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피터] 위장결혼 - 17
🕶x🕷/소설
2025. 8. 2. 17:12
- 제목미정
- ne님이 말씀해주신 위장결혼 맷피터 설정에 감명을 받아.. 시작되었습니다
공장에 설치해 둔 카메라에 괜찮은 사진이 찍혀서 다행이다. FBI에게 넘긴 증거 사진 말고도 괜찮은 사진 몇 장을 발견한 피터는 우선 뷰글로 향하기로 했다. 데어데블도 함께 찍혀 있던 탓에 데일리 뷰글말고 불레틴에 팔지 고민도 했는데—뷰글보다는 히어로를 대우해 줄 것 같아서였다— 함께 비욘드 코퍼레이션까지 갔던 벤 유릭을 배신하는 것만 같아서 결국 뷰글을 택했다. 혹여 편집장인 조나가 데어데블까지 함께 재난이네 공장 파괴범이라 하는 신문 기사를 낸다면 맷에게 사과해야겠지. 맷에게 여러 가지로 신세를 지고 있는 피터는 아직 맷에게 제대로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위장 부부까지 해주었던 맷에게 감사의 의미로 펍에서 한 잔 정도 사주는 일조차도 하지 못했다. 부부로 살면서 생각보다 맷에게 해준 것이 정말로 적다는 생각이 그제야 피터의 머리를 때렸다. 맷에게 해준 것이라고는 약에 취했을 때 도와준 것뿐이었는데, 그마저도 맷이 먼저 피터를 도와주었던 지라 그저 빚을 갚은 셈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여전히 마이너스였다.
스파이더맨, 데어데블과 함께 공장을 파괴하다!
데일리 뷰글 1면을 장식할 기사 제목을 상상하는 것은 이제 피터에게 무엇보다 쉬운 일이다. 어린 시절을 스파이더맨 활동과 사진기자 일로 보냈던 탓에 언제나 데일리 뷰글의 기삿감이 되었던 피터는 이제 저를 헐뜯는 기사의 제목과 내용은 눈 감고도 알았다. 마약을 생산하던 곳이었던 아니던 스파이더맨이 부수고 파괴했으며, 끝내는 스파이더맨은 재앙이라는 이야기로 마무리 될 것이다. 거기에 데어데블까지 함께 언론의 제물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피터의 양심이 쿡쿡 찔렸다. 게다가 이젠 부부라는 관계를 계속할 이유도 없으니까 완전히 남이 되어버리는 거잖아. 책임이네 뭐네 멋지게 떠들었던 게 떠오르니 피터의 마음이 다시 무거워졌다. 정말로 맷을 책임질 생각이었는데, 부부가 아니게 되면 이제 이유도 사라지는 거니까 괜찮은 걸까. 그렇지만 데어데블의 이미지까지 스파이더맨으로 깎아 먹는 것은 친구로서 못할 짓 같았다. 언젠가 어벤져스 가입을 권유받았을 때, 스파이더맨의 이미지가 폐가 될까 무서워서 권유를 거절하려 한 적이 있었던 피터는 여전히 ‘스파이더맨’의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래도 맷이니까 괜찮을 거야. 피터는 제 마음을 가볍게 만들기 위해서, 제멋대로 변명했다. 맷이라면 언제나 무엇이든 넘어가 줄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집에 들어가서 멋대로 우유를 마시고, 집안 물건을 좀 나누며 좀 쉬다가는 것도, 사무실에 들러서 부탁하는 것도 데어데블이라면 용서해 줄 것만 같았고, 실제로도 늘 별다른 말 없이 곁에 있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데어데블은 믿을 수 있고, 결국엔 늘 옳은 일을 할 사람이다. 스파이더맨 일로 오해를 받아서 히어로들에게 쫓기는 처지가 될 때도 먼저 찾아와주던 데어데블에게 피터가 줄 수 있는 것은 그런 단단한 믿음뿐이었다. 그것은 부부 관계니, 가짜 부부니 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는, 같은 정의를 공유하는 동료로서 갖는 우정이었다. 세상이 무너지더라도 데어데블이 아니라 하면 믿을 수 있었다.
