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피터] 위장결혼 - 16
🕶x🕷/소설
2025. 7. 27. 13:41
아침부터 분주하게 천장을 걷고 뛰는 발소리가 천둥처럼 맷의 귀를 때렸다. 어수선함이 묻어 있는 소리에 깨어난 맷은 잠시 눈을 끔뻑이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평소였으면 소음에 짜증이 나거나 예민해졌을지도 모르지만, 오늘은 쿵쿵 울리는 소리에 그렇게 화가 나지 않았다. 몸에 남아 있는 나른함은 전날 밤을 상기시키기에 충분해서, 피터의 발소리가 경쾌한 것이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혹사시킨 게 아닐까—기억이 드문드문 끊겨 있긴 했지만— 걱정한 것과 달리 피터는 꽤 멀쩡한 듯했다. 타박타박 천장을 걸어 다니는 발소리도 작게 들리는 콧노래도 평소와 비슷해서 맷은 작게 웃음을 터뜨렸다.
산뜻한 커피의 향기가 침대에 남은 흔적과 섞여 또 다른 아침의 풍경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 맛은 별로일 것이라는 걸 맷은 맛을 보기도 전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축축하게 젖어 있던 시트는 잠든 사이에 말랐지만 일단 모두 세탁기에 넣어야 한다. 이것은 결코 미룰 수 없는 일이었다. 피터의 슈트는 일단 빨래통에 넣어두거나 욕조에 담가두어야겠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침대에서 내려오려던 맷이 잠시 멈칫했다. 어깨 뒤편과 등에서 찌릿한 통증이 느껴져서였다. 공장에서 다쳤었나. 잠시 어깨를 만지며 생각에 빠진 맷은 곧 통증이 느껴지는 범위가 딱 피터 손바닥의 크기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등에 남은 것은 가벼운 멍과 손톱자국이었다. 피터가 나름대로 힘 조절을 하려고 노력한 결과였다. 뼈가 부러지거나 금이 가지 않아서 다행이다. 맷은 피터가 발견하기 전에 가운을 입어 어깨의 멍을 가리기로 했다.
“좋은 아침이에요!”
침실에서 나온 맷에게 피터가 밝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늦잠을 자는 맷을 기다리며 시리얼을 먹었는지, 피터의 입가에서 달콤한 냄새가 풍겼다. 싱크대에 남아 있는 그릇에서 맷은 달콤한 설탕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이젠 어색하지 않은 모양이다. 본인이 약에 취했을 때는 욕조에 들어가기 전까지 어색하게 굴던 피터는 태연하게 구는 법을 익힌 모양인지 부엌에서 우유를 털어 마시며 찬장을 뒤적이고 있었다. 여전히 배가 고파서 먹을 것을 찾는 모양이었다.
피터의 손장난은 지독하게 서툴렀지만, 결과적으로는 맷을 확실히 책임져주었다. 맷이 잠에 빠져 있던 사이에 깨끗하게 씻은 피터에게는 정사의 흔적이라고는 그다지 남아 있지 않았으나 묘하게 엉덩이나 다리 사이가 불편한 기색이었다. 피터가 뒤를 써본 경험은 없었을 테니, 처음이었을 테고 살짝 부어 있는 게 분명했다. 맷의 것을 겨우겨우 머금으며 벌어진 뒤는 아직 완벽하게 나으려면 시간과 칼로리가 필요한 모양이었다. 아마 앞으로 두어 시간이 지나면 말짱하게 걸어 다닐 것이다. 약으로 인해 얄팍해진 인내심을 어떻게든 쥐어짜며 천천히 삽입했고, 덕분에 찢어진 곳은 없었다. 그 뒤에는 잘 기억나지 않았으나 그래도 피를 보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소파에서 정신을 차린 뒤 피터를 손으로 만지며 살펴본 맷은 피터를 다치게 하지 않았음에 안심했다. 섹스는 생각보다 체력이 많이 드는 행위였고, 서로 간의 합의가 필요하다. 책임지겠다며 다리를 벌려준 피터는 밤새 우느라 지쳐 있었을 뿐이었다. 그 눈물이 아프거나 싫어서가 아니라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피터 본인보다도 더 피터의 상태를 잘 알 수 있는 초감각이 있는 데다가, 피터의 몸은 솔직해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고민하거나 추측할 필요도 없었다.
