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피터] 위장결혼 - 25
🕶x🕷/소설
2025. 10. 5. 20:41
메이 숙모의 집은 퀸즈의 조용한 주택가에 있었다. 피터가 어린 시절을 보낸 메이와 벤의 집은 조금 낡고, 오래되긴 했으나 여전히 견고했다. 메이와 안나의 성화에 피터는 오랜만에 작은 침대에서 구겨져 잠을 잤었다. 피터가 어린 시절을 보내온 방에는 싱글침대보다도 작은 침대가 하나 놓여 있었는데, 그것은 피터가 지내던 월세방의 낡은 침대보다도 더 작았다. 하지만 관리가 잘 되었던 탓에 삐걱대는 소리가 난다던가 매트리스가 상해서 허리가 아프다든가 하지는 않았고, 그냥 몸을 적당히 웅크리면 잘만 한 정도였다.
고등학생 때까지 메이와 함께 살았던 피터는 엠파이어 스테이트 대학에 들어가게 되면서 독립을 했었다. 메이의 서운함도 알았으나 당시의 피터에게는 약간이라도 자유 시간이 필요했다. 그만큼 메이에게 더 연락을 자주 하고, 자주 집에 들러 뺨에 키스를 해드리며 그 거리감을 잘 이어 붙이는 것으로 피터는 메이의 외로움을 달래주곤 했었다. 이제 다시 들어와야만 하겠지. 피터는 병원비 정산을 위해서 오랜만에 계산기를 두들겨보고, 냉정하게 생각해 보기로 했다. 보증금을 대부분 털어 넣어야 할 테고, 남은 돈으로는 괜찮은 집을 구하기 어려울 것이다. 메이의 집에서 번화가까지 오가는 것이 조금 어렵기는 하겠지만, 예전에는 잘만 하던 일이었다. 잠깐 일을 늘리거나 스파이더맨 사진을 더 많이 찍어서 팔다 보면 금방 단칸방 하나는 빌릴 수 있게 되거나, 룸메이트와 함께한다면 거실 하나도 추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결국 시간이 해결해 줄 문제였다.
메이의 퇴원은 점심쯤으로 정해져 있었다. 메이를 위해서 안나가 병원에 있어 주기로 했고, 피터는 그동안 집에 내려앉은 먼지를 털기로 했다. 메이가 있을 때는 소파를 들거나 침대를 들어 올리는 게 불가능했지만, 메이가 입원한 지금은 피터가 집안에서 소파를 번쩍 들어 올려 청소기를 밀고 있어도 놀랄 사람이 없었다. 예전 같으면 이 정도로 청소하지 않았겠지만…. 까탈스럽게 소파 아래까지 청소하는 맷에게 배운 점이었다. 맷은 청소를 정말 꼼꼼하게, 과하게 하는 편이었는데 덕분에 피터는 그 옆에서 멀뚱히 서 있는 일이 많았다. 뭐가 되었든 메이 숙모도 깨끗한 걸 좋아하시겠지. 그 생각으로 절로 미소가 돌았다. 청소기를 손에 쥔 피터는 소파를 한 손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청소가 끝나면 뷰글에도 가야…, 어?”
혼잣말하며 청소하던 피터는 제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에 청소기를 끄고, 휴대전화를 꺼냈다. 액정 속 화면에는 ‘맷’이라는 이름이 떠 있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다. 피터는 맷이 곧 출근할 시간이라는 걸 알았다. 같이 살 때였다면 맷보다 먼저 일어나서 커피를 내려두거나, 맷이 먼저 일어나면 아침 식사를 준비해 주었을 거다. 맷의 집을 나온 지 2주가 넘어가는 시점에서는 그것이 일상인지, 지금이 일상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었지만 말이다.
“맷—, 출근할 때 아니에요?”
피터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변호사님은 바쁘잖아요. 피터는 전원이 꺼진 청소기를 만지작거렸다. 맷은 바쁘고, 피터는 한가했다. 같이 있었다면 잘 다녀오라며 사랑에 빠진 아내처럼 뽀뽀라도 해줬을 테지만, 지금은 맷과 '함께'가 아니었다. 통화로 아침 인사라도 하고 싶은 걸까. 피터는 맷의 대답을 기다리며 바닥을 툭툭 발로 찼다.
