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피터] 위장결혼 - 24
🕶x🕷/소설
2025. 10. 4. 17:03
그래, 이게 피터의 삶이다. 아주 잠깐 맛본 평범하고 안정적인 삶은 결국 제 것이 아니었다. 대학생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최근의 생활은 무엇보다 친근한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딱딱한 침대, 이곳저곳을 헤매는 밤, 걱정으로 가득한 머릿속. 언제나 반복되는 패턴이지만, 익숙해지기엔 여전히 어렵다. 피터는 제 삶에 언제나 함께하는 그림자를 불행이 쏟아진 후에야 실감할 수 있었다.
피터는 뉴욕을 사랑했다. 높은 빌딩 위에서 바라보면 풍경도 끝내줬지만, 사람들 개개인이 살아가는 행적들이 저마다의 빛을 지니고 있어서 도시의 별빛처럼 빛나는 것이 좋았다. 뉴욕은 벤 파커, 메이 파커, 그리고 피터 파커—서류상으로는 성이 바뀌었지만—의 삶이 녹아 있는 도시였다. 그렇다고 해서 이곳이 모두가 살기 좋은 곳이라는 뜻은 아니다. 무엇이든 멀리서 바라볼 때 더 아름다운 법이다. 웹스윙을 하며 지나치는 도시의 마천루는 화려하고, 세련되게 빛을 냈지만, 그 아래에 놓인 삶은 또 달랐다. 피터 파커의 삶만 하더라도 그랬다. 남편이 되어준 맷이 변호사가 아니었다면 원래 살던 집의 보증금을 받기도 어려웠을 테고, 스파이더맨의 비즈니스 파트너로 찍혀서 멀쩡한 시민권이 날아갔을지도 몰랐다. 조나 제임슨이나 윌슨 피스크가 시장이 되기도 하는 뉴욕은, 강자들에 의해 뒤죽박죽 섞인 규칙들이 약자를 짓누르는 잔혹한 도시였다.
그리고 지금 피터는 다시금 이 잔인한 도시의 삶을 맛보는 중이다. 메이 파커의 진료비 명세서는 피터에게 현실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스파이더맨 활동을 할 때도 그랬지만, 피터는 병원을 가는 것을 극도로 꺼리는 편이었다. 괜찮은 직업을 갖지 않는 이상은 의료보험을 드는 것이 어려웠던 데다가, 보험이 있더라도 비용을 모두 받는 일은 더 어려웠다. 게다가 스파이더맨 활동으로 총에 맞거나, 뼈가 부러졌을 때 그것을 변명하는 것도 큰 문제였던 터라 피터는 병원을 거의 가지 않는 편을 택했다. 라이노에 의해서 빌딩에서 떨어졌던 날도, 정신이 있었더라면 병원 대신에 집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을 것이다. 갑작스럽게 유릭의 취재에 끼어든 피터를, JJJ가 데일리 뷰글의 업무로 취급해 주어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엄청나게 큰 병원비를 내야만 했겠지.
병원비 내역을 보며 피터는 입안에 차오르는 쓰디쓴 잔혹함을 삼켰다. 메이의 병원비 문제를 감당해야 하는 것은 처음이 아니고, 익숙했다. 어린 시절이었다면 명세서를 보자마자 서커스나 TV쇼라도 출연해야 하는 게 아닐지 고민했을 테지만, 자라난 피터는 금전 문제에 관해서는 익숙하게 대처할 수 있었다. 게다가 갑작스러운 작은 사고로 입원한, 메이 숙모의 의료비는 보증금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였다. 예전처럼 꾸준하게 약을 먹어야 한다거나 입원이 길어진다면 피터의 주머니 사정으로도 어찌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메이는 크게 다치지 않았고, 잠깐의 안정이 필요한 상태였다. 그리고 동거를 하기 위해서 맷이 받아주었던 보증금은 이제 메이의 짧은 병원 생활의 비용이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방을 찾는 것이 어렵게 되겠지만, 피터는 우선 당장에 필요한 것부터 해결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피터, 여긴 내가 있으마. 넌 집에 가서 좀 쉬는 게 좋겠어.”
안나가 피터의 축 처진 등을 토닥여주었다. 메이는 멀쩡해. 정신이 든 메이와 인사도 했고, 괜찮다는 말도 수없이 들었으나 피터의 마음은 쉽게 진정되지 못했다. 지금은 무척이나 건강해서 노숙자들을 위한 센터까지 운영하는 메이에게도, 한때 병원을 자주 오가던 시절이 있었다. 벤 삼촌이 세상을 떠나고 얼마 되지 않았던 때였다. 벤 파커가 강도에게 살해당하고, 피터와 메이는 암울한 시간을 견뎌내야만 했는데 피터는 그것을 스파이더맨으로 풀기 위해 노력했고, 메이는 종종 갑작스러운 충격을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곤 했다. 스파이더맨 사진을 데일리 뷰글에 팔기 시작한 것도 그 시기다. 열다섯의 피터 벤자민 파커는 어떻게든 벤 삼촌의 죽음에 책임을 져야만 했다. 강도를 막았더라면 생겨나지 않았을 불행은 피터보다도, 메이를 더욱 크게 좀 먹고 있었다. 나 때문이야. 결국 할 수 있는 일은 당장 가능한 것을 행하는 것뿐이라는 걸 알았다. 더 이상 책임을 미룰 수 없었다. 미뤘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일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행이 시작된 것이다. 스파이더맨으로도, 그리고 피터 파커로도 책임져야만 할 것들이 넘쳐났다. 이제는 너무도 익숙해서 무뎌진 것들이 쓰러진 메이를 통해 다시금 피터를 쿡쿡 찔러왔다.
메이는 지켰어야지, 피터. 꿈속의 목소리가 피터를 날카롭게 긁었다. 피터의 손바닥에는 다시 후회만이 남아 있었다.
사소한 교통사고였다고 했다. 운전자가 정신을 다른 곳에 판 사이에 바퀴는 주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고, 마당을 정리하던 메이에게 달려든 자동차는 극적으로 방향을 틀었다. 자동차와 부딪히지는 않았으나 메이는 자신을 향해 달려오던 자동차를 피하고자 노력했고, 잔디 바닥에 심하게 넘어졌다. 크게 다치지는 않았으나, 안나가 브레이크 소리에 놀라 찾아왔을 때는 메이가 이미 쓰러진 뒤였다. 그 사고를 눈으로 보지 못한 피터는 그저 메이는 멀쩡하다는 의사와 안나의 말을 그저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도 없었고 말이다. 하룻밤을 지내고서 깨어난 메이가 별것 아니라며 피터를 토닥였지만, 그래서 마음이 더 무거웠다. 피터도 그랬지만 메이도 피터에게 솔직히 말해주는 법이 없었다. 파커들의 지독한 버릇이었다. 닥터 옥타비우스가 집을 습격한 것이 아니니까 다행이야. 피터는 못난 자신을 그런 말로 애써 달랬다.
