는 자고 있으려나….”
시간이 꽤 늦었음을 떠올리며 맷은 잠시 주머니 속 휴대전화를 잠시 쥐었다가 놓았다. 무리하게 했으니까 얌전히 자고 있게 두는 편이 낫겠다. 늦을 것 같다던가 오늘은 못 들어간다는 말을 꼭 해줄 필요는 없겠지. 집주인이 있든 없든 집을 편하게 쓰던 피터는 부부라는 이름표가 붙기 전에도 멋대로 매튜를 기다리곤 했다. 오지 않겠다 싶으면 소파에서 잠을 자거나 집에 돌아가곤 했는데, 이제 피터에게 집이라고는 같이 사는 곳밖에 없으니 아마 기다리다가 침대에서 잠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맷과 달리 규칙적으로 순찰을 하는 피터가 새벽까지 활동하는 일은 드물었다. 패트롤을 돌았다가 흐느적거리면서 집에 들어와서 밥을 챙겨 먹고 욕실을 썼다가 잠에 들겠지. 맷은 혼자 침대 중앙을 차지하고 팔다리를 편히 뻗은 피터의 모습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아침에도 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피터를 깨워준 후에 출근하자. 변호사의 일도, 데어데블의 일도 마무리되지 않은 매튜는 빠르게 아침 계획을 세웠다. 자신에게 주는 작은 보상이었다.
괜한 일에 엮였다며 불평하는 인물은 지하에 있었다. 경찰에서 주로 증거품을 보관하는 창고가 있는 곳이었다. 단순한 증거보다는 범행에 사용된 무기를 보관하는 곳이라는 표현이 정확하다. 뉴욕의 범죄자는 다양한 무기를 사용하고 있었고, 그 무기들은 주인에게 돌아가지 못하고 경찰서 창고로 돌아가곤 했다. 예전에 스파이더맨이 체포되었을 때도 웹슈터가 저런 지하에 압수된 일이 있었다. 그때는 블랙캣에게 도움을 청해서 훔칠 수 있었으나 오늘은 펠리시아에게 도움을 받을 수 없을 것이다. 블랙캣은 스파이더맨의 일이니까 도와줬을 뿐이고, 시민 돕기는 취미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맷은 클라이언트의 증거품도 아마도 저 창고 어딘가에 숨겨져 있지 않을까 추측했다. 돈이 되는 것은 부두나 어딘가에 숨겨뒀을 테고, 강도질에 사용된 총이나 칼은 저런 곳에 숨겨두는 편이 눈에 띄지 않고 안전할 터였다. 지문 감식이나 혈액 감정을 하면 그것을 쥔 사람은 아이가 아니었음을 쉽게 밝힐 수 있을 텐데, 협조적이지 않은 경찰 때문에 여전히 골머리를 앓는 이유였다. 역시 경찰 관계자가 연루되어 있어서겠지. 바닥을 발끝으로 톡톡 두드리며 데어데블은 사람들이 움직이는 소리를 듣고, 울림이 반사되어 벽에 부딪히는 광경을 그려냈다.
결국 야근을 끝내고 퇴근할 시간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을 듯했다. 커피를 사 오며 수다를 떨어준 밤 친구가 없다는 사실에 약간의 쓸쓸함을 느끼며 옥상에 앉았다. 피곤할 텐데 여기까지 부를 수는 없다. 피터의 재잘거림이 없는 새벽은 조용한 동시에 시끄러웠다. 도시의 밤은 여전히 밝았고, 사람의 크고 작은 소리로 넘쳐났다. 그 모든 것을 감각으로 그려내는 맷은 필요 없는 것들을 지우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피터와 함께 있는 게 참 익숙해진 모양이다. 운동선수와도 같은 소리와 따뜻하다 못해 뜨겁게 느껴지던 피부, 쉴 새 없이 말하는 입술의 감촉을 떠올리자, 맷의 입가에 미소가 스몄다.
피터의 밤은 고요하고 평화롭길, 맷은 속으로 기도했다.
피터, 너에게 정말 실망했다.
피터, 어떻게 네가 그럴 수 있어.
