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피터] 위장결혼 - 28 (完)
🕶x🕷/소설
2025. 10. 9. 20:41
얕은 잠에 빠져 있던 맷을 일으킨 것은 시끄러운 발소리였다. 바닥을 울렸다가, 다시 천장으로 닿고, 또다시 내려와 분주하게 거실과 방을 오가는 피터의 발걸음이 공사장 소음처럼 들렸다. 규칙도 없이 엉망진창으로 얽힌 소리로 예민해진 기분은 향긋한 커피의 향기에 다시 잔잔해졌다. 비어 있는 옆자리에는 약간 온기와 함께 라임 향기, 화학 용액 냄새 따위가 남아 있었고, 그중에는 새벽 동안 남긴 흔적이 있었다.
맷은 해야 할 일을 머릿속에 정리했다. 침구를 모두 정리하고, 새로운 걸 꺼내서 바꾸어두기. 결국 또다시 이런저런 냄새가 남을 테지만 그대로 둘 수는 없었다. 아예 매트리스까지 모두 바꿀 생각을 하기도 했던 맷은 아직 쓸만하다는 피터의 주장에 밀려서 그것까지는 행하지 못했다. 조금 더 쓰고 바꾸자. 거기서 피터의 고집에 어울려준 맷은 매트리스를 제외하고 세탁이 가능한 것들은 모두 세탁소에 맡기기로 했다. 슈트의 땀과 피 냄새는 세탁세제 한 스푼의 마법으로 해결되었지만, 침구에 남은 체향이나 밤의 향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가운을 챙겨 입고, 침실의 문을 열자, 커피 향이 더욱 진하게 풍겼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일찍 일어난 피터는 천장을 걸어 다니며 신문을 읽고 있었다. 거꾸로 선 탓에 커다란 티셔츠가 아래로 흘러내리고, 아슬아슬하게 어깨에 걸쳐져 있었다. 맷의 티셔츠를 잠옷으로 쓰고 있던 탓이었다. 티셔츠 안으로는 또 스판덱스 슈트를 입고 있다. 맷은 피터가 새벽에도 꿋꿋이 스파이더맨 슈트를 입고 있었던 것을 떠올리며, 저걸 다시 세탁기에 집어넣을 생각을 했다. 옷을 갈아입을 때 벗겨버리겠다는 계획이 몰래 세워졌다.
“맷, 좋은 아침이에요!”
피터가 천장에서 다시 바닥으로 내려왔다. 두 발이 가볍게 바닥에 내려오며 다시 울림이 생겼다. 만약 집의 벽이 얇고, 노후되어 있었다면 아래층에서 불만을 토로할지도 몰랐다. 다행히도 맷의 집은 밤새 이런저런 소음을 내도 모를 정도로 방음이 잘 되는 편이었고, 보통 사람은 초감각이 없었다. 피터가 새벽 내내 냈던 우는 소리는 맷만 들을 수 있었다. 벽이 조금이라도 얇았으면 피터가 싫어했겠지. 맷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전혀 모르는 피터는 신문을 두 손으로 쥐고 맷에게 타박타박 다가오고 있었다. 심장 소리나 얼굴 근육에 들어간 힘, 그리고 잔뜩 올라간 목소리 톤으로 맷은 피터가 신이 나 있다는 걸 알았다. 오늘은 신문 기사가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맷은 소파에 앉아 피터가 설명을 들으며 손가락으로는 신문의 글자를 더듬었다. 점자가 아닌 글을 읽을 때는 잉크를 감지해야 해서 조금 더 집중이 필요하긴 했지만 못할 일은 아니었다. 데어데블과 스파이더맨이 끝내 도시에 찌든 얼룩까지 닦아냈다는, 언제나와 다를 것 없는 지극히 평범한 기사다. 맷에게는 흔한 칭찬이었으나, 피터에게는 흔치 않은 호의적인 기사였다.