[“오늘 순찰은 몇 시에 할 거야?”]
“어…. 뷰글에도 들렸다가, 메이 숙모 퇴원하시고, 이것저것 끝나면… 돌아봐야죠.”
중간에 일이 터지면 또 알 수 없지만요. 맷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메이의 퇴원 날에도 스파이더맨을 한다는 게 재밌다는 것인지, 그도 아니면 그냥 목소리가 재밌다는 것인지 피터는 맷의 웃음 포인트를 알 수 없었다.
몸에 총알이 박혔던 날, 피터는 다시 맷의 집에 신세를 졌었다. 그것도 벌써 일주일 전이다. 피터에게 총을 쏜 경찰관은 다행히 라이노를 잘 체포를 해주었고, 뉴욕의 교통을 마비시킨 바보 같은 코뿔소는 재판으로 넘겨졌다는 소식을 피터는 맷의 품 안에서 들을 수 있었다. 맷은 눈을 뜨자마자 벌떡 일어나 나서려는 피터를 두 팔로 껴안는 것으로 막아 세우고, 담담하게 상황을 알려주었다. 정리하자면 결국 ‘네가 갈 필요가 없다’라는 말이었다. 총알구멍은 반쯤 아물었고, 그렇기에 피터는 여전히 스파이더맨 활동을 해야 했으며 병원에 들러 메이 숙모에게 인사도 건네야만 했다. 맷에게 안긴 채로 투덜대며 가야 한다고, 난 이제 다 나았다며 변명하던 피터는 여전히 맷의 두 팔에 가둬진 채로 잔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초짜 히어로들에게나 해주는 무료 강의 수준인 간단한 이야기였다.
첫째, 잠은 충분히 자고 다닐 것.
둘째, 경찰이 총을 겨누면 침착하게 피할 것.
셋째, 진통제는 적당히 먹을 것.
뻔한 이야기였으나 그중에 지킨 것이 없던 피터는 맷과의 말싸움에서 처음부터 진 상태였다. 평소라면 지지 않고, 그럼에도 멀쩡하다고 소리치며 벌떡 일어났겠지만, 맷과 달리 앞을 볼 수 있던 피터는 제가 일으킨 문제들을 두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하얀 시트와 이불도 붉었고, 피터가 쪼그려 앉아 있던 부엌도 바닥에 붉은 칠이 가득했다. 그것이 피였고, 결국 그만큼 제가 피를 흘린 상태였음을 피터는 그제야 알 수 있었다. 스파이더맨 슈트를 붉은색으로 한 이유가 있다. 피에 물들어도 붉어서 세탁할 때 고생이 줄어들었다. 시트와 이불에 찌든 피 얼룩은 그럴 수 없으니 문제였다. 이걸 모두 들고 세탁소에 다녀오면 맷이 조금은 화가 풀리려나 생각도 해봤는데, 입을 떼는 순간 더 잔소리를 들을 것 같았다. 맷은 피터의 등짝에 난 총알구멍을 피해서 피터의 허리나 어깨를 부드럽게 쓸어주었고, 피터는 한동안 그 쓰다듬을 받으며 맷에게 안겨 있었다. 한참 뒤에야 피터를 놓아준 맷은 어차피 이불과 시트는 바꿀 생각이었다고 차분히 말했다. 핏자국은 세탁기에 한참 돌리면 옅어질 텐데. 피터가 당장 그것들을 가지고 나가서 빨고 오겠다고 말했지만, 맷은 어깨를 가볍게 으쓱였다.
피터, 여기서 네 체액 냄새가 나.