맷은 평소처럼 피터에게 다가가서 만져보는 대신 멀찍이서 상태를 가볍게 살피기만 했다. 밤새 관계를 한 것치고 말짱한 피터의 상태는 역시 힐링파워 덕분일 것이다. 이제 피터보다 좀 더 피곤한 상태가 된 맷은 그 사실에 안심했다.
그래도 많이 피곤하게 만들긴 했지. 턱을 손으로 만지며 고민하던 맷은 결국 피터에게 간식을 허락하기로 했다. 같이 사는 동안 피터의 식단에서 설탕을 최대한 배제했으나 지금은 어느 정도의 보상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피터, 쿠키를 찾는 거면 더 위 칸을 봐야 할 거야.”
“…쿠키가 있었어요?”
“응.”
“왜 안 알려줬어요, 맷!”
피터가 소리를 왁 지르며 뛰어올라 천장에 손을 찰싹 붙이고, 몸을 위로 끌어당겼다. 거미처럼 어디든 잘 붙어 있는 피터에게 천장에 손바닥을 붙이고 있는 일은 아주 간단했다. 시선을 위로 올려 찬장 제일 위 칸에 숨겨진 쿠키를 발견했는지 심장이 점점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두근두근 울리는 심박을 들으며 맷은 욕실로 향했다.
“늘 제자리에 있었어. 네가 못 찾았을 뿐이지.”
욕실 문을 닫기 전에 맷이 말했다. 툴툴거리던 피터는 그 타박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쿠키 포장지를 뜯고 있었다. 쿠키 상자를 열어 버릇없이 서서 먹기 시작하는 피터의 콧노래를 들으며 맷은 밤 동안 엉망이 된 몸을 깨끗하게 씻었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를 맞는 사이에도 피터의 목소리가 욕실 문틈으로 섞여 들었다. 우유까지 팩째로 마시고 있는 피터는 여전히 부엌에 서서 단맛에 빠져 있었다. 부엌에 과자 부스러기가 떨어져 있으리라는 것을 굳이 초감각으로 살피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피터가 지나다닌 자리마다 쿠키 가루와 우유 냄새가 묻어 있을 게 분명하다. 그 사실에 짜증이나 화보다는 그저 피터답다는 생각이 들어서, 맷은 한숨처럼 웃으며 물에 젖어 축축해진 머리칼을 뒤로 넘겼다. 몸에 남은 피곤과 달리 기분이 가벼운 것은 역시 오랜만에 했던 행위 때문일 것이다.
섹스가 없는 생활은 맷에게 꽤 낯선 일상이었다. 맷은 한동안, 특히 피터와 사는 동안 스스로 꽤 참아왔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피터와 위장결혼을 하고 계속 둘 사이에 오가던 것은 키스 정도였고, 피터는 키스가 서툴러서 그마저도 입술에 붙였다 대는 뽀뽀에 가까웠다. 피터를 만지거나 잘 때 껴안으며 충족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상이 필요했었나 보다. 이전의 엉망이던 연애를 떠올리며 맷은 자신을 짧게나마 돌아보았다. 결국 피터와 자게 된 것은 사고였지만 결국 그것으로 인해 부족함이 채워진 듯했다.
피터와 섹스하고 싶었구나.