앞으로는 벤 유릭과 협조할 때 스파이더맨도 같이 끼워 넣는 게 좋겠다. 맷은 스파이더맨에게 우호적인 기사를 늘려줄 계획을 짰다. 피터는 벤 유릭의 기사에 잔뜩 기분이 좋아져서, 무릎 위에 앉아 유릭과 함께 FBI가 경찰을 털어내던 현장을 담았던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었다. 맷은 그 목소리를 들으며 탄 맛이 가득한 커피를 마셨다. 도대체 어떻게 하면 같은 원두로 이런 결과물을 내는 걸까, 의문이 들었으나 피터에게 지적하는 대신에 늘어난 티셔츠 사이로 드러난 목에 입술을 붙였다.
“피터—, 이 슈트 입은 채로 출근한 건 아니지?”
맷이 티셔츠 안쪽으로 손을 넣어 스판덱스 슈트를 더듬었다. 새벽에 흘린 땀이나 체액이 남은 코스튬을 입고, 이 위에 새 옷을 입는 건 정말 아닌 것 같다. 깨끗하게 씻은 몸에서는 향긋한 향기가 나는데, 슈트에서는 행위의 뜨겁고 질척함이 배어 있었다.
“…냄새나요?”
“응, 조금. 그리고 첫 출근이잖아, 갈아입어.”
맷의 지적에 눈을 굴리며 생각하던 피터는 결국 맷의 무릎에서 내려와 제 방으로 갔다. 옷장 안에 스파이더맨 코스튬 여분이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세탁한 기억이 없는 게 문제였다. 머뭇대며 옷장을 열어본 피터는 잘 개어져 제자리에 들어 있는, 게다가 조금 좋은 냄새도 나는 스파이더맨 코스튬을 발견하고 그것을 집어 들었다. 맷이 세탁해 둔 모양이다. 티셔츠를 벗고, 스판덱스 슈트까지 벗어 던지는 피터의 행동을 맷은 거실 소파에 앉아 초감각으로 감지했다. 피터는 물건을 제자리에 두는 법이 없다. 바닥에 툭툭 떨어지는 장갑을 잊지 않고 챙겨 들어 그것을 세탁 바구니에 넣을 때까지 맷은 피터를 감시했다.
이 모두가 이제는 몸에 익은 일상적인 아침 풍경이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는 피터도 아침에 출근한다는 거다. 집안에서는 천장을 마구 걸어 다니던 피터는 현관문을 나오고는 얌전히 맷의 옆에서 계단을 사용해 건물 밖으로 나섰다. 밖에서는 자경단원 이야기는 하지 않는 것이 규칙이어서, 오늘 첫 출근을 할 직장에 대해 떠들었고 맷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은 대답을 했다. 아파트 계단은 꽤 짧아서, 학교까지 버스를 타고 가야 한다고 이야기하던 사이에 모두 내려와 있었다. 아파트 건물을 나서기 전, 피터의 발이 멈춰 섰다. 자연스럽게 맷에게 돌아서서 고개를 올리는 피터의 행동이 자연스럽다. 맷은 시각장애인용 지팡이를 들지 않은 손으로 피터의 턱 부근에 가볍게 쓰다듬었다가,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고급스러운 재질의 감촉이 좋은 정장, 그 안에는 또 스파이더맨 슈트가 감춰져 있었다. 마스크를 쓰는 사람들은 너무 열성적이다. 마찬가지로 정장 안에 데어데블 코스튬을 입고 있는 맷이 작게 웃었다.
“새 옷은 잘 맞는 거 같네.”
“너무 잘 어울려서, 첫 수업부터 주목받으면 어쩌죠?”
“결혼했다고 이야기해야 하는 거지.”