익숙한 목소리들이 피터를 불렀다. 너무 익숙하고 그리워서 조금만 정신을 놓으면 그 목소리를 향해 달려가고 말 것만 같아서, 피터는 기기 장치를 만지며 애써 고개를 돌리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곳은 리드의 연구실이다. 머릿속으로 그 사실을 되뇌며 손은 묵묵히 해야 할 일을 찾았다. 마약을 장치에 넣어서 자판을 두드리고, 성분분석을 해서 해독제를 제조하는 일은 지금 스파이더맨이 반드시 해내야만 하는 일이다. 실험실 밖에는 약에 취한 아이가 있었고, 마약에 노출되어 생명에 지장이 있을지도 몰랐다. 아이를 죽게 둘 수는 없어. 목숨까지 위험한지조차 알 수 없었으나 피터의 불안한 마음은 이미 아이를 죽어가는 상태로 인식했다. 돕지 않으면 죽는다. 이번에도 그렇게 둘 수는 없다. 스파이더맨의 손안에서 모래알처럼 부스러지고 사라진 이들의 생명을 떠올리며 피터는 그 손으로 익숙한 과학 도구를 쥐었다. 피터의 뒤편은 공동묘지가 되어 있었다. 차가운 바람이 뺨을 할퀴고 지나가고 원망의 목소리가 귀를 찔렀다. 스파이더맨이, 피터 파커가 망쳐버린 사람들의 삶이 그곳에 놓여 있었다.
아주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리드 리처드의 연구실에서 실험실 보조로 일했던 경험 덕분에 피터는 제정신이 아닌 와중에도 손을 움직일 수 있었다. 판타스틱 포의 빌딩에 종종 찾아와 필요한 것을 요청하기도 했던 터라 필요한 것이 어디에 있는지, 어떻게 작동해야 하는지 정도는 눈 감고도 알았다. 문제는 커다란 파도와도 같은 감정의 변화와 환상과도 같은, 머릿속의 가짜 이미지들이다. 누군가 제 목을 움켜쥐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아서 던져버린 스파이더맨 마스크는 발밑에서 부스러져 사라져 버렸고, 피터의 발아래는 죽어버린 잔디가 차올랐다. 척박한 모래알이 피터의 발목을 집어삼키며 눈을 돌리길 종용하고 있었다. 추워졌다가 더워졌다가, 숨을 쉴 수 없는 듯했다가 다시 과하게 호흡이 차올라서 심장이 쿵쿵 크게 뛰었다. 리드 리처드의 실험실은 온 우주의 과학기술과 비교해도 지지 않을 정도로 뛰어난 장비들로 가득해서, 비커 몇 개로는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수 있다. 기계가 자동으로 화학 물질을 분석하는 동안 피터는 답답한 가슴 위에 손을 올리며 슈트를 찢어버릴 듯 움켜쥐었다. 이미 불에 그슬려서 타버린 슈트 조각은 쉽게 찢어지고 가루가 되어 바람에 날려 흩어졌다.
약 때문이다. 스파이더센스가 너무 크게 울려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저번에는 어떻게 견딜 수 있었는지 떠올려보려던 피터는 이내 그때는 맷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장치에 기대어 쓰러지듯이 바닥에 주저앉았다. 달아오른 것인지 식은 것인지 알 수 없는 몸은 작은 것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며, 작은 상처도 커다란 것으로 만들어서 가슴에 구멍을 냈다. 주먹을 꽉 쥔 채 몸을 웅크리려던 피터는 제 손에서 느껴지는 딱딱한 감촉에 눈을 뜨고 손을 보았다. 반지다. 진짜 결혼반지. 언제나 같이 있어 주겠다는, 단단한 약속처럼 느껴지는 단순한 고리는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이곳에서도 여전히 반짝거렸다.
혼자서만 행복해지려고 하는 거야?
반지를 바라보던 피터의 귓가로 작은 속삭임과 같은 물음이 던져졌다. 작은 불길에 던져진 화약과도 같은 말은 피터의 내면을 터뜨리기에 충분했다. 뜨거워진 체온과 가빠진 호흡은 전투에서 느껴지던 흥분감도 같이 피터를 끓어오르게 했다가, 순식간에 아래로 추락시켰다. 구하겠다는 목표만을 쳐다보며 그저 앞으로 달리고 달려서, 문뜩 뒤를 쳐다보고 말았을 때 피터 파커가 두고 온 것들이 그 자리에서 피터의 발목을 쥐었다. 불에 모두 타서 남아있지 않은 길과 잃은 것들은 절벽이 되어 피터를 끌어당겼다.