자각하고 나니 어쩐지 알 수 없는 감정이 맷의 마음을 쿡 찔렀다. 그것은 죄책감과 비슷했는데, 그보다는 조금 가벼운 감정이었다. 젖은 머리카락을 타고 흘러내린 물방울이 맷의 턱을 타고 욕실 바닥으로 뚝뚝 떨어졌다. 피터를 책임지겠다고, 결혼생활을 지속하겠다고 결심했을 때부터 이미 예견된 상황이었을지도 모른다고 맷은 생각했다. 포기는 이미 기정사실로 생각하던 것을 맷은 뒤늦게 깨달았다. 피터를 위해서 시작한 일은 어느 순간부터 순서가 조금 바뀌어 있었다. 피터와 결혼 정도는 해줄 수 있다는 생각은 이제 피터와 진짜 부부가 되겠다는 결심으로 바뀌어서, 결국 진심으로 손을 대고 있었다. 그저 끓어오른 성욕이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던 피터를 향한 것은 아니다. 이젠 약효는 완전히 빠져나가서 더 이상 마약에 취해 있지도 않았다. 피터와 키스하고, 그 이상도 하고 싶다. 그것은 무엇보다 확실한 욕구였다.
약에 취한 탓에 중간중간 사라진 기억의 조각 사이로 느꼈던 뜨거움을 상기하며 맷은 수도꼭지를 돌려 물 온도를 바꿨다. 피터는 여전히 쿠키를 먹으며 온 거실을 돌아다니는 중이었다. 피터가 같이 씻겠다며 욕실로 오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며— 맷은 한참 동안 머리 위로 쏟아지는 냉수를 맞고 서 있었다. 차가운 물은 마음을 가라앉히기에도, 그리고 몸을 진정시키기에도 좋은 수단이었다.
“맷—! 샤워가 너무 길어요!! 쿠키 다 먹어 버렸잖아요!”
축축하게 젖은 채로 가운만 두르고 나온 맷에게 피터가 다가왔다. 양손에는 빈 쿠키 통과 식어 있는 커피가 들려 있었다. 맷이 씻는 동안 쿠키를 남겨보려 노력은 해봤다며 투덜거리는 피터에게서 아까보다 더 달콤한 향과 버터 향이 났다. 맷의 덜 마른 머리카락에서 물이 뚝뚝 흘러서 바닥에 떨어졌다. 액체가 뚝뚝 떨어지는 소리는 체액이 바닥과 시트에 떨어지던 소리와 비슷했다.
기분 좋아…. 드문드문 남은 기억에는 잔뜩 흥분한 피터의 목소리도 있었다. 맷은 잠시 입을 꾹 다물었다. 이상하다며 우는소리를 하던 피터는 어느 순간부터 헐떡거리며 좋다는 말을 반복하고 있었고, 그 목소리에 잔뜩 흥분해서 더 거칠게 움직였다. 뱃속 깊이 제 것을 박으며 흐트러지는 피터의 호흡과 과한 쾌락에 엉망이 된 반응을 즐겼다. 피터와 섹스했다. 그 명백한 사실은 맷의 마음을 찔렀다. 사무실의 건은 피터가 취해있어서 삽입까지는 가지 않았는데 이번은 부정할 수 없는 삽입 섹스였다. 피터가 서툴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밀어붙인 것은 약에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해도 결국 맷 자신이었다. 피터를 상대로 하는 게 싫었다면 혼자 자위라도 했을 테지만—, 그러지 않았다는 것은 피터에게 어느 정도 욕망을 품고 있었다는 말과 같다. 합성 마약은 성욕을 과도하게 부추겼을 뿐이지 사랑의 묘약 같은 게 아니었다. 인정하지 않기에는 몸의 반응이 명확하다. 어제의 긴 행위로 지쳐 있지 않았다면 분명 피터도 알아차렸을 정도일 것이다. 사무실에 있었던 행위에서 있었던 피터의 사정 횟수를 떠올리며 맷은 제 아랫도리도 그 이상으로 일했으리라 추측했다. 피터의 안에 넣은 채로 말이다. 피터의 뒤가 여전히 부어 있는 게 이해되었다.
자연스럽게 붙어오는 피터를 가볍게 껴안으며 맷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쿠키 다 먹어서 화났어요?”