변호사 남편이 있다고 말하는 거 잊지 말고. 맷이 셔츠 깃을 만지며 말했다. 장난기 가득한 맷의 말에 피터가 웃음을 터뜨리고, 맷은 진심이라며 피터의 턱을 붙잡았다. 크고 강하게 울리는 심박 소리, 강하고 탄성 있는 근육의 움직임, 빠르게 흐르는 혈류, 모든 것이 손에 잡힐 듯 명확하게 느껴졌다. 맷은 두근대는 심장 소리로 피터가 기대하는 것을 알았다.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진 아침 인사를 기다리는 피터는 여전히 제 심장의 울림만큼은 어찌하지 못했다. 엄지로 아랫입술을 살짝 눌렀다가, 뺨을 쓰다듬는다. 과일 향 같은 달콤하고 새콤한 향기, 우유와 시리얼이다. 맷이 깨어나기 전에 피터가 먹은 것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미소를 머금은 맷은 피터가 투덜거리기 전에, 익숙한 자리에 입술을 얹었다.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가 입술 사이로 파고든다. 밤에 하는 인사보다 부드럽고 가벼운 키스였다. 맷은 피터가 부드러운 키스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다.
“첫 출근 축하해, 피터.”
“고마워요, 매티!”
취직 축하 선물로 맷에게 새 정장을 받은 피터는 제 몸에 딱 맞는 옷에 기분이 좋았다. 새로운 직장에, 새로운 옷, 완벽한 하루가 될 것만 같다. 이런저런 질문의 바다에서 열심히 헤엄쳤지만, 실험실로는 돌아가지 못했다. 하나를 넘으면 또 하나의 고비가 나타나는 게 지독하게 무언가 맞지 않는 느낌이었다. 결국 한참을 고민하던 피터는 아주 오랜만에 교육 분야로 지원했다. 이것도 떨어지면 데일리 뷰글의 프리랜서 일에 집중할 작정이었다. 피터 머독이라는 이름도 익숙해졌고, 자기소개서도 새로 썼으며 맷에게 늘어놓으며 연습한 교육철학도 완벽하다. 피터는 오랜만에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은 할 수 있게 되었다. 선생님으로, 학교로 돌아가게 되는 것도 좋아. 피터는 직업을 가리지 않았다.
“나중에 봐요!”
피터가 인사를 하며 뛰쳐나가고, 맷은 피터가 있는 방향을 향해 작게 손을 흔들어주었다. 맷의 사무실은 대중교통이 필요 없는 거리에 있었기에 피터와는 집 앞에서 헤어져야만 했다. 시각장애인용 지팡이를 손에 쥔 맷은 멀어지는 피터의 발소리를 들으며 천천히 앞으로 걸었다. 어차피 또 저녁에 볼 테니까, 아쉽지는 않았다.
넬슨 앤 머독 사무실은 언제나 모두에게 열려 있다. 오늘도 해야 할 일들이 쌓여 있는 사무실에 도착한 맷은 자연스럽게 제 개인 사무실로 들어가 서류를 손에 쥐었다. 냉정한 뉴욕에서 도움이 필요한 이웃은 넘쳐났고, 맷과 포기는 돈이 되지 않는 일에 시간을 쏟았다. 거기에 가끔 돈이 되는 일이 생기면 거기서 큰 수입을 얻는 게, 넬슨 앤 머독 변호사들의 수법이었다. 집주인에게 보증금을 돌려받지 못한다거나, 작은 범죄행위로 과도한 형량을 받는 이야기는 이제 흔하디흔했다. 맷은 의뢰인을 위한 좋은 길을 찾아주기 위해 애쓰는 변호사였다.
“오늘도 기분이 좋아 보인다, 맷?”
문 앞에 선 포기가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너 요즘 진짜 기분이 좋아 보여서 무서울 지경이야. 맷이 우울해도 걱정, 너무 들떠도 걱정인 포기는 제 친구의 표정이 밝은 것이 신경 쓰였다. 맷은 너무 기분이 좋아 보였다.
“피터가 첫 출근하는 날이라서.”
“스파이더맨의 사진사가 아니었어?”
“과학 선생님이야. 피터는 그쪽으로 학위가 있거든.”