“미안… 미안해….”
기계에 기대어 앉은 피터가 주먹을 꽉 쥐며 사죄의 말을 쏟아냈다. 할 수 있는 말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다. 미안해. 내가 다 망쳤어. 나 때문이야. 익숙한 말을 꺼내어 내미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끝내 환상이 지금 남아 있는, 제일 소중히 여기는 이의 얼굴이 되었을 때, 그리고 그것이 곧 메이 파커임을 알아차린 피터는 그 앞에서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떻게 날 속일 수 있니, 피터. 스파이더맨의 비밀로도 벅찬 삶에 다시금 생겨난 비밀을 탓하며 메이가 피터를 쳐다보았다. 원망으로 가득 찬 눈은 언제나 피터가 보았던 악몽과 같아서 견딜 수 있었다. 메이가 한 적도 없는 말들이 약기운을 핑계로 피터에게 날아왔다. 언제나 피터가 자신을 탓하던, 메이에게 들을까 두려워하던 단어들은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던져졌다. 펑펑 터지고 불길 속에 타오르던 약품. 피터는 바늘이 가득한 불 속에 있었다. 어디로 가도 날카롭고 아파서 도망칠 구석이 존재하지 않는 곳이었다.
피터 파커의 삶과 스파이더맨의 삶이 뒤섞여서 무엇도 유지할 수 없어질 때가 있었다. 어느 한쪽은 던져버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이 들어서 망설이다가 결국 무엇도 해내지 못한 채로 애매한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애쓰곤 했다. 한쪽을 던져버릴 용기도 없던 피터에게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그것밖에 없었다. 도저히 견딜 수 없을 때는 대답을 해줄 만한 사람을 찾아가 갖고 있던 짐을 늘어놓곤 했다.
나와 비슷해서, 나를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
맷에게 찾아가서 이야기를 늘어놓던 것은 결국 그런 마음이었다. 조금이라도 대답을 찾고 싶어서, 지독한 악몽에서 벗어날 방법을 찾고 싶어서 피터는 맷을 찾아가곤 했다. 완벽한 해결책이나 회피 방법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 삶에서 이해해 줄 친구 정도는 둘 수 있지 않느냐는 변명으로 잠깐 숨을 돌렸다. 피터가 보기에 맷은 완벽할 정도로 두 삶을 잘 이어 나가고 있었고, 두려움에 굴복하지 않고 꿋꿋하게 제 몫을 해내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선한 선택을 할 사람이니까. 잠깐 길을 잃은 순간에 맷을 찾아가 대답을 구하면 괜찮은 방향을 짚어줄 것만 같았다. 실제로도 맷은 몇 번이나 스파이더맨을 위기에서 구해주었고, 다시 이 삶을 이어 나갈 여유를 찾아주었다.
지금은 혼자야. 제게 속삭이는 악몽에 주저앉은 피터가 생각했다.
확실히 스파이디는 멀쩡하지 않은 거 같다. 이미 슈트가 불에 타서 엉망인 채로 아이를 안고 들어온 피터가 리드의 연구실에 들어가는 것은 언제나 비슷한 일이라 그저 그 뒤를 장난스레 따랐던 조니는 기계를 한참 조작하던 피터가 그 앞에서 쓰러질 때는 상황이 무언가 많이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정신을 잃은 것 같지는 않은데…. 피터가 던져버린 스파이더맨 마스크를 대신해서 주워준 조니는 시선이 어쩐지 이상한 피터의 앞에 앉았다.
“거미줄, 괜찮냐…?”
“…흐으.”