메이 숙모와 오랜 지인이자 가까운 사이로 있었던 안나 왓슨은 피터와도 오래 알아온 가까운 사이였다. 메리제인의 고모이기도 한 안나에게 피터는 몇 번이고 신세를 졌었다. 주로 메이가 쓰러지거나 아플 때, 제일 먼저 그 사실을 알아차려 주는 게 안나였다. 대학생 시절에도 집에 잘 붙어 있지 않고, 밖으로 나도는 자신을 대신해서 안나나 메리제인이 숙모를 살펴주었던 것을 기억하는 피터는 더 이상 신세를 늘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대학 시절에는 스파이더맨 일로 메이 숙모를 혼자 두더니, 졸업한 지금도 비슷했다. 무엇도 달라지지 않은 것만 같다. 침대 옆에 놓인 간이 의자에 앉은 피터는 스멀스멀 기어올라 숨통을 쥐는 죄책감을 애써 모르는 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숙모가 찾으시면 꼭 연락주세요.”
“그래, 그러마. 메이도 자는 것뿐이니까, 피터 너도 들어가서 쉬렴. 며칠이나 병원에만 있었잖니.”
쉬지 않으면 나중에 메이가 크게 걱정할 것이라며 안나가 피터의 등을 떠밀었다. 피터가 밤과 새벽에 몰래 병원 밖을 나가서 코스튬 차림으로 뉴욕을 헤매고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안나는 피터가 요 며칠을 계속 메이의 곁에서 보냈다고 생각했다. 새벽 동안 순찰을 돌다가 메이의 옆으로 돌아오니까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지만…. 피터는 결국 고개를 끄덕이고 간이 의자에서 일어났다. 메이는 진정제를 맞고 잠이 들었을 뿐인데, 피터의 마음은 너무도 무거워져서 발걸음까지 느리게 만들었다. 이것은 책임감의 이름을 가진 죄책감이었다. 피터, 너에게 실망했다. 약에 취했을 때 들려오던 말소리가 피터의 어깨를 툭툭 두드리고 있었다.
집에 들어가서 쉬라는 안나의 말에도 피터는 발걸음을 떼기가 어려웠다. 결국 갈 수 있는 집은 ‘메이가 없는 메이의 집’이나 ‘맷의 집’이었는데, 이 기분으로 맷에게 가서 위로받고 싶지도 않았다. 메이를 살피고 스파이더맨을 하고, 다시 메이의 곁에 시간을 보내는 며칠을 보내면서 피터는 제 삶을 돌아보았다. 무엇하나 온전히 해낸 것 없이 겨우 유지하는 삶으로 다시 또 누굴 망치려고 하는 걸까. 맷이 주던 안정감을 떠올리니 더더욱 돌아갈 수가 없었다. 혼자가 아닌 침대 위에서 온기를 느끼며 잠에 들고, 깨어나는 일에 너무나 익숙해져 버렸다. 피터가 입원했을 때도 맷은 병원에 들러 잠을 자고, 출근했었다. 그런 안정에 매달릴수록 결말이 참혹하다. 오랜만에 병원 간이침대에서 홀로 잠을 자는 나날을 보내며 피터는 ‘진짜 피터의 삶’에 대해 생각할 수 있었다. 많은 이들의 삶에 스파이더맨이라는 얼룩을 남겨주었고, 또다시 그런 잘못을 반복하게 될지 두려워졌다.
난 그런 걸 받을 자격이 없어. 꿈속의 목소리가 피터 자신의 목소리가 되어 돌아왔다. 병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알지만 괜히 병실 근처를 걷던 피터는 결국 비상계단으로 향했다. 사람들을 구하자. 피터가 당장의 감정을 해소할 방법은 그것밖에 없었다. 메이는 그저 놀라서, 넘어진 충격으로 조금 다쳤을 뿐이니까. 피터는 자신을 스스로 달래기 위해서 다시 마스크를 썼다. 스파이더맨이 되는 것말고는 지금의 이 기분을 풀어낼 방법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것만 같았다.
피터가 집에 들어오지 않은 지 일주일이 지났다. 메이의 입원 소식에 피터는 곧장 병원으로 가버렸고, 맷에게 메이는 괜찮지만 바로 퇴원은 할 수 없다는 소식을 전화로만 알려주고 그대로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오늘도 집 계단을 오르며 피터가 없음을 알아차린 맷은 담담한 태도로 현관문을 열었다. 평소라면 피터가 소파에 앉아 있거나 부엌에 서서 우유를 마시거나, 그도 아니라면 천장에 붙어서 퇴근한 맷을 반겼을 태지만 오늘도 집에는 적막만이 깔려 있었다. 문의 잠금장치를 걸고, 집 안으로 들어온 맷은 정장 재킷을 벗어 옷걸이에 걸고, 선글라스를 벗어 테이블에 올려두었다. 집이 조용하니 다시 감각은 시끄러운 곳으로 향한다. 집 밖의 사이렌, 사람들의 웅성임 따위의 소음이 귓가에 닿았다가 다시 집안으로 돌아왔다. 뚝뚝 떨어지는 욕실의 물방울, 냉장고에서 새어 나오는 우유 냄새, 피터의 방에서 스며 나오는 익숙한 라임 향기.
“피터?”
소파에 앉으려던 맷은 우유가 유통기한이 다 되어간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피터의 방에서 나는 향기가 어제보다 진해졌다는 사실도 알았다. 피터가 다녀간 모양이었다.