혈액도 체액이라면 체액이다. 피터는 맷이 피 냄새를 견디지 못한다는 말로 대충 이해했다. 아무튼 그렇게 또 같이 밥을 먹고, 메이 숙모의 안부에 관해 이야기하다가, 키스를 하고, 맷은 출근을 했다. 피터는 슈트를 주워 입으려다가 세탁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포기한 뒤에 맷의 셔츠를 빌려 입고 현관으로 나섰다. 이웃들이 언제 피터에게 돌아왔냐며 인사를 건넸는데, 피터는 거기에 그저 어색하게 웃으며 답했다. 이웃들은 피터가 집에 오지 않던 것을 별거로 오해했던 모양이었다. 여전히 피터 머독이며, 맷과 부부사이인 피터는 ‘매티는 좋은 사람이에요.’ 하며 굳이 필요 없는 변명을 했다.
맷은 좋은 사람이었고, 단단한 사람이었다. 오랜만에 병원에 앉아 시간을 보내면서 피터는 제가 입원하는 동안 같이 병원 생활을 해준 맷이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맷은 피터보다도 더 예민하고, 불편한 것을 참지 못한다. 그럼에도 같이 병원에서 지낸 준 거였다. 매튜는 좋은 사람이다. 피터가 고집을 부린다고 위장결혼까지 해줄 정도로, 데어데블은 까칠한 겉모습과 달리 따뜻한 마음을 지니고 있었다. 옥상에서 자는 대신에, 맷에게 찾아갔던 것은 사실 맷이 보고 싶어서였을까. 흘린 혈액의 양으로 보아서는 당시의 자신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하철을 타고 왔던 거리를 거미줄도 없이, 두 발로 뛰어갔을 수가 없다. 피터는 제 마음을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정말로 어려운 문제다. 돈 계산보다도 복잡하고, 머리 아픈 문제. 피터는 그런 고민을 하는 대신에 스파이더맨 일을 더 하는 것을 택하곤 했다. 그러다 보면 미뤄둔 고민은 몇 배로 커져서 피터에게 굴러와서 되묻는다.
피터, 넌 누굴 정말 좋아해 본 적이 있니?
스파이더맨이 네 애인이야?
거기에 명확하게 대답하지 못하는 피터는 그냥 배시시 어색하게 웃어 보이며, 상황을 무마하려고 노력했었다. 상대는 이미 웃음으로도 넘어갈 수 없을 정도로 화가 난 뒤였다. 거짓말에 거짓말이 더해지고, 결국 피터는 그냥 남겨지곤 했다. 실망해서 떠나가거나, 스파이더맨 때문에 위험을 느끼고 떠나가거나 아무튼 그 자리엔 스파이더맨만 남아 있었다. 또 망쳤구나. 그렇게 잠깐 혼자 이길 택해보다가 다시 또 온기가 그리워서, 다가오는 사람에게 스파이더맨을 숨긴 채로 미소를 지었다. 그냥 피터의 삶 자체가 늘상 그런 식이었다. 그냥 흐르는 대로, 누군가가 다가오면 그냥 그런대로, 떠나면 떠나는 대로 그렇게 흘려보냈다. 그냥 혼자가 싫었다. 스파이더맨이라는 지독하게 위태로운 거미줄에 서 있다가도, 잠깐이라도 온전한 자신으로 돌아가 편안하게 잠들고 싶었다. 그런 소망은 결국 누군가의 삶에 스파이더맨이라는 얼룩을 남기는 것으로 끝이 난다. 결과가 나빴다.
[“같이 저녁 먹을까?”]
맷이 먼저 약속을 건넸다. 당장이라도 Yes를 외치고 싶었으나, 피터의 소망과는 달리 머릿속은 순찰을 먼저 1순위로 꼽고 있었다. 자격의 문제다. 쉴 자격이 있는가. 피터는 그 말 앞에서는 언제나 명확한 답을 내놓을 수 있었다. 없다. 피터는 스파이더맨을 쉬지 못했다.
“…돌아볼 곳이 많아요.”
[“같이 해. 피터, 네가 필요해서 그래.”]