대답은 없지만 숨소리가 확실히 이상하다. 조니는 몸속에서 벌어지는 화학물질 파티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진 피터의 어깨를 살며시 잡았다. 호흡이 가쁘고 얼굴이 붉다는 것은 알겠는데 그 이상의 것은 모르겠다는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럴 때 다른 가족들이 우주여행을 가버려서 도움을 요청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스파이더맨이 갑자기 집에 찾아왔는데, 이상해. 하다못해 벤이라도 있었으면 같이 머리를 굴려서 피터에게 괜찮은 대답이라도 얻어낼 수 있지 않았을까 싶은데 결국 지금 벡스터 빌딩에 있는 것이라고는 멋쟁이 휴먼 토치와 유능한 로봇 H.E.R.B.I.E.뿐이었다.
일단 상태가 이상한 피터를 방이든 어디든 옮겨야 할까, 고민하며 무작정 안아 든 조니는 두 손으로 피터를 받쳐 들고 제 방으로 걸어갔다. 거실에는 피터가 안아 들고 온 아이가 있었고, 스파이더맨은 지금 마스크도 쓰지 않은 상태라 같은 공간에 둘 수 없다는 게 스파이더맨과 오래 알아 온 친구로서의 판단이었다. 정체를 오랫동안 알아 온 휴먼 토치에게도 한참이나 비밀로 할 정도로 제 정체에 예민한 스파이디가 깨어나서 화를 내며 거미줄을 쏘면 괜한 말싸움으로 번질 게 뻔했다. 바깥이었으면 피터를 안아 든 채로 날아서 방으로 가면 되었는데, 집에서는 플레임 온 상태로 나는 것을 삼가라는 잔소리를 들은 뒤라 결국 걸어서 옮겨야만 했다.
“야, 너 저번보다 무거워진 거 같다?”
“…….”
“나도 불인데, 너는 더 불같아. 듣고 있어, 피터?”
기억보다도 체온이 더 높아진 것 같아서 말해봤지만, 흐느적거리는 피터는 대답이 없었다. 거뭇거뭇하게 탄 슈트 사이로 화상자국이 보여서 다친 것은 맞는데, 보통 화상을 입은 정도로 쓰러지는 법이 없는 스파이디가 이렇게 정신도 못 차리는 것은 다른 이유가 있는 게 아닐까 싶었다. 리드의 장비든 뭐든 써서 피터를 살펴봐야 하나. 제 침대 위에 무작정 피터를 눕혀둔 조니는 피터의 뺨에 생겨 있는 화상을 제 손으로 조심스레 더듬으며 이상한 점을 찾아내기 위해 노력했다. 불에 탄 거미. 화상 자국이 군데군데 있지만 심하지 않고. 총을 맞은 것도 아닌 거 같고. 몸이 과하게 뜨거운데 감기라도 걸린 건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이런 추측밖에 없었다. 구급상자를 찾아오는 사이에도 피터는 얌전히 침대에 누워 숨만 심하게 쉬며 앓는 소리를 내고 있었다. 열이 높은데.
“H.E.R.B.I.E.! 물수건 같은 것 좀 가져와!”
피터의 체온을 대충 살펴본 조니가 소리쳤다. 일단 몸 온도라도 낮춰야 한다. 필요하면 수영장이나 욕실 욕조에 담가두는 방법도 있겠지만 일단 화상 치료가 먼저였다. 이보다도 큰 화상도 며칠이면 낫는다는 것을 알긴 했지만 그땐 리드가 있어서 영화 같은 회복 탱크를 썼을 때의 경우였다. 장난으로 불을 좀 던질 때마다 아프다고 버럭버럭 짜증을 내던 피터의 앙칼진 목소리를 떠올리며 조니는 소독약과 연고를 손에 들었다. 지금 스파이디에게는 나밖에 없어. 나중에 몇 배로 사라고 할 생각을 하며 손을 움직였다. 어차피 너덜너덜해진 슈트는 상처를 살피겠다는 핑계로 찢어버렸고, 잘 찢어지지 않으면 손가락에만 불꽃을 일으켜 살살 태워버렸다. 피터가 놀다가 두고 간 스파이더맨 슈트나 남아도는 판타스틱 포 슈트를 입으면 되는 일이니까. 로봇이 체온을 식힐만한 것을 들고 올 동안 조니는 친구를 보살피는 친절하고 유능하고 멋진 휴먼 토치의 역할에 빠져들었다.
“어, 음….”