무언가 두고 간 게 있었을까. 있었다면 연락을 해주었으면 메이가 입원한 병원이나 퀸즈의 집까지 가져다줄 수도 있었을 텐데, 지나가던 길이었던 걸까.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라서 잠시 입술을 꾹 다물었다가 작은 한숨을 뱉은 맷은 피터의 방 앞에 섰다. 방에는 피터와 함께 가구시장에서 산 중고 책상 하나와 책장 정도가 놓여 있을 뿐이고, 아직 옷장도, 필요한 다른 물건들은 사두지 못했다. 책상 위에는 피터가 거미줄 용액을 만들 때 쓰는 물품과 화학용품이 놓여 있었고, 피터는 종종 새벽에 홀로 일어나 방안에서 거미줄 용액을 만들곤 했다. 제때 만들어두지 않으면 필요할 때 다 떨어져서 골치 아파진다며 이것만큼은 꼭 까먹지 않아야 한다던 피터의 목소리가 선명히 떠올랐다. 피터는 왜 조용히 다녀간 걸까. 피터의 책상 앞에 선 맷은 책상을 손바닥으로 가만히 쓸어보다가 무언가 달라진 점을 기억해 냈다. 거미줄 용액을 만드는 도구들이 사라진 상태였다.
거기에 피터가 여분으로 두던 스파이더맨 코스튬이나 피터가 제 방에 던져두었던 티셔츠 몇 벌도 보이지 않는다. 맷의 것이었으나 피터가 제멋대로 잠옷으로, 혹은 거미줄 용액을 만들 때 입는 작업복으로 써버린 티셔츠였다. 굳이 그것에 대해 지적하지 않았던 매튜는 이제 그 몇 벌의 티셔츠마저 사라졌다는 것을 깨닫자 어쩐지 허전한 기분이 들었다. 몇 장의 티셔츠가 사라졌다고 해서 맷의 옷장에 입을 것이 없는 것도 아니었고, 피터가 제멋대로 옷장을 뒤져서 셔츠를 빌려도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그냥, 피터가 빌려 갔을 뿐이야.
어차피 가져갈 것이면 맷의 옷장에서 필요한 것을 더 가져가도 되었을 텐데, 피터의 체취는 피터 본인의 방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것을 감각으로 알아차린 맷은 곧 방구석에 두고 있던 상자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피터가 집에 들어올 때 가지고 왔던 낡은 상자. 아마도 거기에 다시 물건들을 담아 가져간 모양이었다. 영영 나갈 생각인 걸까. 서운함이 먼저 차올랐지만 맷은 애써 그런 마음을 꾹 눌렀다. 메이 파커가 병원에 입원했고, 피터는 그녀를 간병하느라 바쁠 것이다. 가족 문제에 예민한 피터를 잘 알고 있는 매튜는 말도 없이 짐을 들고 나간 피터를 탓하기보다는 그저 기다리는 편이 낫다는 걸 알았다. 어차피 피터라면 여유가 되면 다시 또 멋대로 집에 들어와서 우유를 훔쳐 마시거나 소파나 침대에서 쉬고 있을 테니 말이다.
“책상도 가져가지….”
거미줄 용액 냄새가 밴 책상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맷이 중얼거렸다. 그랬다면 커다란 가구가 사라졌다는 핑계로 피터에게 전화를 걸거나 물어볼 수도 있었을지도 몰랐으나, 피터가 챙겨간 것들은 너무나 작고 사소한 것들이었다. 피터가 맷에게 바라는 것이 딱 그 정도라는 뜻이기도 했다. 법적인 문제를 가져오고, 멋대로 냉장고를 열고, 소파를 빌리고, 티셔츠를 빌리지만 그뿐이었다. 더 부탁해도 괜찮은데도 피터의 방식은 늘 그랬다. 결국 맷이 할 수 있는 일은 가능한 것을 해주고, 피터가 멋대로 빌려 가는 것을 무심히 넘기는 일이다. 피터는 여전히 반지의 의미를 모르는 게 분명해. 맷이 힘없이 웃었다.
피터에게 반지를 끼워준 것은 정말로 그를 책임질 생각으로 한 행동이었다. 더 이상 결혼생활을 유지할 필요가 없었으나 굳이 피터에게 그만두자는 말을 하지 않은 것도 그래서였다. 할 수 있는 걸 해주었고, 지킬 수 있는 걸 지켜줄 뿐이다. 피터가 사라진 후의 집안의 공기가 어쩐지 무거워진 것을 느낀 맷은 얼른 코스튬으로 옷을 갈아입고, 데어데블을 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메이 숙모는 멀쩡하시고, 건강하시다. 그 사실을 머리로는 이해하지만, 여전히 마음이 무거운 피터는 스파이더맨에 집중하기로 했다. 사람들을 구하고, 구하다 보면 또 괜찮아질 것이다. 다 망치는 삶이니 다 구하다 보면 나아지겠지. 피터의 해결책은 언제나 그런 법이었다. 파커럭이 얼굴을 뭉개고 뒤통수를 때려도 괜찮다며 웃을 수 있는 피터는 메이의 일 앞에서는 침착할 수 없었다. 그냥 제 앞에만 불행이 닥치면 좋을 텐데, 왜 메이까지 그렇게 되는 걸까. 피터는 언제나 제 삶을 돌아보곤 했다. 결국 그 끝은 이기적이었던 어린 시절의 제 모습에 닿아서, 그 결과가 이것이라는 결론으로 이어졌다. 메이의 삶을 망친 것은 결국 피터였다. 그때 강도를 잡았더라면, 이기적으로 굴지 않았더라면,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수많은 후회의 말은 버릇처럼 피터의 목구멍을 꾹 막았다가 이내 삼켜졌다. 내뱉어보았자 달라지는 것은 없음을 피터는 오랜 시간을 통해 깨달았고, 이런 후회도 덧없다는 걸 알았다. 열다섯 피터 벤자민 파커는 이제 곧 서른을 앞둔 어른이었다. 그 말은 곧 스파이더맨이 뉴욕에 거미줄을 치고 살아간 지 십 년은 족히 넘는다는 말과 같았다.
스파이더맨과 피터 파커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벌써 수년째 두 가지를 한꺼번에 하고 있는 피터는 여전히 웹슈터 용액을 만드는 것을 종종 잊어버리거나, 찍은 사진을 현상해 두는 것을 까먹어버리곤 했다. 무엇 하나라도 제대로 해야 하는데 결국 그 생각 때문에 어느 것 하나도 제대로 마무리하지 못하는 게 피터의 삶이었다. 하루 종일 스파이더맨을 하다가 메이의 곁에 돌아와서 메이와 이야기를 나누고, 숙모가 안정을 취하시는 동안 다시 자리를 비웠다가, 다시 돌아와 그 곁에서 잠을 청하는 게 요 며칠 피터의 생활 방식이 되었다. 병원에서 잠드는 것이 여전히 익숙지 않은 피터는 딱딱한 간의의자나 침대에서 저를 탓하던 목소리를 떠올리곤 했다. 그러다 보면 다시 잠은 사라지고 얼른 또 누군가를 도와야 한다는, 쉬어서는 안 된다는 책임감이 끓어올랐다. 잠이 모자라서 무거운 눈꺼풀을 끔뻑이며 빌런은 없을지 둘러보지만, 뉴욕은 평화롭고 즐거워 보였다. 필요할 때는 꼭 이런 식이지. 악당 하나 보이지 않아도 도울 사람은 넘치는 도시에서 스파이더맨은 쉬는 대신에 계속 도울 누군가를 찾는 것을 택했다.
