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피터] 부탁
🕶x🕷/소설
2025. 8. 17. 18:20
졸업한 모교에 다시 돌아가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다. 졸업장이 취소되거나 모종의 이유로 서류가 사라져 다시 배움을 해야 하는 처지가 된다면 울적하고 부끄러운 일이 될 수도 있겠으나, 배운 것을 나누는 처지로 칠판 앞에 서는 사람이 되어 돌아가는 것은 꽤 즐거운 일이었다. 이런저런 직업에서 헤매던 끝에 다시 자리 잡은 선생님이라는 직업은 피터가 지금까지 해온 어떤 일보다도 보람 있고 즐거웠다. 스파이더맨이 되어 뉴욕의 빛나는 밤을 지키며 사람들을 돕는 것도 좋았으나 피터 파커인 채로 머릿속에 있는 지식을 나름의 교육체계를 만들어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것은 그보다도 더 재밌었다. 모교에 안경쟁이 파커 대신에, 파커 선생님으로 불리는 입장이 되어 돌아온 피터는 그 즐거움으로 입가에 미소를 잃지 않고 아이들을 대할 수 있었다. 요즘 아이들은 영악하니 무섭다느니 하는 다른 선생님들의 말을 무시하며, 피터는 제가 짜둔 과학 수업에 맞추어 교재를 사비로 구매하고 과학에 관심을 가지는 아이들을 위해 특별반 운영까지 직접 하겠다며 나섰다.
방과후 수업은 돈이 되지 않아요, 피터 선생님.
행정실에 추가 수업 개설을 요청하니 돌아온 말은 퉁명스럽고 불친절했다. 돈을 위해서 하는 일은 아니니까요. 피터가 능청스러운 체를 하며 웃어넘기고 나오는데 뒤통수로 ‘저런 열정 있는 사람은 귀찮다.’ 따위의 말들이 따라붙었다.
갓 부임하고 두 달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말들은 여전히 피터의 뒤에 가득 쏟아져서 이제는 학교 학생들까지 알 지경이 되었고, 열정 많은 신입 선생님을 바라보는 시선도 다양해졌다. 피터의 말을 잘 따르는 아이들이 꽤 늘어났지만 반대로 너무도 빡빡한 수업 진행에 불만을 토로하는 아이도 있었고, 선생님의 역할을 너무 많이 하려 든다며 팔짱을 끼며 주의를 주는 동료 교사도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피터 선생님은 행정실 직원과 무의미한 신경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오래도록 미드타운 고교의 행정실을 지켜온 줄리 선생님은 벌써 다섯 번째 피터가 요청한 과학 관련 책을 요리책 따위로 주문하며 불만을 표시하고 있었다. 몇 번을 말해도 듣는 체도 하지 않으며 콧방귀를 뀌는 석상 같은 사람 앞에서 갓 부임한 피터가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 재수 없는 얼굴을 때리고 싶다는 생각까지 했어요. 여자를 때리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건… 잘 안 하지만요. 정말로요. 그리고 진짜 그랬으면 선생님 자격도 박탈이겠죠.”
긴 한탄을 쏟아내며 테이블에 고개를 파묻었다. 낡은 테이블은 피터가 엎드리자 끼익 소리를 내며 아주 조금 기울었다. 아직 한 모금밖에 마시지 않은 잔이 조금 옆으로 움직이며 안의 내용물이 쏟아질 듯 흔들렸다. 우유 한 잔, 보통의 술집에서는 절대로 받아주지 않을 주문이었으나 이곳은 다행히 얼굴을 붉히지 않고 피터의 취향을 맞춰주었다.
“소송감이지. 그런 일로 사무실을 찾아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조심해.”
맷이 테이블이 완전히 기울어지기 전에 테이블 다리를 발로 지탱하며 쓰러지는 것을 막으며 담담히 말했다. 소송, 고소, 법적인 조치. 피터는 법이라는 단어가 지긋지긋했다. 스파이더맨에게 자주 따라붙는 그 법적인 언어들은 몇 번이고 경찰이 스파이더맨을 쫓는 이유가 되었으며 피터가 범죄자로 오해받고 수감되게 만들기도 했다. 알아요, 아는데…. 맷의 잔소리 같은 말에 웅얼대며 대답을 하던 피터는 고개를 들고 제 앞에서 무표정하게, 조금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맥주를 마시는 변호사를 쳐다봤다. 변호사 맷 머독은 친구와 함께 변호사 사무실을 창업했고, 그 덕분에 피터처럼 동료와 신경전을 벌일 필요도 없이 하고 싶은 사건을 제멋대로 맡으며 나름대로 또 다른 자아를 잘 굴리고 있었다. 시각장애인인 그가 법정에 서면 눈이 보이는 사람보다도 더 판사와 배심원이 있는 쪽을 잘 바라보며 얼마나 멋진 말을 쏟아내는지, 그 광경을 몇 번 보았던 피터는 맷의 잘난체하는 말과 표정은 눈감고도 상상할 수 있었다.