한참이나 말이 없는 맷에게 폭 안긴 피터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고작 그런 이유로 화가 났다고 생각하는 피터가 평소보다 더 어린 느낌이 들어서 맷은 양심이 조금 찔렸다. 벤 유릭과 포기가 피터를 나이에 비해 어리게 생각하던 것이 떠오르기도 했다. 맷은 대답하지 않고 피터의 등을 더듬다가 손을 내려 허리와 엉덩이 부근에 슬며시 손을 올렸다. 슈트가 체액으로 더러워졌던 탓인지 위에는 커다란 티셔츠만 입고—당연하게도 맷의 옷장에서 나온 티셔츠였다— 아래에는 팬티 한 장만 입고 있었다. 커피가 담긴 잔이 혹여 쏟아질까 어정쩡하게 팔을 들고 맷에게 붙잡힌 피터는 여전히 눈을 굴리며 맷의 대답을 기다릴 뿐이었다. 포옹이 싫다거나 불편하다는 내색은 전혀 없는 피터는 전날의 행위에도 여전히 맷을 신뢰하는 눈치였다. 약에 취했다는 핑계는 완벽한 변명거리가 되어주었다.
태연한 체를 하며 피터의 허리에 손을 올리고 몸을 밀착한 맷은 피터의 이마에 슬쩍 입을 맞췄다.
“아침은 핫케이크로 할까?”
“스크램블 에그나 샐러드가 아니구요?”
“커피에 핫케이크도 괜찮을 것 같아.”
허리를 만지던 손을 앞으로 옮겨 피터의 배를 더듬었다. 부드러운 감촉이 손끝에서 느껴졌다.
“더 먹을 배는 남았어?”
아침부터 시리얼에 쿠키까지 삼킨 아랫배는 먹은 것에 비해 유달리 말랑하고 볼록 튀어나온 느낌이었는데, 어제 뒤로 잔뜩 먹은 탓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피터에게 하기에는 부적절한 농담이다. 괜히 야한 말을 꺼내서 피터에게 부끄러움을 주는 것은 지금 관계에서는 좋지 않은 선택지일 듯싶었다. 맷을 책임졌다는 생각으로 충만해서 당당해진 피터에게 그 행위가 섹스였음을 상기시켜 줄 필요는 없다. 엉망인 거리감으로 부부 생활을 이어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맷이 피터의 배를 쓰다듬는 사이에 젖은 몸과 머리칼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피터가 입은 티셔츠에 흡수되었다. 피터의 호흡과 심장박동, 그리고 아주 작은 변화들까지 쉽게 알 수 있는 맷은 천천히 눈을 끔뻑이며 피터의 대답을 기다렸다. 이미 답은 알고 있었기에 궁금하진 않았다.
“…먹을 수 있어요.”
맷의 달콤한 유혹에 결국 넘어가 버린 피터가 눈을 또르르 굴리며 말했다. 그럴 줄 알았어. 피터의 배를 매만지던 맷은 피터의 손에 들린 머그잔을 빼앗아 들었다.
“슈트는 욕조에 담가두고,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쪽. 입술에 가볍게 키스하고 부엌으로 향하는 맷의 뒤통수로 피터의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쿵쿵 울렸다. 핫케이크를 준비하기 전에 일단 시트를 세탁기에 집어넣어야겠지만 피터에게 그 정도의 인내심은 있을 것이다. 맷의 혀끝에 설탕의 단맛이 남았다. 피터의 입가에 남아 있던 쿠키 부스러기가 꽤나 달아서 맷은 제 입술을 혀로 핥다가 식은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탄 맛이 가득한 맛 없는 커피는 설탕과는 궁합이 좋았다. 대충 던져둔 슈트를 주우러 가는 피터의 발소리가 심장박동과 함께 섞여 맷의 귀를 두드렸다. 결국 변하는 건 없어. 서로를 책임진다는 결과만이 남은 관계는 결국 언제나처럼 계속될 뿐이었다.
공장은 소식을 듣고 온 요원으로 가득했다. 결국 홉고블린은 도망쳤지만, 수배령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증거품이던 기계나 화학품이 일부 타버리긴 했지만 그래도 온전하게 남을 수 있었던 것은 맷이 노력한 덕분인 게 틀림없다. 공장 천장 위에 숨겨두었던 카메라를 슬쩍 찾아내 수거한 피터는 카메라가 다행히 고장 난 부분 없이 말짱하다는 것을 알고서야 진심으로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월셋집을 나올 때 받은 보증금과 카메라가 피터가 가진 유일한 자산목록이었는데, 뷰글에서 조금이라도 돈벌이를 지속하려면 반드시 지켜야 하는 게 카메라였다. 라이노 때문에 빌딩에서 떨어질 때도 지켜낸 카메라는 공장에서도 환풍구 터널 위에서 온전히 살아남았다.