바쁘게 살아보려 하면 언제나 무언가가 부족해진다. 피터는 바지에 손을 넣어 허리벨트를 더듬어보다가, 여분으로 만들어둔 웹슈터 카트리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병원과 스파이더맨을 오가던 결과였다. 잠깐의 쉬는 시간마저도 스파이더맨 활동으로 채워버렸으니 거미줄 용액 만들기가 끼어들 틈이 없었다. 허리 벨트에 웹슈터 카트리지를 든든하게 채워두어야 했는데, 요 며칠간 그럴 생각도 하지 못했다. 권총은 있는데, 총알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다. 남은 거미줄의 양을 짐작해 보며 피터가 작은 한숨을 푹 쉬었다.
“맷은 출근했으려나….”
웹슈터 용액을 아끼기 위해 지하철 위에 붙어 이동한 피터는 맷의 집에 들렀다. 거미줄을 만들려면 비커 몇 개와 화학용품이 필요했는데 그것들은 모두 맷의 집에 있었다. 메이가 입원하고 맷의 집에 들리지 않았음을 그제야 깨달았다. 그 정도로 거미줄 용액을 안 만들었는데, 아직까지 남은 것이 있다는 게 기적이다. 거미줄로 감아줄 악당이 얼마 없는 도시 덕분이었다. 꼭 필요할 때만 뉴욕은 지독하게 조용하다. 빌런을 때리고, 그 주먹에 맞으며 잠깐의 일탈을 즐기고 싶다고 생각하면 피터의 운수는 오히려 그 반대의 것을 내밀곤 했다. 지독한 고독과 침묵. 그 정적을 채우는 것은 결국 죽은 이들의 목소리였다.
언제나 맷과 함께 들어가던 현관문 대신에 창문을 택했다. 스파이더맨 코스튬을 입을 채로 이웃들과 인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잠깐 들러서 거미줄 용액만 만들고 가겠다며 연락하는 것도 이상했다. 그냥 필요한 것만 들고 나가서 다시 스파이더맨을 하다가 메이 숙모를 보러 갈 생각이었다. 그렇게 거미줄 용액에 필요한 도구들만 챙기고 가자고 생각하던 것이 며칠째 입던 티셔츠를 갈아입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이어지고, 결국 상자에 필요한 것들을 이것저것 넣는 것으로 바뀌었다가, 결국엔 다시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고민과 걱정으로 이어졌다. 익숙해진 생활에서 멀어지자 다시금 현실이 피터를 일깨운 탓이었다.
맷의 삶을 망치면 어쩌지.
낡은 상자에 필요한 것들을 모두 담아서 들고 나오는데, 침실 너머로 보이는 고급스러운 침대를 보니 피터의 마음이 다시 울렁였다. 푹신하고 부드러운 침대. 맷과 피터의 삶은 너무나 다르다. 가끔 멋대로 들어와 우유나 훔쳐먹는 것은 아무렇게나 할 수 있었으나, 계속 침대를 빌리며 맷의 옆에서 온기를 빌리고 있는 것은 양심을 찌르는 행동이었다. 그러다가 삐끗하면 데어데블의 평범한 삶까지 망쳐버릴지도 모른다. 균형을 잘 유지하는 맷을 따라해보려 애쓸수록 느끼는 것은 결국 피터의 삶은 그렇게 되기 힘들다는 결과였다. 메이 숙모를 지키고 싶다는 고집에 어울려서 위장결혼을 해준 맷에게 피터의 삶까지 함께해주길 바랄 수는 없었다.
결국 낡은 상자를 들고 퀸즈의 집으로 가자는 생각으로, 피터는 다시 지하철 위에 붙어 앉아 있었다. 스파이더맨 코스튬을 입은 채로 지하철을 제대로 탈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웹슈터 카트리지는 하나 정도밖에 없던 터라 방법이 없었다. 나중에 누군가가 사진을 찍어 데일리 뷰글에 제보하면 공짜로 지하철을 타는 스파이더맨이라며 조나가 기사를 내겠지만, 어쩌겠는가. 피터는 그런 작은 오명 정도는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뷰글의 선동 기사는 익숙했고, 그 기사에 일조하며 메이의 병원비와 약값을 벌었던 것도 피터 본인이었다.
지하철 위에 거미 능력으로 찰싹 붙어 퀸즈로 향하던 피터는 빌딩 사이로 스멀스멀 올라오는 먼지를 발견하고 작게 한탄했다. 화재로 인한 연기는 아니었고, 빌딩이나 무언가가 부서지며 날리는 흙먼지에 가까워 보였다. 힘이 강한 악당이 나타났다는 뜻이다. 꼭 껴안고 있던 낡은 상자를 대충 지하철 선로 옆에 거미줄로 붙여두었다. 나중에 다시 찾으러 왔을 때 제자리에 있어야 할 텐데. 거미줄 범벅이 된 낡아빠진 상자를 잠시 마스크 렌즈 너머로 응시하다가, 재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스파이더맨이 필요한 곳이 있었다.
“꼭 필요할 땐 없다가 이럴 때 나타나더라….”
파커의 운수는 언제나 이런 식이다. 좋은 일이 한 번 일어나면 나쁜 일이 생기고, 다시 또 나쁜 일이 뒤통수를 후려친다. 이젠 머독의 운수인 걸까 장난스럽게 생각해 보며 피터는 도심을 엉망으로 만드는 라이노의 앞에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빌런다운 빌런을 만난 것은 마스크를 쓰고 하루 종일 스파이더맨을 하고 다닌 지 일주일만이었다. 처음부터 만났으면 온 힘을 다해서 싸우고, 지친 채로 잠을 충분히 잘 수 있었을 것이다. 잠이 들 이유를 찾지 못한 피터는 제 삶을 돌아보는 시간을 갖느라, 병원의 이런저런 소음을 듣고 있느라 작은 잠도 조각냈었다. 피곤함에 젖은 몸이 둔하긴 했으나 싸우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오히려 힘을 쓸 수 있는 상대를 만났다는 것에 은근한 기쁨까지 들었다.