맷이랑 이혼하게 되더라도 그 정도 우정은 계속될 수 있겠지? 뷰글로 향하는 버스를 잡아타며 피터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침대도 그리울 것이고, 맷이랑 같이 있던 시간도 종종 생각이 날 것만 같다. 천장에 붙어 있어도 신경을 쓰지 않는 상대와 산다는 것은 생각 이상으로 편안해서 원래의 생활로 돌아가면 아쉬워질 게 분명했다.
“좋은 사진이야. 1면 사진으로 쓰기에 손색없는걸.”
조나보다도 먼저 사진을 본 유릭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데어데블과 스파이더맨이 찍혀 있는 사진은 홉고블린과 대치하는 장면이나, 불길 속의 장면이 담겨 있었다. 자동으로 맞춰둔 카메라가 알아서 몇 컷을 찍어준 덕분에 건질 수 있던 사진이었다. 뷰글 대신에 불레틴으로 가면 두려움이 없는 데어데블이 폭발 사고를 막았다며 크게 칭찬받았을 것이다.
“이 정도면 조나도 화가 풀리겠는데?”
오랜만에 듣는 칭찬에 조금 쑥스러워진 피터가 머리를 긁적이며 웃는데, 어느새 곁에 온 베티도 피터를 추켜세워주었다.
“설마… 우리의 JJJ가 그렇게 쉽게 웃어줄 리가 없잖아, 베티.”
“그래도 병원비 결제 수표에 사인할 때는 꽤 걱정하는 얼굴이었어.”
“그 조나 제임슨이? 1인실 가격이 사악해서 그랬나 보지.”
피터가 어깨를 으쓱이며 능청스럽게 웃었다. 조나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농담처럼 이어지는 대화는 피터의 무거웠던 마음을 풀어주기에 충분했다. 사진도 칭찬받았고, 조나에게 결재만 받으면 정말 완벽한 기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피터는 맷이랑 이혼이네 뭐네 하던 생각으로 복잡한 머릿속을 애써 즐거운 것들로 채워넣기 위해 노력 중이었다. 자리를 비운 JJJ를 기다리는 동안 데일리 뷰글 사무실을 어색하게 기웃거리던 피터는 결국 베티의 근처에 있던 빈 의자에 앉았다. 머릿속에는 ‘오늘 받을 수표와 앞에 받은 수표, 그리고 남은 보증금을 더하면 얼마 정도가 될까’ 하는 지독히 냉정한 돈벌레 같은 생각뿐이었다. 맷에게 또 미안해졌다.
“피터, 결혼식은 따로 안 한 거야?”
의자에 앉아 발을 꼼지락거리던 피터에게 베티가 물었다.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하듯 작은 목소리였다. 주위를 나름대로 신경 써준 듯했다.
“결혼, 식?”
갑작스러운 물음에 피터의 목이 멨다. 결혼식이 마치 태어나서 처음 듣는 단어라도 되는 것처럼 이상하게 발음되었다. 결혼이라는 말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게 되었는데, 아직도 익숙해져야 할 말이 남아 있었음에 피터의 온몸이 다시 긴장하기 시작했다.
“결혼했다면서. 그래서 머독 씨가 된 거네.”
이제야 이해가 된다는 듯 베티가 손바닥을 가볍게 마주쳤다.
“피터 파커에서 피터 머독이라…. 숙모께서 서운해하지는 않아?”
오랫동안 데일리 뷰글에서 일해온 사람이라면 누구나 피터에게, 피터가 끔찍이 아끼는 숙모가 계신다는 사실을 알았다. 메이가 자주 아팠을 때 병원비나 이런저런 이유로 사진값을 올리느라 조나와 말싸움했던 탓도 있었고, 피터가 언제나 메이를 중심으로 하루를 보내던 탓도 있었다. 굳이 뷰글이 아니더라도, 피터를 대학교든 어디서든 오랜 시간 봐온 사람이라면 피터 파커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가족이 있다는 사실을 모를 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조나의 비서를 해온 베티에게도 해당하는 말이었다. 숙모께서 서운해? 피터는 잠시 입을 벌린 채 그 자리에서 굳어버리고 말았다.