자연스럽게 반박하는 맷의 태도에 포기가 팔짱을 꼈다. 휴먼 토치와 뒹굴던—사실 그 정도는 아니었다— 피터를 발견했을 때는 맷이 상처를 크게 받고, 스파이더맨의 비즈니스 파트너와 헤어지리라 생각했었다. 피터는 어리고, 아직 불타오를 나이였으니 말이다. 그 뒤로 한동안 맷의 얼굴에 우울이 쏟아져 있어서 결국 헤어졌구나 추측했던 것도 잠시, 맷의 얼굴에 다시 꽃이 피었다. 클라이언트를 대할 때도 더 미소와 친절로 응대하는 매튜를 발견한 포기는 여전히 제 친구를 힐끗힐끗 쳐다보며 저 연애가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지 걱정했다. 맷이 바람을 피우던, 피터가 바람을 피우던, 그도 아니면 맷의 데어데블 활동이 그사이에 커다란 금을 가게 하던 끝이 안 좋을 것만 같아서였다. 맷 머독의 연애는 늘 그런 식이었으니 말이다.
“저녁에는 같이 레스토랑에 가기로 했어.”'
맷의 입가에 행복이 스며 있었다. 일단은 괜찮겠지. 맷 머독을 걱정하는 것이 하나의 업무가 되어버려, 몸에 익어버린 포기는 아직은 행복한 제 친구의 모습에 일단 두고 보자며 가벼이 웃었다. 혹여 무언가 큰일이 나면 맷보다는 어린 피터의 편을 들 수밖에 없다. 포기의 칼 같은 우정을 모르는 맷은 노트북으로 사건 사례를 검색하고 있었다. 야근하지 않아야 약속을 지킬 수 있다. 맷은 피터와의 약속에 늦지 않기 위해, 그리고 피터보다 일찍 도착해서 자연스럽게 놀리기 위해서 열심히 애쓰고 있었다.
머독 선생님. 피터는 저를 부르는 호칭에 다시 익숙해지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자기소개를 할 때도 칠판에 이름은 ‘피터 머독’을 써두고는, 파커 선생님이라고 불러도 좋다는 말이 자연스럽게 튀어나왔다. 말하고도 깨닫지 못하고 수업을 진행하려고 했는데, 첫 수업부터 제 이름을 틀린 선생님을 놀리기 좋아하는 아이들이 먼저 지적을 해왔다. 머독 선생님, 이름 틀리셨어요. 아이들의 웃음이 교실에 넘쳐나고 피터는 그제야 이마를 짚으며 작게 탄식했다. 결혼을 하면 성이 바뀌기도 한다는 사실에 익숙지 않은 아이는 이름을 틀린 새 선생님의 등장에 즐거워했고, 성이 바뀐다는 걸 아는 아이는 신혼이라 이름을 틀리셨나보다 하며 결혼 이야기를 해달라며 외쳤다. 엉망이 된 첫 과학 수업은 결국 중력에 관한 이야기도 꺼내지 못하고 끝이 났고, 수업이 끝나고 복도를 걷던 피터는 눈이 마주치는 선생님들께 흐뭇한 미소를 받아야 했다.
머독 선생님, 신혼이라면서요?
이런 이야기는 이미 익숙한 줄 알았는데, 다시 또 시작되었다. 피터는 저를 초짜로 보는 시선 앞에서 저번보다는 자연스럽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신혼은 맞지만, 신혼이 아니다. 이 애매한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참으로 어려워서 피터는 얼렁뚱땅 넘어가는 쪽을 택했다. 다행인 점은 첫 수업이라 하교 시간이 빨랐다는 거다. 오전 수업만 하고 아이들은 학교를 나섰고, 선생님들도 새 학기 첫 수업은 할 게 없다며 하나둘씩 자리에서 일어섰다. 결국 내일 할 과학 수업을 정리하던 피터도 눈치를 보다가 슬쩍 일어나 도보를 걸어 버스를 탔다. 눈이 마주치는 학생들이 몇몇 있었는데, 피터와 눈이 마주치니 서로 속닥거리며 이야기를 나누고 웃음을 터뜨렸다. 맷이라면 아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알았겠지. 예민한 청력은 없고, 그저 위험만 분별해 주는 스파이더센스만을 가진 피터는 그저 제 험담은 아니길 빌며 학교를 벗어났다. 젊은 선생님이 흔치 않은 공립학교에서 갓 부임한, 거기에 신혼인 선생님이 흔치 않아 나오는 반응이라는 걸 피터는 뒤늦게야 알았다.