이미 다 타서 엉망인 슈트 상의를 찢듯이 벗겨내고 계속해서 내려가던 조니 손이 허리 근처에서 멈추고, 잠시 숨을 삼켰다.
“피터, 야, 일어나봐.”
“으읏…”
다시 피터를 흔들어보지만 나오는 것이라고는 저런 숨소리밖에 없었다. 얼굴은 붉었고, 체온도 과하게 높다. 감기인데 무리해서 움직인 게 아닐지 생각했던 조니는 스파이더맨의 얄팍한 슈트 아래로 느껴지는 묵직한 존재감에 제 추측이 틀렸음을 알았다. 그 사실을 알고 나니 피터가 내뱉는 숨결이 어쩐지 달아오른 듯 느껴졌다. 달콤하고 뜨거운 숨은 조니의 생각을 단단하게 만들어주었다. 흥분. 남자로서 몸이 보여주는 반응을 모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스파이디의 슈트 아래 존재감은 혹여 피터가 제 아래의 자존심이 부족해 무언가를 덧댄 것이 아니라면, 흥분을 나타내는 게 분명했다. 아이까지 안고 들어오더니 이제는 쓰러져서 흥분해 있는 게 도대체 무슨 상황인지 조니는 점점 더 알 수가 없어졌다. 아무렇지 않게 피터를 안아 들고, 흔들던 행동은 이제 조심스러워져서 천천히 피터의 뺨을 톡톡 두드리는 것으로 바뀌었다.
“너 진짜 일어나야 해….”
아니면 내가 생각하는 그런 거 해야 할지도 모른다고. 피터의 뺨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툭툭 치며 조니가 비명 같은 한숨을 내쉬었다. 우주여행을 하다 보면, 차원이든 어디든 다니다 보면 신기한 식물이나 마법 따위를 마주할 일이 많았다. 가끔은 그중에서 지구인에게는 치명적인 독이나 작용을 일으키는 것들이 있기도 했는데, 최음 작용이 있는 것들도 아주 가끔 있었다. 어느 행성을 멋지게 구해주고 받은 과일이 하필이면 그런 것이라면? 결국 하루 종일 방에 갇혀서 할 수 있는 일을 열심히 하는 것밖에 없다. 마음에 드는 여자를 만나서 눈이 맞았다면 혼자일 필요가 없겠지만, 넓은 우주에서 마주치는 여성은 늘 오래 함께 있지 못했다. 아무튼 스파이디도 그런 과일이든 무언가에 당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조니는 제 얼굴을 가볍게 쓸어내리며 고민에 빠졌다. 절친한 친구를 이대로 내버려둘 수는 없다. 그걸로 나아진다면 얼마든지 해줄 수 있다. 하지만 문제는 그 뒤의 일이었다. 피터가 화를 내면 어떻게 해. 화난 스파이더맨의 표정과 말투, 그리고 그 화가 얼마나 오래가는지 아는 조니는 피터의 위에 올라탄 채로 슈트 바지를 찢어 내릴지 말지 고민에 빠져 있었다. 이것은 친구 관계의 문제였다.
“미안해… 내가 망쳤어, 내 탓이야.”
헐떡이는 숨결 사이로 피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물기에 젖은 목소리는 슬프고 애처로웠다. 조니는 그 말이 자신에게 하는 말은 아니라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스파이더맨은 잔뜩 눈물 젖은 얼굴로 조니를 바라보는 일이 없었다. 언제나 같이 뉴욕에서 날아다니는 자동차를 타고 다니면서 즐겁게 웃는 일이나 하는 게 둘의 놀이 방식이다. 장난을 치고, 서로 거미줄과 성냥이라 부르면서 필요할 땐 언제나 손을 내밀었다. 스파이더맨이 피터 파커라는 사실을 오래도록 모른 채로 조니는 그와 오래 친구 관계를 유지해 왔다. 누군지 굳이 중요하지는 않으니까. 이미 정체를 드러내고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는 휴먼 토치와 달리 스파이더맨은 데일리 뷰글에게 인신공격을 받으며 살았고, 종종 좋지 않은 일에 엮이곤 했다. 그래도 같이 놀면 재밌고, 즐거우니까. 스파이더맨의 절친이라는 자리에 있는 조니는 피터가 우는 모습을 본 적이 많지 않았다. 그보다는 장난을 치고 웃는 모습이 더 어울리니까.