베티에게 맷과 결혼했다고 말한 적이 있었나? 깜짝 놀란 채 입을 벌리고 있던 피터는 고개를 들었다가, 멀찍이서 커피가 든 머그잔을 들고 걸어가던 벤 유릭과 눈이 마주쳤다. 피터가 찍어온 사진을 보더니 냉큼 기사를 쓰기 시작한 유릭은 그답지 않게 피터의 눈을 슬쩍 피해버렸는데, 어쩐지 결혼에 대해 무언가를 아는 눈치였다. 내가 무슨 실수를 했나? 피터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입원하는 동안 다녀간 유릭이 혹시 맷과의 관계를 오해라도 한 것일까—사실 결혼한 사이인 게 맞지만— 싶어진 피터가 변명거리를 찾아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오해, 실수, 그냥 친한 친구
조금 많이 가깝지만, 아무튼 우정으로 만나는… 같이 있으면 편안한 사람
이런저런 단어들이 떠오르고 다시 사라지길 반복했다. 갑자기 이혼할 거라고 말하는 것도 이상하다. 결혼은 하긴 했는데 사실 이혼 준비 중이야. 이런 말을 들으면 누구라도 손을 잡아주며 걱정스러운 눈으로 쳐다보게 될 것이다. 피터도 이 정도 추측은 가능했다.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한 피터가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사실… 숙모는 모르셔.”
피터는 굉장히 오랜만에 거짓말이 없는 문장을 만들었다. 과부하가 걸린 머리가 멋대로 내놓은 대답이었다.
“뭐—???”
베티의 표정에 놀람이 더해지고, 멀찍이 서 있던 유릭도 기사를 쓰다 말고 벌떡 일어나 피터를 쳐다보았다. 데일리 뷰글 사무실이 소란스러워서 베티에게만 들릴 거라고 생각했던 피터는 제게 향한 시선에 꼼짝없이 굳어버리고 말았다. 기사를 쓰느라 바쁘다는 건 다들 핑계인 게 틀림없다. 어느새 조용해진 사무실에서 피터는 거칠게 뛰는 제 심장 소리만 들을 수 있었다. 맷의 기분을 체험하게 된 것 같았다. 작은 숨소리도 이렇게 컸나 싶을 정도여서 피터는 사무실에서 뛰쳐나가고 싶어졌다. 데일리 뷰글에서 스파이더맨은 재앙이라 기사를 냈을 때도 이렇게 무섭진 않았다. 차라리 라이노에게 부딪혀서 빌딩에서 떨어졌을 때가 더 나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맷이 보고 싶다.
피터는 저 대신에 변명을 해줄 변호사가 너무나 그리워졌다. 아직 이혼도 안 했는데 벌써 보고 싶어져서, 이래서야 홀로서기를 각오하는 것도 소용이 없겠다 싶을 정도였다. 생각보다 맷에게 의지를 많이 했나 보다. 등에 땀이 삐질삐질 흐를 정도로 긴장한 피터는 데일리 뷰글에서 도망쳐 매튜의 사무실로 갈지 아주 짧게 고민했다. 맷에게 찾아가서 또 실수한 것 같다고 주위 사람들이 결혼에 대해서 알아버렸다고 외치면 맷이 그럴듯한 변호를 해줄 것만 같았는데, 그마저도 맷이 급히 전화받았던 모습이 생각이 나서 금방 좌절되었다.
“파커!!”
의자에 앉아 데일리 뷰글의 기자들과 직원들에게—다들 피터가 오랫동안 알아 온 사람들이었다— 둘러싸여 숨 막히는 취조를 받을 뻔한 것을 구해준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조나였다. 볼일을 마쳤는지 발소리를 쿵쿵 내며 들어온 조나는 언제나처럼 일을 하지 않는 직원을 닦달하다가, 피터를 발견하고는 소리부터 쳤다. 언제나처럼 우렁찬 고함이었다.
“사진을 팔고 싶으면 제대로 일해야지!”