맷의 퇴근까지는 아직 시간이 남았다. 변호사 사무실 근처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해 도착한 피터는 남은 시간을 어디서 보내야 할까, 고민하며 거리를 걸었다. 이런 조용하고 평화로운 때에는 꼭 스파이더센스가 조용했다. 아침에 잊지 않고 거미줄 용액을 만들어두어서 웹슈터 카트리지도 충분하고, 시간도 넉넉했으나 피터의 운수는 이런 때에 협조적이지 않았다. 맷이 사준 옷을 골목에 벗어두는 것보다는 나은가. 스파이더맨 슈트로 갈아입지 않고 거리를 걸어서 구경하며 피터가 생각했다. 낡은 상자에 담아두었던 짐은 이제 모두 집으로 옮겼다. 상자에 늘 넣어두던 옷들도 옷장을 사서 걸어두었고, 비커 같은 과학 용품은 책상에 올려두고, 상자는 버렸다. 이제 더 버릴 것이 없어지니 살 것이 많아졌다. 이런저런 가구를 사느라 맷과 중고 가구시장에도 갔다가, 결국 택하지 못해서 어떤 것은 새것을 구매했다. 거기서도 맷이 지갑을 내밀었다. 이대로 괜찮은 걸까. 잠깐 고민이 들었으나 팔짱을 끼고 자연스럽게 걸으며 커피를 사라는 맷의 말에 피터는 그 생각도 날려버리고 웃을 수 있었다. 맛있는 커피숍을 알아요.
조용하고 사람이 많은 거리를 걷던 피터는 익숙한 가게 앞에 멈춰 섰다. 예전에 강도를 잡았던 보석상이었다. 유리창 안으로는 액세서리가 반짝이며 진열되어 손님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평소라면 그 앞을 지나쳤을 것이다. 하지만 피터는 시간이 넘쳐났고, 제 손에 끼워진 반지가 눈에 보여서 충동적으로 가게 안에 들어갔다. 피터가 들어가자, 점원이 자연스러운 미소를 띠며 인사를 했다. 강도들이 자루 안에 마구잡이로 넣었던 보석은 이제 다시 유리 진열장 안에 깔끔하게 정리되어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색깔도 다양하고, 아름답게 빛나는 보석은 확실히 사람의 마음을 끌기 좋아 보였다.
“찾으시는 게 있으신가요?”
“아…, 혹시 이런 거 있어요?”
망설이던 피터가 제 왼손을 들어 보였다. 그냥 일단 가격만 보자. 다이아몬드가 박힌 반지를 직원에게 보여주며 피터는 우선은 침착하게 생각했다. 피터의 반지를 본 직원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했다가, 이내 같은 디자인의 반지를 찾아주었다. 여기서 판매한 반지라는 설명이 덧붙여졌다. 반짝이는 작은 보석에 붙은 가격은 생각 이상으로 높다. 블랙캣이 훔치는 보석을 되찾아 돌려준 적은 있어도 직접 구입한 적이 없던 피터는 그 가격 앞에서 잠시 굳었다가, 맷의 반지 사이즈를 모른다는 사실에 또 멈춰 섰다. 맷과 부부인데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사이즈를 모르면 안 되겠죠?”
피터가 제 반지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게, 자신감이 기어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맷은 어떻게 다 알고 샀던 것인지 대단할 지경이다. 손님의 망설임을 읽은 친절한 직원은 얼굴에 미소를 머금고 디자인이 같은 반지 중에서 피터가 낀 것보다 사이즈가 조금 더 큰 반지를 골라 앞으로 내밀었다.
“실례지만 혹시, 상대분이 선글라스를 쓰시나요?”