맷은 자경단원 일을 이야기할 때도 담담한 어조였다. 누가 들으면 그냥 오늘 저녁은 샌드위치로 하자는 평범한 대화로 들을 것이다. 피터는 필요하다는 말에 약했다. 특히나 맷이, 데어데블이 부탁하면 그걸 거절하는 것은 더더욱 못했다. 데어데블은 오래된 친구였고, 그가 하는 일은 언제나 옳은 일이다. 피터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저녁 약속에 더해서 자경단 활동까지, 완벽한 저녁이다. 여전히 서류상 부부이고, 피터의 성은 머독이었다. 하지만 맷과 피터의 관계는 알 수 없는 무언가로 남겨져 있는 채였다. 잠깐의 망설임은 곧 사라지고, 피터의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어차피 스파이더맨도 밥은 먹고 살아야 한다. 메이 숙모가 퇴원하는 걸 지켜보고, 순찰을 돌다가 맷을 만나면 시간이 될 것 같긴 했다.
“좋아요!”
맷에게 보이지도 않는데도 피터가 고개를 힘차게 끄덕이며 답했다.
데일리 뷰글에 사진 팔기. 좀도둑을 잡는 스파이더맨에, 라이노에게 얻어터지는 스파이더맨까지 최근 피터가 조나에게 넘긴 스파이더맨 사진이 여럿 있었다. 그렇게 팔고도 여전히 팔아야 할 사진이 수십 장이다. 메이의 병원비를 떠올리며 피터는 몇 장을 더 팔아야 할지 대충 손가락으로 세어보았다. 다행인 것은 사진은 많다는 거였다. 죄책감에 눌려 하루 종일 스파이더맨을 하던 덕분에 피터는 제 사진을 찍을 시간도 늘었다. 비록 조나가 좋아할 만한 슈퍼빌런에게 엉덩이를 얻어터지는 스파이더맨은 없었으나, 쓰레기통에 처박힌다거나 구석에서 우울한 스파이더맨은 여럿 있었다.
데일리 뷰글에 도착하고, 조나가 있는 층까지 가는 동안 피터는 저를 알아보는 사람과 알지 못하는 사람 여럿을 만났다. 알아보는 사람들은 뷰글에 뼈를 묻은 기자들이었고, 알지 못하는 사람은 금방 들어와 데일리 뷰글의 흘러가는 모양새를 여전히 모르는 초짜들이었다. 피터를 알아본 기자는 피터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어 보였는데, 아무리 보아도 그것이 ‘스파이더맨 사진을 잘 찍는 비결’이 아니라 결혼 생활에 관한 것 같아서 피터는 엘리베이터 대신에 비상계단을 택했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에는 누구도 만나지 않는다는 게 다행이다. 피터에게는 튼튼한 두 다리와 이제는 매끈해진 등이 있었고, 손목에는 웹슈터가 있었다.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피터는 재빠르게 웹슈터를 천장으로 쏘아 계단을 폴짝폴짝 뛰어올랐다.
“안녕, 베티.”
피터는 다른 기자들의 시선을 피해 비상계단 문을 열고 빠르게 조나의 사무실 앞으로 왔다. 베티는 피터를 발견하자마자 숙모는 괜찮으시냐고 안부를 물었다. 역시 뷰글에 제일가는 천사는 베티일 거야. 메이 숙모는 오늘 퇴원할 예정이라며 베티를 안심시킨 피터는 조나의 사무실 문을 힐끗 보았다.
“조나는 자리에 있어?”
“일이 있어서 나갔어.”
“아…, 언제 오는데?”
“사진 때문이면 피터, 유릭씨에게 이야기하면 돼.”
“스파이더맨 사진은 조나가 사주는 거잖아. 그 고집에 맞출 사진은 로비 씨도 못 고를걸?”