“코뿔소도 신호를 지켜야 하는 거 아니야?”
쏟아지는 피곤을 애써 누른 스파이더맨이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스파이더맨…!”
자동차를 밀어내며 잔뜩 화가 난 라이노가 소리쳤다. 강도질하려고 했던 모양이지. 이미 익숙한 레퍼토리 앞에서 스파이더맨은 가볍게 폴짝 뛰어올라 제게 달려드는 라이노를 피했다. 마약 제조를 하던 회사 빌딩 위에서 만난 게 마지막이었으니 싸울 이유는 충분했다. 게다가 신호도 지키지 않고 도로를 어지럽히고 있었으니, 스파이더맨이 나서야지. 뒤집혀 불이 난 차량을 슬쩍 돌아보며 스파이더맨은 재빠르게 몸을 움직여 라이노에게 자동차를 번쩍 들어 던졌다. 비록 자동차 차주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당장 라이노를 막는 게 우선이었다. 혹시나 라이노가 흥분해서 공짜 핫도그를 주던 트럭을 뒤집기라고 하면 면목이 없었다.
자동차를 드는 것은 조금 힘들긴 하지만 어려운 일은 아니다. 온몸의 근육에 힘을 주고, 자동차 아래에 깔리지 않도록 두 팔과 복근을 단단히 하고서 번쩍 들어 올린다. 방사능 거미에게 물려 힘이 강해진 스파이더맨에게는 간단한 일이었다. 하지만 뉴욕에 신체 강화 인간들이 많다는 게 문제다. 라이노는 자동차를 정면으로 얻어맞고도 벌떡 일어나 달려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남은 웹슈터 용액을 쏟아부어서 거미줄로 묶어두면 될 것이다. 피터는 허리 벨트에서 남은 웹슈터 카트리지를 모두 꺼내어 손에 쥐었다. 아무리 라이노라고 해도 거미줄 카트리지가 폭발하며 생겨나는 무수한 거미줄을 끊어내지는 못할 테지. 비싼 외제차를 들이박고 저를 날카롭게 노려보는 라이노를 향해, 스파이더맨이 망설임 없이 달려갔다.
관계가 끝난 게 아니야. 데어데블 차림으로, 밖으로 나서서 주먹을 꽉 쥔 맷이 제 머릿속을 향해 말했다. 맷 머독의 삶에서 떠나간 이들은 이따금 다시 돌아오긴 했으나 오래 있어 주진 않았다. 맷에게 실망한 탓이었다. 포기와 유릭이 피터를 걱정하는 이유가 있었다. 맷 머독을 너무 잘 아는 이들은 맷과 연관되었던, 사랑했던 이들의 결말을 잘 알고 있었다. 완전한 실망과 이별. 어쩌면 피터도 그렇게 되어버릴지도 모르지. 맷은 제멋대로 흘러가는 생각을 막기 위해 주먹을 휘둘렀다.
“자, 잘못했어…!”
데어데블의 주먹 앞에 무릎 꿇은 강도가 외쳤다. 제발, 살려줘. 누가 악당이고, 영웅인지 알 수 없게 만드는 애원은 데어데블의 귓속에서 그저 무수히 많은 소음 중 하나가 되었다. 악인의 애절한 목소리는 매튜의 양심을 찌르기엔 너무도 얄팍하고 덧없다. 진실과 거짓을 쉽게 판단할 수 있는 데어데블에게는 갑자기 짜낸 목숨 구걸 따위는 그저 뭉개질 뿐이었다. 너무 많은 것이 뒤섞이면 결국 무엇하나 제대로 알 수 없어진다. 맷에게 뉴욕은 그런 곳이었다. 너무 많은 정보가 뒤섞여서 결국 무엇도 알 수 없어진 채로 엉망이 되어버린 도시. 예민한 감각은 눈앞의 강도를 넘어서 헬스키친 곳곳을 누비고, 데어데블이 필요한 곳을 제멋대로 감지해 냈다. 빌리클럽을 손에 쥐고 강도를 기절시킨 맷은 와이어를 던져 땅에서 날아올라 건물 사이를 가로질렀다. 스파이더맨과 농담을 주고받으며 가벼운 마음으로 다녔던 거리는 이제 시끄럽고 복잡하고 엉망인 곳으로 변해 있었다. 이게 원래 맷이 보는 도시였다. 맷 머독의 뉴욕은 언제나 엉망이고, 시끄럽고, 냄새가 나며, 불공평하다. 정의가 사라진 도시는 언제나 짓밟히는 약자들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을 바로잡을 방법은 결국 법과 폭력뿐이었다.
혹시나 피터가 헤어지고 싶다고 말하면…. 너덜너덜해진 주먹을 가볍게 털며 머릿속으로는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따금 누구도 하지 않은 말을 제멋대로 상상해 내는 맷의 불안은 오늘도 제 할 일을 찾아냈다. 동거를 시작하고 피터는 언제나 집에 돌아왔다. 하루이틀 기절해서 들어오지 못하는 일이 있긴 했으나 결국엔 집에 왔다. 피터는 다시 돌아와 줄까? 피터를 잘 알지만, 동시에 완벽하게 알지 못하는 맷은 피터가 이혼을 제시할 가능성도 제멋대로 상상해 냈다. 혼인무효소송도 존재했고, 굳이 이혼이 아니어도 피터가 다시 피터 파커로 돌아갈 방법은 있었다. 피터가 원한다면 그렇게 해야겠지. 맷은 어쩐지 씁쓸해진 입안을 혀로 훑었다. 계속 같이 있어도 괜찮다고 말하고도 싶었으나 부담을 주고 싶지도 않았다.
[스파이더맨은 재앙입니다!]
누군가의 휴대전화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익숙하다. 맷은 곧 그 목소리가 데일리 뷰글의 편집장 조나 제이머슨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신문으로는 되지 않는다며 인터넷 방송까지 진출을 꿈꾼 조나는 여전히 ‘뉴욕의 골칫덩이 스파이더맨’을 주장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었다. 주먹을 휘둘러도 괜찮을 악당을 찾아 다시 자리를 옮기려던 맷은 JJJ의 앙칼진 목소리에 미간을 찌푸렸다가, 다시 그 내용에 집중했다. 스파이더맨이 건물을 파손하고, 차량을 부쉈다는 이야기는 언제나 있는 말이다. 아마도 빌런과 싸우느라 미처 신경 쓰지 못하고 주변을 엉망으로 만들었던 것이겠지. 스파이더맨이 빌런을 해치우고, 사람들을 지켰다는 사실보다 그 과정에서 발생한 피해 금액을 중요시하는 이들의 시선은 중요치 않다. 그런 사사로운 것을 신경 쓰지 않는 데어데블은 스파이더맨인 좋은 사람인 것에 집중할 뿐이었다. 피터는 언제나 옳은 일을 하기 위해 애쓸 뿐이다. 맷은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피터를 지켜주고 싶었다.