조심스러운 물음에 피터가 고개를 들었다. 맹인은 기억에 남기 쉽다. 파트너에게 줄 반지를 손끝으로 더듬어 만져보던 시각장애인을 기억하는 직원은 혹시 그분이라면 이 사이즈일 거라며 먼저 추천을 해주었다. 사실 너무 잘생겨서 기억된 게 아닐까. 가격 앞에서 망설이고 있던 피터는 직원이 맷을 기억하는 이유가 신체적 장애뿐만이 아니리라 추측했다. 맷은 붉은 머리에 푸른 눈을 가지고 있는 데다가, 눈에 띄는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그 덕분에 직원에게 맷의 파트너인 것이 까발려진 피터는 쑥스러움에 얼굴을 붉히다가 결국 충동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조나가 준 결혼 축하금에, 맷이 받아준 메이 숙모의 병원비 일부가 반지 구매에 쓰이고 말았다. 맷과 헤어지면 빈털터리나 다름없어진다.
피터는 반지를 쥐고 나와 귀금속 가게 앞에서 작게 후회했다가, 아침에 보았던 맷이 생각이 나서 무작정 거리를 뛰듯이 걸었다.
피터의 계획은 언제나 무너져버린다. 언제나 뒤통수를 후려치는 피터의 운수는 스파이더센스로 돌아왔다. 맷의 사무실 근처인데, 스파이더센스가 울리는 바람에 골목에서 급히 옷을 갈아입은 피터는 거미줄로 사람들이 가져가지 못하도록 가방과 새 옷을 감아두었다. 스파이더맨이 필요한 곳이 많다. 스파이더센스가 울리고, 울리는 것을 따라가다 보니 약속 시간이었다. 분명 일찍 왔는데, 또 지각이다. 다급하게 옷을 찾으러 간 피터는 다행히 제자리에 있는 짐과 옷가지를 들고 웹스윙을 했다. 거미줄을 쓰면 맷의 사무실까지는 금방이었다.
먼저 옥상에 나와 있을 줄 알았던 맷이 없다. 피터는 잠시 맷의 사무실 옥상에 있다가, 기다릴지 고민하다가, 거미줄에 감겨 엉망이 된 새 옷과 가방을 꼭 껴안고 벽을 걸었다. 맷의 사무실에는 창문이 있었고, 피터는 그 창문의 위치를 알았다. 사람들에게 발견되지 않도록 슬쩍 들어가야지. 피터가 벽을 타고 내려가는데, 창문이 저절로 열렸다. 피터가 창틀에 발을 얹기도 전에 창문을 열어준 맷은 셔츠 차림이었다. 아직 일이 안 끝났구나. 스파이더맨 슈트 차림인 피터가 창틀에서 머뭇거렸다.
“안 들어와?”
맷이 먼저 창가에서 비켜주었다. 맷의 책상 위에는 종이 더미가 엉망으로 쌓여 있었다.
“바빠요? 집에서 기다릴까요?”
“아냐, 금방 끝나. 조금만 앉아 기다려.”
창틀에 얹어진 피터의 손을 맷이 다급히 붙잡았다.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겼다며 설명하는 맷의 목소리는 나긋하고 다정했다. 결국 피터는 거미줄 뭉치를 안고, 맷의 개인 사무실로 들어갔다. 소파에 얌전히 앉아서 얼른 할 일을 끝내기 위해 애쓰는 맷을 물끄러미 보다가 마스크를 위로 올리고, 새 옷에 얽힌 거미줄을 조금씩 뜯어냈다. 시간이 흘러서 녹아가는 거미줄은 피터가 애쓰지 않아도 쉽게 떨어졌지만 이미 구겨진 옷이 본래의 상태로 돌아가지는 못했다. 레스토랑에 가기로 했는데, 구겨진 정장 차림으로 가도 되는 걸까. 얼룩덜룩하게 묻은 거미줄에 구김이 진 정장을 보며 피터가 한숨을 쉬었다. 무엇하나 계획대로 되는 게 없었다.
“첫 출근은 어땠어?”
손가락을 종이 위에 얹고 있던 맷이 슬며시 물었다. 구겨진 옷을 테이블에 펼쳐놓고 한숨을 푹 쉬던 피터는 그 물음에 고개를 들었다. 맷은 서류를 살피고 있었다.