피터의 말에 베티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말도 맞지. 조나의 고집은 아무도 못 꺾는다. 그것이 데일리 뷰글의 오래도록 전해 내려온 족보였다. 조나 제임슨의 심기를 맞춰주거라. 그리하면 너는 오래도록 살아남으리. 하지만 그 말은 곧 기자로의 고집을 내려놓으라는 말과 같았다. JJJ와 오래도록 합을 맞춰온 로비 로버트슨도 그의 고집은 꺾을 수 없었다. 만약 조나의 사진 취향을 바꿀 수 있었다면 스파이더맨이 경찰에게 오래도록 오해받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피터는 장난스레 어깨를 으쓱이며 베티를 보았다. 베티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서랍에서 무언가를 꺼내어 피터에게 건네주었다. 조나의 서명이 들어간 수표다. 금액은 메이의 병원비와 비슷한 정도였는데, 피터는 조나가 드디어 나이가 들어서 숫자를 잘못 쓴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결혼 선물이래. 베티가 웃으며 피터에게 말했다. 금액에 놀라서 잠시 말을 잃었던 피터는 베티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 다시 말을 잊었다. 결혼, 선물. 두 단어가 하나로 합쳐지는 일이 있을 줄은 몰랐다. 잠시 메이가 다시 재혼이라도 했던 걸까 멍하니 생각하던 피터는 그 결혼의 당사자가 피터 본인을 의미한다는 걸 곧 깨달았다. 조나는 피터 머독의 결혼을 축하해주는 거였다. 그것도 메이 숙모의 병원비를 주면서 말이다. 피터와 오래 알아 온 기자들이 메이 숙모의 병문안을 왔는데, 그중에 조나는 없었다. 조나가 어떻게 메이 숙모의 입원 소식과 피터의 결혼 소식을 알아버린 것인지 피터의 머리가 복잡해졌는데, 손에는 축하 메시지를 대신한 수표가 있었다.
“찍은 사진은 다 주고 가렴.”
어느새 벤 유릭이 피터의 옆에 서 있었다. 조나가 절대로 곱게 돈을 줄 리가 없지. 피터는 안심인지 허탈감인지 알 수 없는 감정을 한숨에 담아 내뱉고, 들고 있던 사진을 모두 벤에게 건넸다. 어차피 뷰글이 아니면 팔 생각도 없었으니 사진 수십 장에 이 정도면 남는 장사였다.
“아, 유릭. 거기에 강도 사진도 있어요.”
조나가 그걸 보면 쓸모없는 사진이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여전히 홉고블린의 마약 소동을 조사 중인 벤 유릭에게는 쓸모 있는 사진일까 싶어 피터가 미리 말을 얹었다.
“요즘도 보석상에 강도가 드는 모양이구나.”
“FBI가 경찰을 뒤집고 있으니까 곧 나아질 거예요.”
“데어데블에게 들었어. 피터, 너무 위험한 곳에 뛰어들지 말거라.”
유릭이 피터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수표를 들고 그 토닥임을 받던 피터는 유릭의 시선이 제게 계속 닿아 있는 걸 느끼고, 고개를 열심히 끄덕였다. 데어데블은 맷이었다. 그리고 맷은 피터의 남편이다. 유릭의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몰랐던 피터는 뒤늦게야 그 의미를 이해했다. 맷을 따라서 너무 위험한 곳에 가지 말란 말이다. 유릭의 시선에서 보기에 데어데블은 위험한 곳을 누비는 자경단원이었고, 피터는 고작 카메라를 든 사진기자였다. 맷과 함께 나란히 빌딩 사이를 누비는 약속을 잡았다는 말은 하지 않는 게 낫겠지. 피터는 조심하겠다며 유릭의 걱정을 잠재웠다.
맷과 계속 결혼 생활을 이어 나갈지도 모르는데 이런 걸 받아도 되는가. 피터는 수표를 쥐고 한차례 고민하다가 일단은 주머니에 수표를 넣었다. 당장 거절할 말도 없었거니와 돈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맷의 집에 돌아가지 못한다면 숙모의 집에 신세를 지거나, 사진을 팔아서 어느 정도의 보증금을 만들어야만 했다. 피터의 결혼 사실을, 그리고 그 결혼이 숙모님 몰래 이루어진 비밀스러운 결혼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유릭과 베티의 앞에서 피터는 그저 고개만 열심히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지옥의 수호자들. 데일리 뷰글 사무실을 빠져나가려던 피터는 사무실 모니터에 띄워진 기사 사진을 발견했다. 데어데블과 스파이더맨의 사진은 지금까지도 꽤 인상 깊은 기사로 꼽히고 있었다. 불레틴의 ‘뉴욕을 지키는 영웅들’만큼 우주를 지킬 정도로 대단하거나 파급력 있는 이야기는 아니었으나, 작은 동네를 위해서 힘쓰는 자경단원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의미에서 반응이 좋았다. 맷과 피터는 도시를 위해서라면 망설임 없이 몸을 던질 수 있었다. 앞으로도 계속 뉴욕을 지키며 존재하겠지. 혼자가 아닌 사진 속의 스파이더맨은 꽤 든든해 보였다.