시각장애인 맷 머독은 소시민의 사건을 주로 맡아주는 변호사이며, 승률이 높다. 10달러라도 주면 다행이다 싶은 대기업과의 싸움도 맷이 끼면 그 배상금이 몇 배로 늘어났다. 대기업의 횡포에서 시민들을 구해주는 시민의 지팡이. 변호사에게 붙기에는 꽤 거창한 칭호가 종종 맷이 일하는 넬슨 앤 머독 변호사 사무실에 붙여졌다. 무료 변호도 하는 정의로운 변호사를 깔보는 기사를 낸다는 것은 신문이나 뉴스를 주로 구독하는 가난한 뉴요커들과 정면으로 싸우겠다는 도전장을 내는 것과 비슷했다. 사실 요즘은 맷이 데어데블이라는 소문 때문에 그 도전장이 흐지부지해지고 있긴 했지만, 아무튼 맷은 여전히 뛰어난 변호사였다. 피터는 그것만큼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정말로 변호사 일을 하느라 바빴던 맷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하고 맥주 한 잔을 천천히 마셨다. 안주는 뭐가 좋냐는 피터의 말에 아무거나, 라고 말하길래 피터는 멋대로 햄버거를 시켰다. 메뉴가 마음에 안 드는 듯 맷의 미간이 조금 좁아진 듯한 기분이 들었으나 그럴 때는 먹고 싶은 걸 확실히 말하지 않은 쪽이 나쁜 것이니 피터가 신경 쓸 것은 아니었다. 맷이 마실 맥주, 안주로는 햄버거, 그리고 우유 한 잔. 맷과 자주 만나는 바에서 제가 먼저 나서서 주문한 피터는 한참을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불합리한 신경전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그 긴 수다가 이어지는 동안에 맷은 짧게 맞장구를 쳐주거나 조용히 맥주를 마셨고, 이따금 소송당하지 않게 조심하라는 당부만 덧붙였다.
“변호사처럼 굴지 마요, 맷.”
“난 변호사잖아.”
피터가 불평하면 맷이 태연히 어깨를 으쓱였다. 평소와 다른 대화 주제는 두 사람의 사이를 평범하게 만들어주는 듯했다. 평소였다면 둘 다 슈트 차림을 하고 구역의 갱단이나 자경단원의 삶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을 텐데, 오늘은 참 평화롭고 평범한 주제만 안주로 놓이고 있다. 피터가 제멋대로 시킨 햄버거를 한 입 먹고 내려둔 맷은 맥주로 입안을 씻으며 주절주절 열정적인 피터 선생님의 우울하고 슬픈 학교생활에 대해 쏟아내는 피터를 향해 눈을 돌렸다. 보이지는 않지만, 보이는 척을 하는 법은 아는 맷은 고개를 움직이면 그게 꽤 눈에 띄는 행동이 된다는 것을 알았다.
테이블에 앉은 지 한 시간이 되어가도록 피터가 본론을 꺼내지 않아서 결국 맷이 입을 열었다.
“그래서 용건이 뭐야, 피터?”
맥주잔에 맺힌 물방울이 또르르 굴러내려 테이블에 뚝뚝 떨어졌다. 그 작은 소리가 무엇보다 크고 선명하게 들리는 맷은 피터의 심장 소리와 근육의 움직임도 모두 알 수 있었다. 맷의 단골 술집답게 노랫소리가 다른 곳에 비해서 작은 JOE‘S BAR에서는 맷이 상대의 목소리뿐만이 아니라 심박, 호흡, 근육의 작은 경련까지도 알아차리기 편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심장이 뛰는 게 평소랑은 어쩐지 다르고, 망설임이 섞여 있는 피터의 신체 신호를 알아차린 맷은 피터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따로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추측을 했다. 피터가 수다 떠는 것을 듣는 것도 즐겁긴 했지만, 밤이 깊어지도록 수다만 떨다가 헤어질 수는 없었다. 술집을 나서면 슈트로 갈아입어야 했고, 데어데블은 헬스 키친을 이리저리 돌아봐야만 했다. 이 상태면 피터도 같이 따라갈 모양이긴 했으나 빌런을 때리면서 선생님의 고충을 털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술집을 나서는 순간 두 사람의 대화 주제는 바뀌어 있을 게 분명했으므로, 맷은 피터에게 미리 답을 구했다.