“이름을 잘못 말해서 놀림감이 됐어요. 맷, 나 ‘머독 선생님’이었대요!”
피터의 말에 맷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래, 그렇게 되겠네….”
둘 다 머독이니 이제 헷갈리지 않게 조심해야겠다는 맷의 말이 재밌었다. 구겨진 새 정장에 우울했던 피터는 장난이 가득하고, 평화로운 대화에 그 마음을 다시 떨쳐낼 수 있었다. 다시 다림질하면 되는 일이니까. 피터가 재킷을 펄럭이며 털어보려는데, 맷이 휴대용 스팀다리미가 있다며 피터에게 일러주었다. 카운터 쪽에 있으니까 찾아보라며, 포기가 아직 퇴근하지 않았으니까 가져올 때 조심하라는 말이 덧붙여졌다.
피터는 혹시 몰라 천장에 바짝 붙어 밖으로 나섰다. 포기도 제 개인 사무실에 있는지 조용했다. 피터는 거미줄로 다리미를 낚아채고, 다시 맷의 방으로 돌아왔다. 피터가 구김이 진 재킷을 옷걸이에 걸어놓고 펴는 동안에도 맷은 일을 하고 있었다. 피터는 스파이더맨 슈트 차림이지만 마스크를 벗고 있었고, 맷은 변호사 차림이었다. 이 상황이 참 이상하다. 소파에 던져둔 스파이더맨 마스크가 눈에 담았다가, 다시 손에 쥔 새 정장을 보았다. 맷이 골라준 정장은 피터가 평소 입던 것보다 고급스러운 느낌이었다. 맷이 평소 입던 스타일과 비슷하지만, 피터에게 딱 맞는 치수여서 거울을 볼 때도 꽤 마음에 들었다. 전문성이 있어 보인다고 해야 할까. 다리미의 마법으로 구겨졌던 재킷과 셔츠가 꽤 보기 좋게 펴졌다. 피터는 그것을 소파에 올려두려다가, 재킷 안쪽에 넣어둔 오늘의 계획을 떠올렸다. 충동적으로 사긴 했지만, 맷에게 주고 싶었다.
맷이 계속 있어도 된다고 한지도 시간이 꽤 지났지만, 피터는 여전히 메이에게 맷을 소개하지도 못했다. 부부는 맞았지만, 여전히 무언가 부족한 느낌이다. 이제 그 모자람을 채울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기, 맷….”
“응?”
피터가 작은 상자를 손에 들고 맷의 책상 앞에 섰다. 종이 위의 글자를 훑는 맷의 손에 피터의 시선이 닿았다. 곧은 손가락이 보기보다 거칠다는 것을 피터는 알았다. 변호사인 맷은 데어데블이기도 했다. 피터가 뷰글의 기자이자, 선생님이자, 스파이더맨인 것처럼. 피터는 입술을 꾹 깨물었다.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다. 겁 없이 빌딩에서도 떨어지고, 불타는 공장에도 뛰어들 수 있는 피터는 어쩐지 지금이 더 떨리고 두려웠다.
하지만 더 미룰 수는 없어. 계속 미뤄왔잖아.
삶이 엉망인 피터는 용기를 내는 게 무엇보다 어려웠다. 누군가랑 삶을 나누고, 책임지고 그런 사소한 것들이 가장 두렵다. 피터의 심장이 쿵쾅대며 울리고, 긴장한 탓에 근육이 뻣뻣해지는 게 느껴졌다. 맷은 피터가 쥔 작은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게 무엇인지 알아차렸다. 맷의 시선이 피터에게 닿았다. 맷은 앞을 보지 못한다. 그 사실을 알면서도 피터는 맷의 눈을 마주 봤다.
피터답지 않게 조용할 때 어쩐지 두려워진다. 피터의 입에서 튀어나올 말은 레이더센스로도 알 수 없는 것이어서, 맷은 피터의 말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나랑 결혼해 줄래요?”