피터는 한참 동안 그 사진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겨우 뷰글을 벗어날 수 있었다.
“옷은 집에 가져다 둘게요!”
피터가 배낭을 챙겨 들었다. 배낭에는 메이 숙모의 옷가지나 물건들, 병문안을 와준 사람들이 준 꽃이나 물품들이 들어 있었는데, 숙모 혼자서 챙겨가기에는 꽤 무게가 있었다. 메이 파커는 주변에 베푸는 것을 좋아했고, 언제나 주변을 따뜻하게 챙겼다. 그래서인지 메이가 입원하는 동안 여러 이웃과 봉사센터의 사람들이 다녀갔는데, 선물 받은 것만으로도 짐이 가득했다. 그냥 작은 교통사고일 뿐이야. 메이는 피터를 달래며 별것 아니라고 웃어 보였다. 자동차에 닿지도 않은 교통사고. 조금만 나이를 덜 먹었다면 멀쩡했을 거라고 메이가 농담했을 정도였다. 그냥 메이가 나이가 있었던 터라 검사할 게 많았고, 좀 더 오래 쉬어야 했을 뿐이다.
“피터, 그 정도는 내가 챙길 수 있어.”
메이는 조금 과하게 걱정하는 제 조카에게도 휴식이 필요함을 알았다. 모든 짐을 가득 들고 있는 피터의 모습이 메이의 눈에는 금방이라도 넘어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메이가 봐온 피터는 약하고 잘 다쳤으며, 툭하면 부딪히고 넘어졌다. 어려서부터 얇은 뼈대로 이리저리 넘어지고 다니더니, 커서는 더 심했다. 누구에게 주먹으로 얻어맞은 듯 퍼렇고 빨갛게 물들어, 퉁퉁 부은 얼굴로 찾아와서 피터는 어리숙하게 웃었다. 계단에서 헛딛어서 그래요. 피터의 변명은 늘 그랬다. 그 몰골 앞에서 제 조카가 바닥을 잘 보지 않고 다니는 모양이라고, 메이는 그저 이해하는 쪽을 택했다. 그런 피터가 저런 커다란 배낭을 들고 가다가 계단에서 구르기라도 한다면 메이보다 더 오래 입원하게 될지도 몰랐다. 피터가 스파이더맨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메이는 짐을 들고 가겠다는 피터를 만류했다. 피터 파커, 그 짐 내려놓으렴.
“센터에서 도와주러 올 거야. 봉사자들이 얼마나 힘이 센 줄 아니?”
“숙모가 인기 많은 건 알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더 인기쟁이셨네요. 메이, 이건 따로 챙겨둘까요?”
병원 말고, 집 말고, 다른 곳에 가보라는 메이의 말을 피터는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제 할 일을 찾았다. 짐도 챙기고, 그것들을 두 손 가득 들고 섰다. 메이 앞에서 피터는 언제나 입가에 웃음을 가득 머금고, 착한 조카를 보여주기 위해서 애썼다. 병원에도 내내 붙어서 메이와 눈이 마주칠 때마다 ‘병원 침대는 너무 불편하지 않아요?’하고 농담을 하면서 피터는 메이의 옆을 지키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안심이 되는 것도 있었으나, 피터의 그 웃음 너머로 스며든 과한 걱정이 문제다. 메이는 제 조카에게 비밀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벤이 죽은 뒤로 피터는 너무나 착한 조카가 되어버렸는데, 거기에는 과보호도 있었다. 메이가 피터를 과보호하며 길렀듯이, 피터도 같은 과정을 밟는 중이었다. 유일하게 남은 가족을 아끼는 것은 당연했으나, 그것이 너무 과해지면 안 된다는 걸 안다. 피터가 넘어질까, 뼈라도 부러질까, 내내 걱정하며 바라보던 메이는 그 걱정을 봉사와 나눔으로 비우는 법을 익혔다. 피터는 성인이었고, 평생 껴안고 다치지 않도록 살펴줄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언젠가 피터도 새로운 가족이 생길 것이다. 메이는 작은 한숨을 뱉었다.