“조나…! 그럴 줄 알고 사진 가져왔어요!”
피터는 아주 오랜만에 JJJ가 정말로 반가워졌다. 사무실로 들어가는 조나의 뒤를 냉큼 따라 들어가며 피터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조나의 사무실이 이렇게 든든하긴 처음이다. 사진을 내놓으라며 책상에 앉아 고개를 까딱이는 주름진 얼굴을 보며 피터는 기쁜 마음으로 사진을 늘어놓았다. 오늘만큼은 사진 가격이 조금 모자라도 기꺼이, 비록 맷에게 느낄 죄책감은 더 커지겠지만, 팔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문밖에서 여전히 피터의 결혼 스토리를 궁금해하는 직원들의 발소리나 웅성임이 들렸으나 피터는 그 수다들이 들리지 않는 체를 하며 조나와 목소리를 높여 사진을 흥정했다. 안 들린다. 나는 아무것도 못 들은 거야. 속으로 몇 번이고 다짐하듯 피터는 피터의 걱정스러운, 숙모님도 모르는 비밀스러운 결혼생활을 추측하는 이야기에서 정신을 떼어내기 위해 애썼다. 조나 제임슨의 커다란 목소리는 수다를 잠재우는 데 도움이 되긴 했지만, 피터의 마음속 죄책감까지는 덜어내 주지 못했다.
데어데블과 스파이더맨의 사진은 피터의 생각보다 괜찮은 가격에 팔렸고, 피터는 베티에게 ‘피터 머독’의 이름으로 된 수표를 받자마자 도망치듯 뷰글을 빠져나왔다. 수표를 건네며 베티가 무언가 묻고 싶어 했으나 바쁜 일이 있다며 재빠르게 발을 돌렸다. 뒤통수에 걱정이 가득한 유릭과 베티의 목소리가 들렸으나 차마 거기에 대고 또 다른 변명을 하지 못하고, 그냥 자리를 피하는 것을 택했다. 피터가 제일 잘 하는 일이었다.
마음이 복잡해진 피터는 뉴욕 이곳저곳을 떠돌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집이라고 해봤자 결국 ‘맷 머독의 집’이니까 그걸 생각하니 침대에 누워도 마음이 불편했다. 편안하고 폭신하고 부드러운 침대가 이렇게나 불편할 수가 있다니. 예전 같았으면 데어데블은 이해해 줄 것이라면서 멋대로 들어가 우유도 털어 마시고, 시리얼도 꺼내어 먹었을 피터는 갑작스럽게 당당하게 구는 게 어려워졌다. 이게 다 그 반지 때문이다. 맷이 준 결혼반지 말고, 가짜— 마약 반지. 피터는 침대 위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몸을 이리저리 굴렸다. 시트를 벗겨낸 매트리스는 생각보다 더 부드럽고 푹신했지만, 피터의 마음을 위로해 주지는 못했다. 더러워진 시트는 세탁기에 들어갔다가 세탁세제의 마법을 받은 뒤 햇볕에 바짝 말려지는 중이었다.
약에 취한 맷을 도우면서 드디어 정말 도움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스파이더맨이 자유가 되었으니, 변명도 사라져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맷이 나가라고 한마디 하면 바로 짐을 싸서 나가주리라 결심했지만, 결심이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닌 터라 룸메이트 구하기나 저렴한 집을 찾는 것부터 다시 시작해야 할 판이었다. 거기에는 다시 숫자놀음이 필요했다. 남은 돈과 받은 수표를 모두 현금으로 바꾸어 합치면 얼마나 되는가. 과학 분야에서의 계산은 즐겁기만 한 피터에게, 돈 계산은 무엇보다 하기 싫은 일이었다. 거기에 계약서 검토까지 다시 할 각오를 해야 한다니 다시 마음이 갑갑해져서 피터는 맷의 침대 위를 뒹굴뒹굴 구르며 생각에 빠져 있다가 결국 제 방에 두었던 ‘가짜 반지’를 챙겨 집을 나왔다. 순찰을 조금 돌다가 어벤져스 타워든 벡스터 빌딩이든 실험 환경이 괜찮은 곳에 가서 제대로 분석을 부탁할 생각이었다. 맷이 과학 도구를 몇 개 사서 방에 두어도 된다고 말해주었지만—필요하다면 비용도 지원해 주겠다고 친절히 말했다— 피터는 제가 가진 현미경과 비커 몇 개로 책상 위를 채웠을 뿐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맷의 집에, 맷의 돈으로 다락방의 비밀 실험실까지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피터도 그 정도 염치는 있었다.