눈치 빠른 변호사. 피터는 입술을 삐죽이며 우유 잔을 들고 미지근해진 흰 우유를 한 모금 마셨다. 입술에 남은 우유 수염을 혀로 훑으며 어떻게 부탁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맷은 입가에 미소를 슬쩍 지은 채로 피터를 보고 있었다. 말해봐. 맥주 반 잔으로 기분이 좋아진 것인지, 그도 아니면 피터의 수다가 재밌었던 것인지 알 수 없었으나 맷의 기분이 좋아 보여서 피터는 사실 처음부터 제일 하고 싶었던 말을 겨우 꺼내보기로 했다.
“다음 주에 시간 있어요?”
“시간?”
“화요일 오전에요. 변호사 일로 바쁜 거면 또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하는데…, 조니는 예전에 온 적이 있어서 별로일 것 같고, 아이들에게 모범적인 녀석은 아니잖아요. 학생 여러분 멋진 히어로가 되세요, 하는 것도 이상하고요. 그래서 모범도 되고 존경할 만한 사람이니까 캡틴 아메리카도 고민해 봤는데, 피터 파커가 스티브 로저스를 개인적으로 부를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게 알려지는 게 진짜 이상할 것 같아서 보류했어요. 사실 물어봐도 안 와줄 수도 있는데, 스팁이니까 일단 들어는 봐줄 거 같고…. 그런데 미국의 상징을 이런 작은 곳에 세워도 되는가, 진심으로 고민도 되는 거예요. 그래서 다음으로 고민해 본 게 리드 리처드였는데, 마찬가지잖아요. 판타스틱 포를 마음대로 부르는 게 어쩐지 이상하고, 아, 조니는 별개예요. 걘 어차피 어디든 부르면 잘 오잖아요. 뉴욕에서 휴먼 토치의 잘난 척을 안 본 사람을 찾는 게 더 빠를 거예요. 아무튼 그래서 또 보류하고, 보류하다가…”
“잠깐, 피터. 조용히 해봐.”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빠른 말에 맷이 표정을 구기며 테이블을 가볍게 쳐서 피터의 시선을 끌었다.
“그래서 토니 스타크도 고민을…. 아, 네. 화요일 오전, 시간 돼요?”
피터가 하던 말을 멈추고 맷을 보았다. 숨도 안쉬고 이어지는 빠른 말에서 맷은 나름대로 시민의 지지를 크게 받는 동료들의 이름을 들었는데, 공통점이라고는 시민들이 좋아하는 유명인이라는 것밖에 알 수 없었다. 시간과 후보자들의 이름 말고는 정보라고는 무엇도 없는 말에서 맷은 가장 중요한 것이 빠져 있음을 알았다.
“화요일에, 정확히 뭘 하는 거야?”
“아이들을 위한 작은 강연이요. 꿈과 희망을 키워주고, 나처럼 멋진 사람이 되세요! 하는 그런 말을 해주는 강연자가 필요해요.”
맷을 정면으로 직시하며 피터가 말했다. 고등학교에서 삶과 직업에 대한 강의를 해줄 일일 강연자가 필요하다는 뜻이다. 맷은 피터가 후보로 고민했던 이들이 작은 공립 고등학교에서 마이크를 쥐기에는 터무니없이 유명하며, 지구나 우주를 지키느라 바쁜 사람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나 굳이 피터에게 지적하지는 않았다. 피터 본인도 그것을 알기에 그들에게 요청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결국 보류하고 보류하며 남은 사람이 맷이라는 게 피터의 결론이었다.
“데어데블은 강연자로는 안 어울릴 것 같은데. 아이들에게 급소를 잘 치는 방법 같은 걸 알려주는 건 과하잖아.”