맷의 신경을 거슬리게 한 것은 그런 피해 금액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경찰이 스파이더맨을 체포하려고 시도했다는 부분이었다. 스파이더맨의 수배령은 내려갔고, 굳이 문제가 있다면 ‘정체불명의 자경단원’ 활동은 여전히 금지되어 있다는 부분이지만, 그렇다면 데어데블도 마찬가지로 체포되어야만 했다. 경찰은 암묵적으로 시민을 지켜주고, 제 일거리를 줄여주는 불법 자경단원을 못 본 체해주고 있었고, 스파이더맨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야만 했다. 조나의 격앙된 목소리는 지쳐 있던 스파이더맨에게 총알이나 날리다가, 결국 수갑조차 채우지 못한 경찰관을 탓하고 있었으나, 데어데블은 그 정보에서 스파이더맨이 총에 맞았다는 사실을 건져 올렸다.
피터는 아프고, 외로울 거야. 도움이 필요해.
때릴 누군가를 찾으려던 맷의 감각은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피터의 체취, 심장 소리, 아무튼 살아 있는 어떤 신호를 찾는 것으로 목적이 바뀌었다. 스파이더맨은 도망쳤다. 언제나 그렇듯이 스파이더맨은 부당한 대우에 변명하거나 화를 내는 대신에 도망이라는 선택을 했다. 그런 피터가 어디로 갔을까. 피터가 제 몸을 뉠 월세방은 존재하지 않았고, 메이 파커의 집은 너무나 멀었다. 병원으로 갔을 리는 없다. 메이를 걱정시키는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는—두려워하는— 피터의 성격으로는 그 몸으로 메이 파커의 앞에 설 수 있을 리가 없을 터였다.
제멋대로 들어가서 약이나 물건을 꺼내어 쓰고, 잠시 눈을 붙여도 괜찮은 곳. 피터가 갈 수 있는 거리에 살고 있는 가까운 동료들도 떠올려보던 맷은 곧 피터가 있을 법한 장소를 유추할 수 있었다. ‘집’이었다.
진통제 몇 알과 잠. 피터는 마법 같은 주문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아픈 상처도 그 앞에서는 곧 사라지고 만다. 무거운 몸을 쉬지 않고 움직여 건물 옥상을 뛰어서 넘어가는 스파이더맨이 이곳저곳에서 목격되었으나, 경찰은 쫓아오지 못했다. 거미줄이 없는 스파이더맨이라지만 그를 쫓으려면 헬리콥터 정도는 준비해 오는 철저함이 필요했을 테지만, 오늘의 경찰은 그 정도의 준비성은 없었다. 그냥 정말 놀라서 쏜 모양이다. 거미줄에 엉망진창으로 묶인 라이노 대신에 저를 향한 총구를 보면서도 침착했던 스파이더맨은 등에 구멍이 난 지금도 침착하게 그저 상대를 이해했다. 자동차를 들어 올려 사람에게 던지는 걸 보면 누구라도 무서울 거야. 그 상대가 비록 마약 생산을 주도하든 회사에서 경비를 서든, 지금은 뉴욕의 도로를 부수고 있던 라이노라고 할지라도 말이다. 오랜 스파이더맨 활동은 피터의 이해심을 늘려주었다.
데일리 뷰글에서 정말로 스파이더맨의 약점이 등이라고 보도한 적이 없는지 찾아봐야 할지도 모른다. 손이 닿기에는 애매한 등판에 총알이 두 개쯤 박힌 피터는 몸을 움직일 때마다 느껴지는 통증에 얼굴을 찌푸리다가도 농담처럼 생각했다. 라이노에게 남은 카트리지를 모두 써버렸고, 남은 것은 겨우 몇 가닥의 거미줄이었다. 손을 들라며 자연스럽게 총구를 제게 향하는 경찰의 태도는 익숙하다. 저러다가 상황을 파악하면 곧 스파이더맨은 놓아주거나, 혹은 다른 사건이 있어서 가버리는 게 평소의 패턴이었다. 스파이더맨을 진심으로 미워하고 증오하는 경찰은 그리 많지 않을 게 분명한데, 오늘은 좀 달랐던 게 문제다. 경찰에게 협조적으로 두 손을 번쩍 위로 올려준 피터는 제 머릿속의 경고음이 계속 울리는 것을 느꼈다. 라이노와 싸우는 중에도 계속 머리통이 울렁였던 터라 이 정도의 작은 경고음은 자주 무시하곤 했던 게 문제다. 라이노에게서 느껴지는 것인가 싶어서 잠시 뒤를 돌아본 순간에, 그것을 도망인지 혹은 위협으로 생각한 것인지 방아쇠를 당겼다. 한 번은 곧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된다. 총알 한두 개는 무거운 몸으로도 쉽게 피할 수 있었으나 여러 발은 아무리 스파이더맨이라고 해도, 지친 몸으로 모두 피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게다가 거미줄도 몇 가닥이 없어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거미줄 한 가닥을 뻗어서 그 현장을 도망치는 게 전부였다. 날개뼈 아래로 푹 파고드는 총알 하나, 그리고 어깨에 느껴지는 강한 통증. 거미줄을 놓치고 도로로 처박힐 뻔했으나 겨우 거미줄을 놓지 않은 스파이더맨은 건물의 옥상으로 도망쳐서, 두 발로 뛰어올라 건너편의 건물 옥상으로 도망치고, 다시 또 그렇게 뛰고 뛰었다. 평소에 거미줄을 제대로 보충해 두어야 했다는 후회를 하기에는 이미 늦은 뒤였다.
며칠째 세탁도 못 한 스파이더맨 슈트가 축축해졌다. 아무리 유연해도 등에 손을 뻗을 수 없어서, 쏟아지는 통증에 몸을 웅크렸다. 축축한 느낌이 등을 타고 엉덩이까지 간지럽히고 있었다. 아마도 피가 흐르는 게 분명하다. 총에 맞아본 경험이 여러 번 있는 피터는 침착하게 상황을 판단했다. 그냥 몇 발 맞았을 뿐이고, 피곤해서 둔해졌을 뿐이다. 몸에 박힌 총알이 신경을 누르고, 상처를 더 넓히며 피터의 판단을 조금 흔들어버리긴 했으나 아픔에 익숙한 스파이더맨은 그런 통증마저도 익숙하다며 넘겨버렸다.