찍은 사진을 현상하여 앞의 사진과 함께 손에 든 피터는 슈트를 입지 않고, 피터 머독인 채로 공장 근처 골목에 서 있었다. 이번에는 맷도 지팡이와 정장 코트 차림으로 함께 가 주어서 피터는 더욱 당당히 어깨를 펴고 FBI 요원을 노려볼 수 있었다. 변호사 남편을 두고 있다는 것은 이럴 때는 큰 자신감이 되는구나. 맷이 한 마디씩 꺼낼 때마다 표정이 구겨지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피터는 뉴욕의 모든 불우하고 슬픈 시민들에게 변호사를 제공해야 한다는 내용으로 사회운동을 해야 한다고 반쯤 장난이 섞인 생각을 했다. 그렇게 된다면 보증금을 못 받는 불우이웃은 뉴욕에 존재하지 않을 텐데. 딱딱한 의자에 앉는 무고한 사람들도 사라질 거야. 피터는 쉼 없이 법적인 이야기를 꺼내는 맷의 옆구리에 찰싹 붙어, 맹인의 색안경 앞에서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 요원을 흘깃 보고 있었다. 맷 머독 변호사는 피터 머독의 든든한 울타리였다.
“스파이더맨이 강도를 잡아줄 겁니다.”
내가요? 맷의 옆에서 법적인 것이 어쩌고 하는 이야기를 대충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협상 내용을 한 귀로 흘리던 피터는 맷의 발언을 듣고, 고개를 돌렸다. 씨익 올라간 맷의 입매는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스파이더맨이 잡아줄 반지 강도를 제대로 법정까지 넘기라는 것이 맷이 추가한 조건 중 하나였다. 스파이더맨의 대리인으로 나온 피터의 대리인인 변호사 맷은 거침없이 말을 잇고 있었다. 강도가 경찰이니까 제대로 잡아넣으려면 필요한 요구사항인 모양이다. 맷의 옆에 붙어 선 피터는 대화가 계속 되는 동안 법이, 재판이 어쩌네, 제대로 된 처벌이 어쩌네하는 맷이 자주 하는 법 이야기를 들으면서, 한쪽으로는 다른 생각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맷에게 하나하나 다 도움을 받고 있는데, 맷은 확실하게 변호사로도 남편으로도 피터를 책임져주고 있는데, 스파이더맨이 자유가 되면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지는 게 아니냐 하는 지극히 당연한 문제에 대해 떠올리고 있었다.
“…스파이더맨은 자유야.”
맷의 법적인 말 앞에서 잔뜩 기가 죽은 요원이 작게 말했다.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피터는 제가 잘못 들은 줄 알았을 정도였다.
“피터 머독에게도 더 이상 가까이 오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지켜지지 않는다면 넬슨 앤 머독에서 의뢰인의 정당한 권리를 위해 절차를 밟을 겁니다.”
맷이 단호하게 말했다. 옆에 붙어 있는 피터를 가볍게 당겨 안은 맷의 행동은 당당하고 기운찼다. 맷에게 허리를 붙잡혀 더욱 몸을 가까이하게 된 피터는 눈을 끔뻑이며 맷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선글라스를 낀 맷은 자연스러운 변호사 모드였다.
“피터 머독에게도 더 이상 감시가 붙지 않을 거야. 약속해.”