맷의 입가에 다시 웃음기가 돌았다. 장난기가 가득한 대답에 피터는 발로 맷의 종아리 언저리를 툭툭 차며 진짜 중요한 일이라며 투정을 부렸다. 그런 거면 스파이더맨이 되어 강연자가 되겠다며 나섰을 것이다. 그럴 수 없으니 문제였다. 스파이더맨은 직업이 아니었고, 마찬가지로 데어데블도 직업이 아니었다. 히어로가 직업이 되려면 일단 복면부터 벗어야 했는데 맷과 피터는 해당하지 않는 이야기였다. 피터는 다시 어쩌다 이런 상황이 되었는지 설명을 시작했다.
고등학교에서는 매 학기 아이들을 위해 직업인 강연을 하곤 했다. 언제나 그렇듯 강연자에게는 교통비나 겨우 될 법한 돈밖에 주지 않아서 이제 그 자리에 끼워 넣을 사람들이 부족했고, 선생님들은 서로 누굴 부르나, 생각만 하며 책임을 미루고 있었다. 거기에 피터는 갓 부임한 신입으로 그저 방과후 과학 교실에서 할 감자 실험 따위의 생각을 하며 학생 명단을 정리 중이었는데, 행정실의 줄리 선생님이 대뜸 ‘피터 선생님께 부탁드리죠. 원래 기자셨잖아요.’ 하며 난데없이 피터를 일에 끼워 넣은 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잘난 체하는 콧대가 피터를 향하고, 눈가의 주름이 구겨지며 피터가 거절하면 다시 창피를 주거나 무시할 말을 준비하고 있었다. 피터가 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도 그랬지만 나이를 먹은 행정실의 선생님은 더욱 능구렁이 같고 무서운 면이 있다. 그 앞에서 피터는 작은 쥐 한 마리가 된 기분이었는데, 정확히는 거미 한 마리이겠지만, 초대할 사람이 없다고 말했다가는 열정에 비해 실력 없는 교사로 찍힐 위기였다.
그래요. 제가 데려오죠. 피터는 스파이더맨을 하며 익힌 능청스러움으로 당당히 말을 내뱉고 웃었다. 웃는 사람에게 이길 자는 없다. 벤 삼촌과 메이 숙모가 피터에게 자주 말했던 것을 다시 사회생활에서 선보였고, 아무튼 그 상황에서 피터는 승리했다. 그렇지만 문제는 남아 있었다. 누굴 데려올 것인가. 교통비도 안 되는 터무니 없는 돈을 받고 강연을 해줄 강연자를 구해야 한다는 압박감은 피터의 목을 쥐었다. 스파이더맨의 지인들이 먼저 여럿 떠올랐는데, 아무튼 그게 앞서 말한 그 보류 대상들이었다. 그리고 결국 남은 것이 변호사 맷 머독이었다고 피터가 설명했다.
“맷은 자주 신문에 났잖아요. 아이들에게 모범도 될 거고요. 공립학교라 가정환경이 나쁜 애들이 많거든요. 알죠? 부모님은 집을 나가고…, 아이끼리 살고….”
“난 아버지랑 둘이서 살았어.”
“전 숙모랑 삼촌이랑 살았죠. 아무튼 엘리트 코스를 밟은 부르주아보다는 좋잖아요. 아, 나도 저런 변호사가 될 수 있구나! 하는 희망도 되고.”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피터가 말했다. 맷의 앞에 앉아서 우유를 마시는 피터 선생님은 진심으로 아이들을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히어로보다는 더 자신과 가까운 인물이 필요하다는 게 피터의 생각이었고, 맷은 그 자리에 딱 맞는 사람이었다. 헬스키친에서 자라온 매튜는 피터의 계급 농담에 작게 웃으며 남아 있는 맥주를 모두 들이켰다. 희망말이지. 뉴욕의 아이들에게 또 다른 삶을 제 손으로 이룰 수 있음을 알려주는 것은 확실히 보람 있고 좋은 일이 될 것 같다. 빈 잔을 테이블에 두고 의자에서 일어나며 재킷을 챙겨 든 맷은 시각장애인답지 않게 바른 걸음으로, 문으로 향했다. 갑자기 일어나 가게를 나서는 맷의 행동에 피터도 벌떡 일어나 급히 맷의 뒤를 따르려다가 계산을 하지 않았음을 깨닫고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어 지폐 몇 장을 테이블에 올려두고, 유리문을 열고 나갔다.
이미 홀로 걸어가고 있는 맷의 뒤를 가뿐히 쫓아서 옆에 선 피터는 자연스럽게 맷에게 가까이 붙어 걸었다. 두 사람의 어깨가 툭툭 가볍게 부딪힐 정도로 가까운 거리였다.
“그래서— 다음 주에 시간 돼요?”