현미경에 비커로는 정확한 분석이나 해독제를 만드는 일까지는 해내기는 어렵다. 천재라는 소리를 종종 들으며, 낡은 비커 몇 개로 거미줄을 만들어낸 피터에게도 한계라는 게 있었다. 주머니의 한계였다. 피터는 비닐로 잘 밀봉된 마약을 슈트 바지 안쪽에 찔러넣고, 창문 밖으로 웹스윙을 했다. 방사능과 마약이 반응하여 새로운 효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가. 대학원을 포기하지 않고 진학했더라면 이걸로 논문도 쓸 수 있지 않았을까 생각하니 마음이 조금 아파졌다.
“일단 생산적인 일을 하자, 스파이더맨.”
거미줄로 빌딩 사이를 빠르게 가로지르며 피터는 웹슈터 버튼을 누르는 것으로 찝찝한 기분을 날려버리기로 했다. 고민해 봤자 달라지는 것은 많지 않다는 걸 알았다. 맷에게 계속 집이나 빌리며 사는 것도 참 달콤한 선택지인데 그걸 지속하려면 뻔뻔한 낯짝과 결혼이 계속될 이유가 필요했다. 맷이 저를 좋아한다거나, 피터 본인이 맷을 좋아한다거나 아무튼 그런 이유라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스스로 생각하고도 우습고 하찮은 변명에 피터가 마스크 아래로 가벼운 미소를 흘렸다. 우린 완벽한 친구야. 반지도 받긴 했지만, 그냥 아무튼 편안하고 완벽한 친구. 피터가 변명하듯 중얼거렸다.
“평범함은 오래전에 포기했잖아, 파커.”
빌딩 벽에 가볍게 붙어 선 피터가 자신을 설득했다. 역할극에 너무 심취한 게 틀림없다. 단단한 땅에 발을 붙이고 있다는 감각을, 맷에게 툭 기대어서 도움을 받고 같이 생활하는 것에 너무도 익숙해진 나머지 그것을 잃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제 이기심에 피터는 책임이네 뭐네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엉망이 된 삶이나 스파이더맨 때문에 망쳐진 사람들의 삶을 떠올리는 것은 큰 도움이 되었다. 놓아주는 법을 알아야 해. 이해해 줄 사람을 많이 잃어본 피터가 내린 결론이었다. 지금은 친구로 돌아간 사람도 있으니까, 맷도 그중 한 명으로 생각하면 되는 일이다. 홀로서기의 시간이 돌아왔을 뿐이었다.
Tingle—
벡스터 빌딩과 어벤져스 타워 중 어느 곳으로 갈지 고민에 빠져 있던 피터는 찌릿찌릿한 스파이더센스의 감각을 느끼고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도시는 완벽하게 평화로운 듯했는데 스파이더센스의 가벼운 두통이 피터의 뇌를 쿡쿡 찌르다가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스파이더센스가 멀어지고 있어? 빌딩 벽에서 가볍게 튀어 올라 바닥으로 다이빙하듯 내려오던 스파이더맨은 이내 거미줄로 제 몸을 위로 끌어올려 신호등 위에 착지했다. 보이는 것은 자동차가 가득한 뉴욕의 복잡한 도로였는데, 이상한 점은 크게 없었다.
“아, 저건가.”