피터의 목소리가 떨렸다. 책상에 앉은 채로 피터에게 고백받은 맷은 잠시 당황했다. 결혼한 지 벌써 한참이 지났는데, 프러포즈를 해오는 피터를 지적하고 싶었으나 피터가 너무나 진지했다. 심장의 울림도, 근육의 움직임도 모든 게 명확하고 분명하게 울렸다. 사무실 바깥의 소음까지도 모두 들을 수 있는 맷은 일반인과 다른 피터의 신체 신호가 재밌어서, 그리고 피터가 내민 손이 떨린다는 걸 알아서 결국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맷이 의자에서 일어나고, 스파이더맨 코스튬 차림인 탓에 장갑을 낀 피터의 손이 매튜의 손을 꽉 붙잡았다. 반지를 끼워주는 손길이 서툴고 긴장이 넘쳤다. 피터가 이런 걸 가늠할 줄 알았던가. 떨리는 손길에 비해 반지는 맷의 약지에 딱 맞게 들어갔다.
맷은 제 손가락에 딱 맞는 사이즈에 놀랐다가, 다가오는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피터를 껴안았다. 뒤통수를 감싸안고, 두 팔로 얼굴을 가려주려고 감싸안았다.
“맷, 이 사건 케이스는…,”
맷의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온 포기는 제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말을 잃었다가, 맷의 손가락에서 반짝이는 것을 발견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 소리에 깜짝 놀란 피터가 맷의 품에서 고개를 들어버리며, 작은 사무실은 더욱 시끄러워졌다.
포기의 목소리에, 당황해서 맷의 뒤로 숨는 피터, 방금까지 긴장되고 떨리던 분위기는 모두 무너지고 어수선함이 남아 있었다. 그 감각들이 재밌어서 맷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맷 머독의 인생에서 다시는 들을 일 없을 듯한 엉망인 프러포즈였다.
+
피터의 삶은 언제나처럼 같았으나, 작은 변화가 몇 방울 떨어져 조금씩 퍼졌다. 여전히 피터는 맷과 슈퍼에서 작은 언쟁을 했다. 대체로 그것은 시리얼을 더 사야 한다거나, 우유를 더 사야 한다는 다툼이었는데 대체로 맷의 승리로 끝났다. 그럼에도 피터는 여전히 저렴한 것들이 좋았다. 싸고, 저렴한 것들로 꾸려가는 삶도 그것만의 가치가 있는 법이다.
피터는 여전히 맷이 지키지 않는 곳에서, 조니와 만나 햄버거를 먹고 망한 영화를 보기도 하며 자유시간을 보내곤 했다. 캐러멜팝콘을 한 통 가득 먹으면서 재미없는 영화를 보며 조니와 작은 말다툼을 할 때도 있었다. 그 다툼에는 당연히 결혼 문제도 얹어졌다. 데어데블과 위장결혼을 했다더니, 진짜 결혼을 해버린다는 말에 서운해하는 조니에게 피터는 다시 지키지 못할 약속을 했다. 결혼식에서 슈퍼히어로는 휴먼토치만 초대하겠다는 약속이었다. 그것은 나중에 맷과 하객을 정리하며 무너지고 말았으나, 당시에는 꽤 진심이었다.
피터는 여전히 삶을 엉망으로 망치는 버릇이 있었고, 곤란하면 도망을 쳤다. 저렴하고 편리한 것을 택하는 것도 변치 않았다. 조금 달라진 점이 있다면 그 선택지에 맷의 생각이 얹어진다는 거였다. 피터는 여전히 빠르고 간편한 걸 좋아했고, 시리얼을 아침으로 하는 게 좋았다. 하지만 침대는 낡은 것보다, 푹신하고 보드라운 게 더 낫다는 걸 알았다. 비록 그곳을 엉망으로 만들지라도 말이다. 그곳에 떠나지 않을 사람이 있다면 더 완벽하다. 함께 치워줄 사람이 있으면 무엇이든 덜 두려운 법이다. 맷 머독은 피터가 필요할 땐 늘 곁에 있었다. 그러면 충분하다.
피터 벤자민 머독은 엉망인 자신의 인생을 조금은 좋아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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