도와줄게. 눈물로 젖은 눈가를 엄지로 쓸어주며 조니는 긴 숨을 내쉬었다. 자신의 방에 인사불성의 친구를 눕혀두고, 옷을 벗긴다는 것이 얼마나 파렴치하고 무서운 짓인지 떠올리자, 손이 멈칫했다가도 헐떡거리는 호흡을 들으면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탄탄한 슈트 바지를 두 손으로 쥐고 천천히 내리려는데 엉덩이가 걸려서 잘 내려가지 않았다. 역시 태워야 하나. 손가락에 다시 불꽃을 일으킬까 고민하며 피터의 바지를 꼭 쥔 조니는 피터의 위에 올라타 진심으로 고민하고 있었다.
—제조 완료—
멀찍이서 들려오는 기계음에 조니가 손을 멈추고 제 방문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뭘 완료했다는 거지. 여전히 조니의 아래에서 숨을 헐떡거리는 피터의 호흡은 아까보다 거칠었다. 역시 하던 걸 마저 해야겠지. 스파이더맨의 바지를 벗기는 일에 다시 집중하기 위해 애썼다. 스판덱스 슈트는 생각보다 탄탄하고 달라붙어서, 불에 그슬려 피부에 붙어버린 것을 단번에 끌어내리는 것은 어려웠다.
“스톰 씨, 스파이더맨이 해독제를 만든 것 같아요.”
조니의 방문 앞에 온 H.E.R.B.I.E.가 말했다. 바지를 붙잡고 애를 쓰던 조니는 몸을 멈추고 로봇이 들고 있는 주사기를 바라보았다. H.E.R.B.I.E.가 들고 있는 주사기는 총 두 개였는데, 하나는 이미 빈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푸른색의 액체가 들어가 있었다. 척 봐도 무언가의 해독제처럼 보이는데…. 조니는 제 아래에서 숨을 쌕쌕 쉬고 있는 피터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가 다시 주사기를 쳐다봤다.
“피터가 자기가 쓸 해독제를 만든 거야?”
“일단 거실의 손님에게는 투약했어요. 효과가 있었어요.”
제멋대로 움직인 로봇이 차분히 답했다.
“그럼 피터에게도 효과가 있을까?”
“스파이더맨이 실수로 해독제를 2개로 만든 게 아니라면요. 무척이나 영웅적인 스파이더맨은 하지 않을 실수겠지만요!”
로봇치고는 과장된 목소리였다. 조니는 스파이더맨에게 딱 한 번 구해진 적이 있던 H.E.R.B.I.E.가 종종 스파이더맨을 영웅적인 사람으로 추켜올리는 것을 종종 보았다. 아마 지금까지도 구해진 일에 감사하는 모양이었다. 피터의 실수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침대에서 내려온 조니는 가정용 로봇에게서 주사기를 받아 들고 숨을 꿀꺽 삼켰다. 혹시라도 스파이더맨이 거미 괴물이나 무수한 거미 때로 바뀌면 그때는 플레임 온 상태로 싸워야만 할 것이다. 부디 피터가 실수한 것이 아니길 빌며 조니는 피터의 벗겨진 가슴팍에 주사기 끝을 대고 버튼을 눌렀다. 버튼이 눌리며 숨겨진 바늘이 튀어나와 피터의 얇은 피부 위에 박히고 약물이 천천히 주입되었다. 푸른 액체가 주사기에서 모두 사라지고서야 손을 떼어낸 조니는 빈 주사기를 던지듯이 놓아두고 다시 피터의 어깨를 잡아 흔들었다.
“피터, 정신 차려봐!”
“…으으.”