신호가 초록불로 바뀌자 다시 스파이더센스가 멀어지는 것을 느끼고 피터가 감각을 쫓아 가볍게 자동차 위를 거미줄로 지나치며 센스가 느껴지는 자동차를 특정해 냈다. 얼마 전에 맷과 함께 쫓아갔던 자동차였던 것 같다. 구식 자동차가 꽤 눈에 익어서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다. 경찰인 것으로 아는데 쉬는 날이었을까. 스파이더센스가 느껴지는 것은 예전에 붙여둔 스파이더 추척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마주친 김에 떼어놓고 가야 할지 고민하던 사이에 자동차가 출발하고, 피터는 심심했던 탓에 잘 되었다며 자동차를 쫓으며 순찰을 돌았다. 낡은 자동차는 치안이 나쁜 동네를 지나쳐준 덕분에 그사이에 핸드백을 훔치려는 좀도둑을 잡아서 벽에 깔끔하게 붙여두었고, 노숙자를 치고 지나가던 버릇 나쁜 녀석도 가로등에 거미줄로 묶어버렸다. 이런 작은 소동에도 경찰이 탄 자동차는 소동을 눈치 못 챈 듯 엉망진창인 운전 실력으로 갈 길을 가고 있었다. 누가 보면 약이라도 했을 거라고 생각할 만한 엉망인 운전 실력이었는데 사고가 나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운전 실력이 나쁘다고 무작정 거미줄로 묶을 수는 없는 법이다. 피터는 찌릿찌릿한 스파이더센스를 쫓아 웹스윙을 하며 사고가 나지 않도록 주위의 차들에 손짓하거나 교통정리도 해주었다.
차선은 지키지 않았으나 신호는 잘 지켜주는 경찰의 자동차는 눈에 익은 곳에서 멈춰 섰다. 피터는 곧 그 건물이 데어데블과 함께 왔던 곳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아, 불쌍한 남자다.”
현관문을 두드리며 비련의 남자주인공을 하던 게 떠올랐다. 그때 그 여성은 마약에 정신을 잃고 있었던 걸 데어데블과 함께 발견해서 구급대원에게 넘겨주었는데, 잘 치료되었던 모양이라고 피터는 생각했다. 이번에는 문을 두드리는 대신 남성이 현관문을 열쇠로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었다. 자동차에서 추적기만 수거하자며 건물 빌딩 위에서 내려와 자동차 지붕에 앉은 피터는 작은 거미 모양의 추적기를 집어 들어 슈트 바지 안쪽에 찔러두었다. 스파이더맨과 달리 저 경찰관 아저씨는 비극으로 끝나지 않아서 다행이라며 마음속으로 그의 로맨스를 응원해 주고, 거리가 비교적 가까운 벡스터 빌딩으로 가기 위해 거미줄을 쏘기 위해 팔을 들어 올렸다.
“스파이더센스…?”
추적기는 완벽히 회수되었는데도, 머릿속의 감각이 여전히 울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따끔거리던 감각은 이제 머리통을 뒤흔들 정도가 되어 있었다. 자동차 위에 서서 남자가 들어간 집을 쳐다보던 스파이더맨은 아래로 폴짝 뛰어내리고 천천히 남자가 들어간 현관문으로 다가갔다. 그때 현관문이 벌컥 열리며 아까 들어갔던 남성이 급히 뛰어나와 스파이더맨의 어깨에 큰 소리로 부딪혔다.
“앞은 보고 다녀야죠, 경찰 아저씨!”
별로 아프진 않았던 스파이더맨이 농담조로 말하는 사이에도 남성은 잔뜩 얼굴을 찌푸리며 두 손으로 그를 밀어냈다. 눈동자가 충혈된 것이 조금 이상했지만, 피터는 일단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주었다.
“젠장, 비켜!”