피터에게도 완벽한 자유가 주어졌다. 스파이더맨 일로 체포되고 어언 몇 주— 두어 달이 지나서야 얻은 자유였다. 홉고블린과 공장의 증거품, 회사에서 피터가 찍은 사진 따위를 코트 안에서 꺼내어 맷이 건네고 요원은 그것을 받아들고 맷과 피터를 슬쩍 째려보다가 한숨을 푹 쉬고 먼저 자리를 떴다. 무언가 기분 나쁘다는 태도였는데, 피터는 그것이 그저 FBI요원이 피터와 맷을 싫어하는 모양이라고 가벼이 생각했다. 아무리 부부사이를 과시하듯 스킨십을 하고 있다는 자각이 부족한 피터는 맷이 허리를 잡고 있거나 당기는 게 익숙했고, 맷의 손이 엉덩이에 올려져 있는 것도 그냥 그런가보다하며 넘겨버리곤 했다. 부부이기도 전부터 맷과는 이 정도 거리감은 갖고 있었던 터라, 피터에게는 그다지 부끄럽거나 신경쓰이는 행동이 아니었다. 요원의 발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골반에 손을 올리고 있는 맷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은 채 피터는 그저 옆에 서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이제 난 자유예요? 야호? 이 상황에서 적절한 농담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문뜩 아까까지도 생각하던 문제가 떠올라서 피터가 고개를 들었다.
“우리 아직 부부 계속하는 거예요?”
“…….”
피터의 옆구리를 부드럽게 쓰다듬던 맷의 손이 멈췄다.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피터는 눈을 감았다 뜨며 맷이 무언가 대답을 주길 기다렸으나 맷은 그 상태로 한참을 대답 없이 서 있었다. 아침에도 어쩐지 대답이 늦던 맷이 걱정이 되어서, 혹시 전날의 일로 여전히 몸이 안 좋은가 싶어서 걱정이 든 피터는 손을 뻗어 맷의 뺨이나 턱언저리를 더듬었다.
“맷, 몸이 안 좋아요? 벡스터 빌딩에 가볼까요?”
지금이면 리드가 돌아와 있을지도 몰라요. 피터가 말하는 사이에도 맷은 그저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수염이 만져지는 맷의 턱은 감촉이 재밌었다. 피터는 맷의 턱을 만지작거리다가 맷의 선글라스를 벗겨버릴지 고민했다. 아까까지 변호사의 언어로 잘도 말하던 맷은 갑자기 커다란 문제를 떠안은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물고 있었고, 눈앞에 있는 피터를 본체만체하는 것 같았다. 데어데블을 할 때는 맷이 자주 무시하곤 해서 대답이 늦는 것은 익숙하지만, 어제의 일이 있었던 터라 피터의 걱정이 커졌다. 방사능 거미에게 물린 덕분에 피터에게는 미약하게나마 힐링팩터가 있었으나, 맷은 방사능에 노출되어 감각이 아주 많이 예민해지긴 했지만, 치유 능력은 없었다. 혹시나 마약에 노출되었던 것이 어떤 다른 변화를 일으키거나 몸에 남아서 영향을 주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방사능과 결합에 또 다른 효과를 자아냈을지도 모를 일이고….
아, 방사능.
피터는 입을 살짝 벌려 작은 숨을 내뱉었다. 마약에서 미약의 효과가 있을 리가 없다. 홉고블린이 뉴욕의 프러포즈를 받은 시민을 미약에 취하게 하겠다는 참으로 이상한 계획을 세웠을 리도 없었다. 적당한 중산층 이상의 사람들이 마약에 익숙해져서 그 약을 더 찾게 한다면 모를까. 최음제에 비슷한 효과가 났던 것은 어쩌면 맷과 피터의 신체에만 있는 어떤 물질 때문일지도 몰랐다.
“맷…!”
피터의 심장이 새로운 발견으로 쿵쾅 뛰기 시작했다. 대답이 없던 맷에 대한 걱정을 잠시 미뤄두며 화학 교실에서 새로운 발견을 한 십 대 소년처럼 웃음 피터는 냉큼 맷에게 매달렸다. 잠시 휘청이던 맷은 피터의 몸을 자연스럽게 두 팔로 감아 지지하며 피터의 무게를 온전히 지탱하고 있었다. 맷에게 어떻게 말하면 좋을지 생각하며 온몸으로 맷에게 붙어 머리를 굴리며 기뻐하던 피터는 여전히 대답이 없는 맷이 조금 걱정이 되어 맷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시선을 위로 올렸다. 얼굴을 살펴볼 생각이었는데— 피터의 몸이 맷에게서 쑥 멀어졌다.