아파. 잠깐 쉬고 싶어. 아주 잠깐만.
한 번 솟아오른 욕망은 죽을 줄을 몰랐다. 아프고, 쉬고 싶고, 눕고 싶고, 자고 싶다. 쉬지 않고 쏟아지는 욕망 앞에서 피터는 그럴 자격에 대해서 되물어보다가, 제 발 아래를 보았다. 서 있던 자리는 스파이더맨의 발자취처럼 붉은색 발자국이 남아 있었다. 이대로 또 다니다가는 다시 도시에 페인트칠하고 다니는 스파이더맨이라며 한 소리를 들을 게 분명했다. 잠깐 옥상 구석에 웅크려서 숨을 고르다가, 잠깐만 눈을 붙였다가 움직일까. 헬기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으로, 그리고 스파이더센스가 울리지 않는 것으로 안전하다고 판단한 피터는 당장의 충동 앞에서 망설이고 있었다. 그러다 문뜩 보인 것이 두 손이었다. 라이노를 때리던 사이에 장갑이 일부 찢어져서 손이 드러난 장갑. 피터는 문뜩 끼고 있던 반지가 생각이 나서 다급하게 장갑을 찢을 듯 벗었다. 맷이 끼워준 반지를 혹시라도 부숴 먹었다면 데어데블을 볼 면목이 없다. 장갑을 벗고 뻗어본 왼손에는 여전히 맷이 끼워준 결혼반지가 멀쩡히 빛을 내고 있었다. 조금 붉게 물들긴 했지만, 피니까 그냥 씻어내면 될 것 같았다.
“…매티.”
피터의 몸이 그냥 충동적으로 움직였다. 그냥 조금만 쉬고 싶다. 아주 잠깐만. 맷의 집까지는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문제는 거미줄이 부족해서 건물 사이를 두 발로 뛰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평소보다 두 배는 시간이 걸려서 피터는 낮에 들렀던 맷의 집에 겨우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창문을 열고 몸을 던지듯 안으로 쑥 내밀어서 바닥에 엎어져서 잠시 누워 있다가, 겨우겨우 다시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바닥에 붉은 칠을 해버려서 나중에 또 닦아야 할 텐데 하는 생각을 하면서, 피터는 마스크를 벗어 바닥에 대충 던져두고 구급상자를 찾았다. 진통제에 붕대. 약통을 열어 손에 알약을 쏟아내고 그것을 가득 쥐고, 냉장고를 열어 우유를 꺼냈다. 몇 알이든 약을 가득 입에 머금고 남은 우유로 그것들을 목구멍 안쪽으로 넘겨버린 피터는 제 발아래에 찍힌 발자국을 발견하고, 부엌에 웅크려 앉았다. 맷은 데어데블을 하러 나간 모양이다. 아니면 늦게까지 야근할지도 모르지. 메이 숙모 일로 정신이 팔려서 맷과 연락하지 않은 피터가 할 수 있는 일은 그런 추측밖에 없었다.
“…잠깐만 빌릴게요, 맷.”
무릎을 세워 부엌에 웅크려 앉은 피터는 잠시 눈을 감았다. 진통제를 가득 삼킨 몸은 통증을 그나마 잊는 듯했고, 총알로 생겨난 구멍은 짧은 꿈에 빠져 있는 사이에 사라질 것이다. 피터는 제 몸을 잘 알았다.
맷이 집에 도착하기도 전에 알아차린 것은 짙은 피 냄새였다. 스파이더맨의 행적을 따라 남은 피 냄새는 맷에게 무엇보다 명확하게 피터의 부상과 위치를 알려주는 신호가 되었다. 열려 있는 창문 사이로 몸을 넣어 집 안으로 들어온 맷은 두근두근 뛰는 심장 소리를 발견했다. 소파나 침대에서 편하게 있으면 좋았을 텐데, 피터는 부엌 테이블 옆쪽에 웅크려 앉은 채 잠이 들어 있었다. 스판덱스 슈트도 여전히 입고 있다. 데어데블 슈트의 장갑을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둔 맷은 몸을 숙여 피터의 상처 언저리에 손을 올렸다. 총알 두 개, 긁힌 상처 조금, 타박상이 심하다.
“피터, 여기서 자지 마.”
맷이 바닥에서 잠든 피터를 번쩍 들어 올렸다. 침실로 피터를 옮긴 뒤에 스파이더맨 슈트를 벗겨내고, 소독약과 핀셋, 구급상자를 챙겨오는데 그 사이에도 피터는 피곤했는지 눈을 뜰 생각이 없었다. 상처를 핀셋으로 들추면 아플 테니까 술이라도 하겠느냐 묻고 싶었으나, 피터는 술을 하지 않았다. 차라리 현실과 꿈의 경계를 헤매는 동안 빠르게 끝내는 게 낫다. 주로 나이트너스에게 상처를 치료받지만, 이따금 스스로 제 상처를 대충 마무리 짓곤 하는 맷은 익숙하게 도구를 소독해서 피터의 피부 안쪽에 박힌 총알을 끄집어냈다. 피터는 상처가 벌어지는 통증에 신음하며 두 손으로 시트를 꽉 붙잡으며 작게 신음을 흘렸다. 통증은 꿈에서 현실로 빠르게 복귀 시켜주는 무엇보다 빠른 교통수단이었다.
등에서 느껴지는 통증에 몸을 움직이려던 피터는 꽉 붙잡는 맷의 단호한 손에 그저 신음을 침대 시트에 꾹꾹 눌러 보낼 수밖에 없었다. 피에 젖은 총알 두 개. 제 등판에서 나온 핏빛 쇠붙이를 잠시 물끄러미 보던 피터는 이내 맷의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피터의 어깨와 등에 붕대를 감아주는 내내 맷은 말이 없었다. 왜 갑자기 맷이 집에 돌아와 있고, 왜 본인이 침대로 옮겨졌는지 알 수 없는 피터는 손만 꼼지락거리며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어색한 침묵. 동거하는 중에는 없던 이상한 분위기였다.
결국 이 침묵을 견디지 못하는 쪽은 피터였다.
“이불에 피가 묻으면 잘 안 지워지는 거 알아요?”