“피터, 난 네 짐이 아니야.”
메이의 입에서 나온 말을 잘못 들은 걸까 생각이 들었다. 짐이라니. 피터는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피터를 사랑으로 길러준 숙모를 감히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다. 잠시 표정이 굳었던 피터는 다시 미소를 머금었다.
“당연하죠! 숙모는 제 전부인걸요!”
“너도 내 짐이 아니었고. 피터, 가족은 나누는 거란다.”
메이는 피터의 손을 꼭 붙잡았다. 짐을 가득 들고 있던 피터는 손에서 느껴지는 따스함에 멍하니 메이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난 유리가 아니야. 내가 센터에서 일하는 걸 보면 놀라 뒤집어질 거다.”
“알죠, 알아요. 세상에서 제일 강한 사람이 메이 숙모라는 거. 캡틴 아메리카도 메이 숙모의 불호령이면 멈춰 서겠죠.”
“피터—, 농담이 아니야.”
“저도 진심이에요.”
“알았으면 이제 너도 네 할 일을 찾으러 가보렴. 난 바로 센터에 가볼 테니까.”
메이가 피터의 손등을 엄지로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너도 가야 할 곳에 가보렴. 손등을 쓸어내리던 메이의 손가락이 반지에 닿았다. 피터가 깜짝 놀라 입을 벌리고 메이를 쳐다보는데, 메이는 그저 가벼이 웃어 보일 뿐이었다. 언제부터 알았느냐는 말도 이 앞에서는 통하지 않을 듯싶었다. 메이에게 결혼반지를 들켜버린 피터는 이것을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고민했다. 상대는 누구라고 해야 하며, 이것이 진짜 결혼이 아니라는 말은 또 어찌해야 할까. 피터가 굳어 있는 사이에 메이는 피터가 든 무거운 짐가방을 가볍게 빼앗아 바닥에 내려놓았다.
피터의 눈이 이리저리 흔들리며 혼란스러워하는데, 메이는 참 담담하고 평화로웠다. 거짓말을 했다며 크게 화를 내던 상상 속의 메이와는 전혀 다른 반응에 피터가 당황하고 있던 사이에도, 메이는 피터가 엉망으로 정리한 짐들을 깔끔하게 나누어 정리하고 있었다. 언제부터 아셨어요? 피터의 목구멍에 그런 말이 콱 들어찼다. 물어봤자 쓸모없는 걸 알면서도 그냥 그랬다. 언제부터, 무엇을, 어디까지 아시느냐고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거짓말이 가득해서 메이에게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도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냥 손에 반지 하나가 늘어서 그렇게 알아버린 걸까. 그도 아니면 맷에게 신세 지는 게 너무 오래되어서 그런 결론을 내린 걸까. 데일리 뷰글에서도 들통이 난 결혼이 이제 메이 숙모의 귀까지 전해진 게 아닐까 싶어서 겁이 먼저 났다.
“나중에 같이 집에 들리렴. 약혼까지 한 사이에 인사는 해야지.”
메이가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이 앞에서 사실은 위장 결혼이고, 시민권이 박탈될 위기에서 멋대로 이루어진 서류상 결혼이라고도 말을 할 수 없었다. 메이는 이미 피터가 누군가랑 약혼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 그게….”
피터가 티셔츠를 꼭 붙잡으며 말을 절었다. 피터가 입기에는 조금 커다란 티셔츠도 결국 맷의 옷이었다는 게 떠올라서, 피터는 다시 혀가 굳어버렸다.
“맷에게 안부 전해주렴.”
피터는 고개만 연신 주억이다가 도망치듯 병실을 나왔다. 메이가 어떻게 안 거지? 결혼반지를 보았더라도, 상대는 몰라야 했는데 메이는 이미 맷과 피터가 사귀고 있든, 약혼하든 깊은 사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피터가 일이 생겼다며 도망치고, 그 뒤통수를 바라보며 메이는 미소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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