맷의 어깨를 제 어깨로 슬쩍 밀치며 피터가 대답을 강요했다. 그 행동에서 약간의 초조함을 읽은 맷은 작게 웃으며 피터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가볍게 끌어당겼다.
“나한테 빚을 지는 거야, Webbie.”
‘’…저번에 같이 갱단 털어줬잖아요.“
“그 뒤에 네가 건물 부순 일로 소송당한 거, 누가 해결해 줬더라?”
“그건 그거고요! 아, 정말… 그래요! 빚으로 해요! 갚을게요.”
맷에게 바짝 붙어 걸으며 피터가 툴툴거렸다. 아무튼 강연을 해줄 모양이니까 대충 알겠다며 대답하는데 맷이 피터의 팔을 잡고 골목으로 쓱 들어갔다. 맷에게 이끌려 거리보다 더 어두운 골목으로 걸어가며 피터는 가로등 불빛에 비쳐서 더 반짝거리는 맷의 붉은 머리카락을 보았다. 슈퍼 히어로보다는 시민을 돕는 변호사가 좀 더 아이들에게 도움도 되고, 알고 지냈다는 게 알려져도 괜찮을 것 같았다. 거기에 맷은 피터가 아는 지인 중에서도 외모가 뛰어났다. 요즘 아이들이 얼마나 냉정하게 얼굴로 사람을 평가하곤 하는지 뒤에서 오가는 선생님 외모 평가 쪽지를 본 적이 있었던 피터는 강연자의 외모도 중요함을 알았다. 변호사 맷 머독이 마이크를 쥐면 불평하거나 싫어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 거기에 맷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을 알았다. 변호사라는 직업은 정말로 무시무시해서, 아까까지 스파이더맨을 무척이나 미워하던 배심원들도 맷의 마법 같은 변론에 취해 스파이더맨은 무죄라는 선고를 내려주기도 했다. 맷을 데려가면 어깨는 펼 수 있다. 행정실과의 지긋지긋한 신경전에서 승리하기 위해 피터는 맷에게 부탁 한두 가지 정도는 들어줄 각오를 했다.
“그래, 가줄게.”
골목 깊숙이 들어와 발을 멈춰 선 맷이 말했다.
“Matty—! 사랑해요!”
드디어 받아낸 승낙의 단어에 피터가 감격하며 맷을 와락 껴안고, 맷은 어정쩡하게 팔을 들고 있다가 이내 피터의 등에 손을 올리고 마주 안았다. 범죄율이 높은 지역에서는 어둡고 으슥한 골목은 피해 다니는 게 맞는 일인데, 두 사람은 그런 기본적인 상식은 늘 잊어버리곤 했다. 맷을 꽉 껴안고 고마워요, 사랑해요 따위의 말을 늘어놓던 피터는 제 턱을 붙잡는 손길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입술에 닿는 축축하고 부드러운 감촉. 아까까지 맷이 마시던 맥주의 향이 피터의 혀끝에 남고, 맷에게는 피터가 마셨던 우유의 맛이 남았다. 맥주랑 우유는 확실히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다. 서로의 숨을 맞바꾸며 붙어 있던 맷은 입술을 떼어내고 피터의 코끝에 제 입술을 슬며시 댔다. 코에서 느껴지는 촉촉한 감촉에 잠시 움찔하던 피터는 이내 자신에게 향해 있는 색안경 안쪽으로 비치는 맷의 눈을 발견하고 맷의 품에 더 파고들었다.
“학교에서는 어디까지 하는 거야?”
코끝에서 다시 뺨으로 입술을 옮기며 맷이 말했다. 귓가에 닿는 숨이 간지러워서 웃음을 터뜨리고 만 피터는 맷의 허리에 팔을 감은 채로 눈을 또르르 굴렸다.
“포옹? 그런데 학교에서 굳이 할 필요는 없잖아요.”
“모르잖아. 변호사 애인이 필요할 수도 있지.”
“음…, 좋아요. 그럼 필요하면 말할게요!”