스파이더맨을 알아보지도 못하고 뛰어나가는 걸 역시 잡아야 하지 않을까. 피터는 팅글거리는 감각을 느끼며 웹슈터를 쓰기 위해 다시 손을 뻗었다. 버튼 몇 번 누르면 저런 불친절한 아저씨는 쉽게 도로에 묶어 둘 수 있었다. 그 순간 작은 폭발음이 피터의 귀에 들렸다. 작은 코팅이 깨지는 그런 소리에 가까웠는데, 피터가 화학 물질 폭발 실험 따위에서 종종 듣던 것과 비슷한 것이었다. 남성이 발걸음을 빨리하며 차로 튀어가는 것을 막으려던 피터는 제 스파이더센스가 남성이 아닌 집안에서 느껴진다는 것을 깨닫고 단숨에 현관문을 뜯어내 집 안으로 들어갔다. 작은 폭발음이 점점 강해지더니 이내 천장이 무너지며 불길이 쏟아졌다. 방화범이었어? 불쌍한 남자의 로맨스가 이렇게도 비극으로 끝나다니 안타까워하며 스파이더맨은 급히 집안을 살폈다. 집에는 불이 붙을 것들이 너무 많았다. 사진도 소파도 모든 것이 다 불길을 키웠다. 아래층에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을 스파이더센스로 깨달은 피터는 천장이 무너진 틈으로 거미줄을 쏘고, 제 몸을 위로 올렸다. 불붙은 바닥 사이를 통과하면서 나무판자와 불에 그슬려 슈트가 긁히고 찢어졌지만 아픔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긴장하고 있었다. 스파이더센스는 여전히 강하게 울리고 있었고, 작은 폭발음은 계속되고 있다. 스파이더센스는 데어데블과 함께 갔던 침실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병원에서 돌아온 그때 그 여성분이 갇혀 있는 게 아닐까. 스파이더맨은 쓰러진 벽을 두 손으로 들어 올리며 제 앞을 막고 있는 것을 치워냈다. 손바닥의 장갑도 불에 그슬려 피부와 함께 녹아내렸지만 아픔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누구 있어요? 대답해요!!”
스파이더맨이 소리쳤다. 들리는 것이라고는 타닥타닥 불길에 타오르는 소리뿐이었다. 피터가 보았던 액자 속 행복한 사진들도 불에 타서 시꺼멓게 그을려 사라져가고 있었다. 스파이더센스를 따라 침실 앞으로 겨우 도착한 피터는 문을 힘으로 떼어내어 뒤편으로 던져버렸다. 스파이더센스가 더욱 심하게 요동쳤다. 방 안으로 들어가려던 피터는 구석에서 소리를 내던 것을 멀찍이서 발견하고 발을 멈췄다. 가짜 보석은 코팅된 마약이었다. 코팅이 어떤 이유로 깨지거나 부서지면 그 물질이 빠르게 튀어나올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침실 한쪽에 가방 속에서 큐빅 따위의 깨진 조각들이 튀어 오르고 있었다. 화학실험을 할 때도 온몸을 무장하고 있는데, 침실 안은 준비되지 않은 실험실이나 마찬가지였다. 방안은 온통 물질로 가득할 테고 피터는 제가 그것에 노출되었을 때의 결과를 알고 있었다.
“…으으.”
마스크를 쓰고 천천히 눈을 끔뻑이던 피터는 작은 신음을 듣고, 망설임 없이 제 발을 움직였다. 그때와 같이 침대에 누군가가 있었다. 빠르게 몸을 움직여 침대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안아 든 스파이더맨은 무작정 창문으로 제 몸을 부딪쳤다. 유리 조각을 온몸으로 막아주며 어떻게든 아래로 무사히 착지한 피터는 제 스파이더센스가 집에서 더 울리지 않는지 걱정하며, 불타오르는 집을 보았다. 스파이더센스는 이제 집이 아닌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피터가 안고 있는 사람과 피터 자신이었다.
당연히 그때 그 여성일 것으로 생각했던 피터는 구급차에 부상자를 넘겨주고 가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피터의 두 팔에 안긴 사람은 그보다도 작은 몸집을 갖고 있었다. 기껏 해봐야 10대 초중반일 듯한 소년이었다. 정신을 잃고 흐느적거리는 몸은 약에 의한 것이 확실했다. 성인도 작은 용량으로 정신을 잃는데, 아이라면…. 가까워지는 사이렌 소리가 엉망진창으로 울리기 시작하고, 피터는 아이를 한 손으로 안아 들고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거미줄을 발사하고 몸을 빠르게 움직였다. 어느 누가 비명을 지르고, 스파이더맨이라며 소리치는 게 들렸으나 피터에게는 그런 목소리 따위는 중요치 않았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가장 가까운 곳. 피터의 머릿속은 온통 그 생각으로 가득 찼다. 아이의 얕은 호흡은 피터의 불안감을 증폭시키기 충분했다. 어쩌면 방안에 뛰어든 그 짧은 순간에 약물에 노출되어서 예민해진 탓일지도 몰랐다. 구해야 해. 스파이더센스의 찌릿찌릿한 감각은 피터를 쉽게 흔들었다. 피터는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알고 있었다. 망설이거나 고민한 시간 따위는 없었다.