“윽, 피터 잠깐—.”
맷의 표정이 찡그려졌다. 피터의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어 피터를 들어 올린 맷은 그대로 팔을 올려 피터를 떼어냈다. 맷에게 대롱대롱 들려 있던 피터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당황하다가, 맷의 얼굴을 보았다. 구겨진 미간이나 찌푸려진 입이 보였다. 그 표정은 아프거나 혹은 포옹이 싫다는 표정이라 피터는 제가 잘못을 했나 싶어졌다. 그냥 평소처럼 기뻐서 찰싹 안기려고 했는데… 싫었나. 누군가에게 붙어 있는 게 익숙해서 맷에게 자주 매달리곤 했던 피터는 고양이처럼 맷에게 들려진 채 제가 무언가 잘못을 했나 돌아보고 있었다. 어제 너무 잘 못해서 그랬던 걸까. 그렇지만 맷은 확실히 사정했잖아. 별로였던 걸까. 아침에 핫케이크까지 구워주며 자상히 웃어주던 맷의 찡그린 표정은 피터에게 불안감을 조성하기 충분했다. 벌써 부부가 끝난 걸지도 몰라. 대답 없는 맷의 얼굴을 쳐다보며 피터는 속으로 무수한 대답을 지어냈다. 누군가가 떠나는 것은 피터에게 언제나 익숙한 일이었고, 갑자기 태도가 달라져서 미안하다며 떠나는 것도 언제나 있던 일이었다. 스파이더맨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겪은 일 중에 아주 사소한 문제점 중 하나였다. 관계를 언제나 망치게 되는 것. 상대가 맷이어도 그것은 달라지지 않을지도 몰랐다. 아까까지 잔뜩 기뻐하던 피터는 금방 기가 죽은 채로 맷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무언가 단단히 오해를 시작한 눈치다. 피터가 어깨의 상처를 짓누르는 바람에—피터의 무게가 더해지니 꽤 아팠다— 급하게 피터를 떼어낸 맷은 쿵쿵 울리는 피터의 심장 소리와 숨결 따위로 피터의 마음을 어렴풋이 눈치챘다. 하지만 그 머릿속의 생각까지 읽을 독심술은 갖고 있지 않아서 그저 피터가 불안해한다는 사실만 알아차릴 뿐이었다. 부부를 계속하는 거냐는 그 말에 답이 있었던 걸까. 여전히 피터를 책임지고, 이 역할을 계속할 생각을 제멋대로 하고 있던 맷은 입술을 혀로 핥았다가 천천히 입을 뗐다. 여전히 맷의 두 손에 잡혀 발이 공중에 떠 있는 피터를 맷이 슬쩍 올려다보았다.
“피터, 넌 어떻게 하고 싶어?”
멋대로 피터에게 강요하는 것은 옳지 않음을 알고 있는 맷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이었다. 집세가 없으면 계속 살아도 좋다고, 같이 있는 편이 더 돕기 편하다는 둥의 이런저런 변명의 말이 떠올랐으나 맷은 그런 말을 굳이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피터의 심장이 느리게 쿵쿵 뛰었다. 대답을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는 매튜는 피터를 살며시 땅에 내려주고, 언제나처럼 자상한 미소를 띠었다. 피터를 달래는 방법은 이미 몸에 충분히 배 있었고, 피터의 등이나 어깨를 만져주며 천천히 대답이 나올 때까지 인내하면 되는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피터에게 다시 다가가 어깨를 만져주려던 맷은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과 소리에 몸을 멈칫했다.
Foggy— Call — Foggy — Call
출근 시간이 한참이나 지나 있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일단 전화부터 받고, 피터를 달래겠다고 생각한 맷은 시끄럽게 울리는 휴대전화를 꺼내어 통화를 받았다. 지각에 대해서 화를 내거나, 혹은 데어데블 일을 하고 있느냐며 타박하리라 생각했던 포기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꽤 다급했다.