조니의 손길에 떠밀려 상반신이 일으켜진 피터가 흐느적거리며 숨을 내뱉다가 이내 조니의 품으로 무너지듯 쓰러졌다. 가슴팍에 뺨을 대고 앓는 소리를 내는 피터는 확실히 점점 체온이 내려가고 있었다. 피터가 쓰러지지 않도록 제 몸으로 지지해 주며 조니는 제 가슴팍에 닿는 온도로 피터의 체온을 파악했다. 불보다는 덜 뜨거워졌다. 이제는 정말 아픈 사람처럼 낑낑거리는 피터를 가볍게 토닥여준 뒤 다시 침대에 눕혀주며 조니는 보란 듯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침대에 토하면 가만 안 둘 거야, 웹 헤드. 내 침대가 얼마나 비싼 곳인 줄 알아? 아무나 못 눕는 곳이라고.”
이불까지 가져와 피터의 몸을 뒤덮듯 덮어버렸다. 바지만 입은 피터의 몸이 이불 아래로 가려졌다.
“시끄러워, 조니….”
침대에 얼굴을 파묻으며 피터가 중얼거렸다. 눈물로 잔뜩 젖어 붉어져 있는 주제에 입은 살아난 모양이다. 다시 호흡이 돌아오기 시작한 피터를 보고 안심한 조니는 피터의 옆에 남은 공간에 풀썩 누워버렸다. 아까까지 결심한 게 헛고생이 되어버리긴 했지만, 차라리 다행이다. 이불에 파묻혀 떨어지라고 웅얼거리는 피터를 보니 해독제가 맞는 모양이었다. 안심하며 천장을 보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피터를 보는데 눈꺼풀이 감겨 있었다. 해독제에 수면제라도 섞여 있었나 싶어서 손으로 감긴 눈을 살살 두드리는데, 정말 자는 모양인지 눈꺼풀만 파르르 떨릴 뿐 피터는 깨어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떤 결심까지 했는지 스파이더맨은 절대 모르겠지. 허탈함과 안심이 교차하며 조니의 마음이 조금 찔렸다. 결심은 했지만 실제로 해버렸다면 피터가 정말로 화냈을 테니까, 다행이라고 애써 조니는 제 마음을 달랬다.
너 그거 뭐야. 찰싹 붙어 있는 게 불편한지 잠든 채로 몸을 뒤척이던 피터에게서 조니는 익숙하지 않은 것을 발견했다. 얼굴을 가볍게 쓸어내리려고 나온 피터의 왼손에는 조니가 알지 못하는 반지가 하나 끼워져 있었다. 너 여자 만나? 피터의 손을 잡으며 조니가 벌떡 일어나서 물었으나 이미 잠이 든 스파이더맨은 아무런 대답도 해주지 못했다. 반지가 끼워진 손가락은 아무리 봐도 약혼하거나 결혼할 때 반지를 끼우는 손가락인 데다가 반지도 꽤 비싸 보였다. 약혼반지가 아닌가 싶었으나 조니는 피터에게서 누구랑 사귀고 있다던가 만나고 있다던가 결혼을 준비한다든가 하는 말을 들은 적이 없었다.
절친인데! 몰려드는 서운함과 짜증에 피터의 손을 꾹 쥔 조니는 피터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나오자, 손에 힘을 풀었다. 반지 때문인지 피터의 약지에는 고리 형태의 화상이 남아 있었다. 불에 달궈진 반지 때문에 남은 상처인 모양이었다.
“어차피 헤어질 거지?”
피터의 손에 남은 흉을 만지작거리며 조니가 물었으나 이미 잠에 빠진 피터는 대답이 없었다. 스파이더맨과 가장 친한 친구, 휴먼 토치는 피터의 곁에 누운 채 멍하니 천장을 쳐다보고 있었다. 해가 져서 어두운 방 안에는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없어서 결국 그저 아무것도 없는 캄캄한 곳만 멍하니 보았다. 불을 켜거나 불꽃을 일으키면 되는 일이었으나 피터가 깨어날까 봐 차마 그러지 못하고, 그냥 그 옆에 누워만 있었다.
'🕶x🕷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맷피터] 위장결혼 - 19 (0) | 2025.08.24 |
|---|---|
| [맷피터] 부탁 (0) | 2025.08.17 |
| [맷피터] 위장결혼 - 17 (0) | 2025.08.02 |
| [맷피터] 위장결혼 - 16 (0) | 2025.07.27 |
| [맷피터] 위장결혼 - 15 🔞 (0) | 2025.07.19 |
🕶x🕷/소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