“조니—!”
무작정 벡스터 빌딩의 유리창에 붙은 스파이더맨이 소리쳤다. 벡스터 빌딩은 높고 층이 여럿 있었지만, 피터는 어디서 소리치고 시선을 끌어야 하는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부엌에 서 있던 조니 스톰과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도 성공적이었다.
“스파이디? 너 문을 쓰라고 수잔이 잔소리 했잖아!”
“문 열어줘! 급해!”
피터가 금방이라도 유리창을 깨뜨릴 듯 주먹으로 두드렸다. 잔뜩 표정을 찡그리며 무언가 말을 하려던 조니는 이내 스파이더맨의 손에 들려 있는 커다란 짐을 눈치챘다. 그것이 짐이 아니라 사람이고, 아직 어린 청소년이라는 걸 깨닫자 장난치는 것을 그만두었다.
“H.E.R.B.I.E. 문 열어줘!”
“네, 환영합니다, 스파이더맨.”
작은 로봇이 소리를 내며 다가와 벽면의 패널을 만지자, 스파이더맨이 붙어 있던 유리 벽에 출입문이 생겨났다. 피터는 급히 그곳으로 몸을 던지듯 들어가며 아이를 무작정 커다란 소파 위에 눕혀두고, 다른 문으로 급하게 뛰어갔다.
“야, 거미줄! 지금 매형 없어!”
“실험실은 있잖아!”
“…너 다쳤어?”
“급해, 조니!”
인사도 없이 무작정 실험실을 찾아가는 피터의 행동에 조니도 한숨을 쉬며 그 뒤를 따랐다. 판타스틱4의 벡스터 빌딩은 피터에게 아주 익숙한 공간이었다. 비록 리드의 허락 없이 실험실을 빌리는 일이 되겠지만, 피터는 그런 것을 신경 쓸 여유가 남아 있지 않았다. 조니가 무슨 일이냐고 몇 번이고 물어봤으나 대답할 정신이 사라진 피터는 다급하게 제 바지 안쪽에서 잘 싸둔 가짜 반지를 꺼내어 손에 쥐었다. 심장이 쿵쿵 크게 울려서 온몸이 커다란 심장이 된 것만 같았다. 스파이더센스가 과하게 울려서 머릿속이 아팠다가 괜찮아지길 반복했다. 불에 그을린 상처를 신경 쓸 여유도 남아 있지 않았다. 굳게 닫혀 있는 실험실 패널에 언젠가 리드가 ‘아주아주 급한 일’에만 사용하라며 알려준 코드를 입력했다. 피터에겐 이것이 정말로 아주 긴급한 일이었다. 피터의 속을 모르는 조니는 리드의 실험실을 어떻게 열었느냐는 농담을 피터의 뒤통수를 향해 날리고 있었다. 피터의 숨이 점점 거칠어지고 있었다. 마스크를 무작정 벗어 올리고 얕게 호흡을 한 피터는 어지러운 머리로 제가 해야 할 일을 차분히 해내기 위해 애썼다.
리드 리처드의 실험실은 충분한 재료와 시설을 갖추고 있었고, 필요한 것은 제정신을 가진 과학자였다.
판타스틱4가 개봉해서.. 피터 친구로 조니를 써도 이제 다들 아시겠지, 하는 것은 기쁩니다..
과연 이 이야기 언제 끝날 것인가.. 알 수 없지만 재밌게 봐주세요...(눈물
ne님의 여우x고양이 버전 맷피터가 너무 귀여워요.. 모두가 봐야함.. 귀엽습니다.. 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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