[맷—! 그 경찰…! 증거품…! 우리 꼬마 의뢰인이 도망쳤어!!]
포기의 다급한 숨소리는 열심히 어딘가로 달려가고 있는 모양이었다. 경찰서나 교도소일지도 모른다. 휴대전화를 쥐고 잠시 망설이던 맷은 아직 어림에도 강도로 오인당하였던 아이를 떠올렸다. 아이가 제힘으로 구치소에서 탈출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맷이 잠깐 망설이는 사이에 피터가 툭 맷의 가슴팍을 가볍게 밀었다.
“변호사가 또 필요한 곳이 있나 봐요. 맷, 가봐요!”
그게 애써 유쾌함을 짜내는 목소리라는 것을 알았다. 피터를 달래줘야 했으나 그럴 시간이 없는 맷은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빠르게 달려 나갔다. 택시를 잡아타기 위해 큰길로 나가는 맷을 보며 피터는 괜히 골목의 돌멩이를 툭툭 차다가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고 보니 키스도 안 했구나. 갑작스럽게 출근을 해버리는 맷을 제대로 배웅하지도 못한 채, 피터는 골목에 잠시 힘없이 쪼그려 앉았다. 변호사 맷 머독은 참 바쁘구나. 맷이 피터만 돕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은 피터는 가슴 한쪽이 쿡쿡 찔렸다. 맷에게 계속 붙어서 도움을 받는 것은 역시 이기적인 행동일지도 모른다. 맷을 책임지겠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계속 책임져주는 것은 맷이었고 피터는 이 관계에서 도움을 주고받을 수 없는 기울어진 저울 위에 있었다. 집에 가서 집안일이라도 하면서 있어야 할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계속 책임을 지겠다며 어필해야 하나. 골목길에 주저앉아 생각하던 피터는 일단 비어 있는 주머니를 채우고 생각을 하자며 무릎을 손으로 털며 일어나 천천히 걸어 골목을 빠져나갔다.
낡은 침대로 돌아가야 할 시간인가. 맷의 폭신한 침대를 생각하던 피터는 이내 그 침대 위에서 했던 일도 자연스럽게 떠올라서 얼굴이 붉어졌다. 두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고 있던 맷에게 안겨서 몇 번이고 좋다고 말하며 울어버렸다. 맷의 것을 가득 머금었던 뒤는 언제 그런 일이 있었냐는 듯 말짱해져서 사실 그게 꿈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섹스를 할 때 잔뜩 상기된 얼굴로 키스를 가득 해주었던 맷이 생각이 나서 피터는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며 발걸음에 속도를 높였다. 이게 다 마약 때문이야. 공장과 반대되는 쪽으로 무작정 뛰듯이 걸은 피터는 제 손가락을 보며 끙 앓는 소리를 냈다. 결혼반지는 여전히 반짝반짝 빛을 내며 맷에게 받았던 때처럼 그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피터는 언젠가 정말 결혼을 하고 평범한 가정을 꾸리고 싶다는 상상을 한 적이 있었다. 스파이더맨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된 시점이어서 그게 가능할 거라고 꿈꾼 적이 있었다. 결국 그게 불가능하다는 걸 깨닫고 포기하는 동시에 주변을 자연스럽게 멀리 밀어내는 것도 몸에 익어버려서, 망치는 것이 특기라며 웃어넘기는 게 그저 버릇이 되어버렸다. 맷이랑 그렇게 지내고 싶었던 걸까. 진짜 평범한 부부 놀이를 계속하면서 그 안정감을 즐기고 싶었던 걸지도 몰라. 피터는 제 이기심을 되돌아보다가 한숨처럼 웃어넘겼다. 남은 보증금과 사진을 판 돈에, 룸메이트까지 구하면 번화가에서 아주 벗어난 곳이라도 집을 구할 수 있을 것이다. 맷이 보증금을 돌려받아 주었던 낡은 월세방을 떠올리며 피터는 긴 한숨을 쉬었다. 거기처럼 저렴한 곳을 다시 구할 생각을 하니 눈앞이 까마득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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