피터가 유쾌하게 답했다. 변호사 애인이 있는 걸 굳이 학교에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필요할 수도 있겠다. 행정실의 직원 아주머니를 떠올리며 피터는 어떻게 해야 이 기나긴 신경전에서 승리할 수 있을지 머리를 굴려야만 했다. 혹시라도 화를 참지 못하고 주먹을 휘둘렀을 때, 소송을 막아줄 변호사 애인이 있다는 것을 알려서 나쁠 일은 없겠다 싶었다. 허리를 가볍게 감싸고 있는 맷의 손이 간지러워서 더욱 찰싹 붙어 있던 피터는 가볍게 울리는 두통과도 감각에 고개를 들었다. 맷의 얼굴을 보는데, 맷은 이미 무언가를 알아차린 듯 고개를 이리저리 돌리며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뭐로 갚아줄까요. 근처에서 벌어진 갱단들의 다툼에 끼어들기 위해 옷을 골목길에 벗어 거미줄로 대충 붙여두고, 함께 도시를 가로지르며 스파이더맨이 물었다. 혼잣말처럼 내뱉는 말도 명확하게 알아듣는 데어데블은 잠시 말없이 곁에서 와이어로 스윙을 하다가, 이내 몸을 슬쩍 돌려 스파이디를 보았다. 악마처럼 작은 뿔이 솟아난 마스크는 뉴욕의 야경과 합쳐져서 화려하고 무서워졌다. 스파이더맨 마스크를 턱끝까지 눌러쓴 피터는 저를 향한 맷의 의미심장한 웃음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며 웹슈터 버튼을 눌러 거미줄을 빌딩에 붙였다.
“엄청난 부탁이에요? 강도질 같은 거?”
총을 들고 있는 갱단의 정수리 위를 지나가며 스파이디가 물었으나 데어데블은 대답이 없었다. 벌써 악마 모드인가. 데어데블 일을 할 때는 자주 자신을 무시하곤 하는 맷을 알고 있는 피터는 거미줄을 발사해 갱단원들이 들고 있는 총을 압수했다. 뉴욕의 아름다운 밤에 총질이나 하고 보내는 건 너무 아깝지 않아? 사랑하는 사람과 즐겁게 수다나 떨고 야경이나 구경하란 말이야. 빼앗은 총을 다시 쓰지 못하게 거미줄로 붙여버리며 스파이더맨이 가볍게 몸을 날렸다. 빌리 클럽을 쥔 데어데블은 이미 제 손맛에 맞는 적을 발견해 주먹과 막대기를 휘두르고 있었다. 데어데블에게 총을 겨누는 범죄자들을 가볍게 들어 던져버리는데, 어느새 피터의 뒤편에 선 맷이 피터에게 날아오던 총알을 막아주었다. 빌리클럽에 맞아 튕겨 나간 총알은 아슬아슬하게 범죄자를 스쳐서 불 꺼진 가게의 유리창을 깨뜨렸다.
“…집에 가서 말해줄게.”
데어데블이라기에는 다정한 목소리가 피터의 귓가를 간질였다. 피터가 뒤를 돌아보니 맷은 다시 주먹을 휘두르며 총을 든 범죄자들 사이를 신나게 헤집고 있었다. 얼마나 커다란 부탁이길래. 스멀스멀 차오르는 불안감을 주먹과 거미줄에 담아 범죄자들을 던지고 묶어두며 피터는 제가 잘못된 계산을 했던 게 아닐까 뒤늦은 후회를 했다. 차라리 닥터 스트레인지에게 마법 강연이라도 해달라고 하는 게 나았을지도 모른다. 애인에게 부탁을 했다가 괜한 결과가 되는 것이 아닌지, 피터는 맷이 한 말의 의미를 추측하며 열심히 갱단들의 싸움을 말렸다. 다정하고 침착한 피터의 애인은 악마의 뿔을 달더니 총알 사이를 겁 없이 뛰어들며 범죄자의 턱에 발차기를 하고 막대기를 내리꽂고 있다. 맷이 이따금 부탁을 할 때 얼마나 악마처럼 변하는지 알고 있는 피터는 벌써부터 으슬으슬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썼다. 스파이더센스가 미리 경고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대로 얌전히 네 집으로 가. 맷의 집 말고. 도망을 먼저 생각하는 머리는 사랑과는 별개로 침착했으나, 피터의 마음과 자존심은 맷을 데리고 가야 네가 학교에서 등을 펼 수 있다고 말했다. 하룻밤 눈물로 보내고, 직장에서 인정받을 수 있다면 그것도 괜찮은 거래가 아닐까.
악마 같은 애인을 잠시 힐끗 보던 스파이더맨은 이내 다시 제게 달려드는 덩치 큰 범죄자를 제압하며 지금에 집중했다. 평범함과 조금 동떨어진 피터 선생님의 또 다른 취미는 오늘도 보람차고, 즐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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