언제나처럼 가벼운 농담을 던졌다. 흰 시트와 이불에 피가 묻으면 얼마나 고생하는지. 룸메이트와 사는 동안 피터는 침대에 묻는 핏자국을 지우느라 무인세탁소에서 하루 종일 있던 적도 있었다. 가벼운 농담으로 풀어보려던 분위기는 맷의 메마른 눈빛과 입매로 무너지고, 피터는 단단한 표정 앞에서 다시 입을 꾹 다물 수밖에 없었다.
“…일단 자.”
맷이 등에 총알구멍이 나버린 탓에 바르게 누울 수 없는 피터를 껴안았다. 졸리잖아. 피터의 상태를 이미 알고 있는 맷은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아, 피터의 목덜미와 팔을 가벼이 만져주었다. 총알은 꺼냈고, 진통제는 이미 피터가 충분히 넘칠 만큼 복용했으며, 피터는 수면 부족 상태였다. 조심해야 했다는 잔소리나 꾸중은 결국 나중으로 미룰 수밖에 없다. 상처를 피해서 피터의 몸을 문질러주는 것으로 맷은 걱정을 대신하기로 했다. 피터가 긴장을 풀고, 잠에 빠질 수 있도록 만져주는 것은 맷에게 무엇보다 쉬운 일이었고, 피터는 이미 지쳐 있는 상태였다. 맷에게 몸을 붙이고서 웅얼거리며 농담이나 무언가를 말해보려던 피터는 결국 쏟아지는 잠에 이기지 못하고 금세 무거운 눈꺼풀을 꾹 닫아버렸다. 두근거리며 뛰고 있는 심장 소리. 집안에 가득한 피 냄새. 피터가 언제나 풍기는 싸구려 보습제 냄새. 다양한 감각들이 맷에게 닿았다.
오지 않았다면 이대로 또 일어나서 밖으로 나갔을 게 분명하다. 작은 숨소리를 들으며 맷이 생각했다. 잠깐 쉬다가 나갈 생각이 아니었다면 굳이 바닥에 웅크려 잠들어 있을 리가 없었다. 몸에 남은 총알은 또 그대로 두고서, 또 스파이더센스가 울린다며 나서서 누군가를 구한다고 자신의 상처는 뒷전이 될 게 뻔했다. 피터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살아왔고, 그럼에도 살아 있다는 것을 변명처럼 휘두르곤 했다. 맷이 이불이 더러워지고, 집안에 피 냄새가 배는 것을 신경 쓴다고 생각하는 피터는 여전히 눈치가 부족했다. 고작 그런 것으로 화내는 게 아닌데도, 피터의 생각은 언제나 다른 것으로 향하곤 했다. 피터를 가볍게 토닥이며 뺨에 입술을 붙인 맷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이래서는 이혼해달라고 피터가 말하더라도, 해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또 어디서 쓰러져서 피를 흘리다가 갈 곳이 없다며 옥상에 누워 있기라도 한다면…. 생각만으로도 아찔했다.
피터가 잠든 사이에 작은 진동이 울렸다. 피터의 바지춤에 끼워진 휴대전화였다. 피터를 한 손으로 껴안은 채 손을 뻗어 휴대전화를 꺼낸 맷은 피터가 여전히 깊이 잠들어 있음을 확인하고, 전화기를 손에 들었다. 맷에게 일반 스마트폰 전화는 소리가 나는 벽돌에 가깝다. 화면에 뜨는 정보를 전혀 알 수 없으니, 누가 전화를 걸었으며, 무엇을 눌러야 통화가 이어지는지 알 수가 없다. 한참을 울리는 진동 앞에서 망설이던 맷은 옅은 숨을 내쉬며 잠든 피터의 눈꺼풀이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얕은 잠이 더욱 옅어지는 것을 알아차리고 결국 벽돌 같은 화면에 손가락을 얹었다. 통화버튼이거나 거절 버튼이겠지. 무엇이든 눌러본 맷은 휴대전화에서 ‘피터?’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으로 제가 통화버튼을 눌렀음을 알 수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메이.”
맷이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메이의 목소리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오래전 피터와 처음 정체를 공유했을 때, 변호사로 메이와 만났던 맷은 자연스럽게 단정하고 변호사다운 목소리를 지어내어 인사를 건넸다.
[맷? 피터가 거기 갔나요?]
“피터가 뷰글 문제로 인터뷰를 왔었어요. 피곤했는지 사무실에서 잠이 들어서…,”
맷은 입술을 혀로 훑으며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짜냈다. 데어데블 일로도 변명하고, 거짓말을 할 일이 잦은 맷은 태연하게 말을 할 수 있었다. 변호사 맷 머독은 신뢰가 있다. 차분한 어조로 피터가 잠들었음을 설명하며, 맷은 피터를 껴안은 손에 슬쩍 힘을 주었다.
[아…, 그렇군요. 피터가 일어나면 오늘은 병원에 안 와도 된다고 전해줘요.]
“네, 그러겠습니다, 부인. 나중에 피터랑 같이 문병하러 가겠습니다.”
[…병원에 올 필요는 없어요. 피터가 걱정이 많아서 그렇지, 멀쩡해요! 나중에 집으로 와요!]
메이가 유쾌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득 차려놓고 기다릴게요. 피터랑 같이 들르라는 메이의 목소리는 밝고, 명랑했다. 목소리만으로는 아픈 사람 같지도 않아서 맷은 내심 안심하며 그러겠다고 말했다. 짧은 통화를 하는 사이에 피터가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얕은 잠에서 깨어날 듯 몸을 움직였으나, 맷의 팔이 단단히 피터를 붙잡고 있었다. 얌전히 자. 맷이 피터를 가볍게 토닥이며 작게 속삭였다. 피터를 대신해서 메이에게 변명과 저녁인사를 해준 맷은 통화가 끊기자, 휴대전화를 침대 옆에 두고, 피터의 머리칼과 피부 위를 가볍게 매만졌다.
“더 자, 피터.”
통증으로 절로 움츠러드는 몸을 쓰다듬어주며 맷이 부드럽게 속삭였다. 깊은 침묵의 밤이 물들어가는 동안 피터의 목과 어깨, 이곳저곳을 주물러주는 맷의 손길은 다정하고 따뜻했다. 밖은 그냥 시끄럽고 소란스러울 뿐이고, 히어로가 필요한 일은 없었다. 더 자도 된다는 맷의 속삭임에 넘어간 피터가 맷에게 완전히 몸을 기대어 긴 숨을 내뱉었다.
피터는 며칠은 제대로 못 잤던 사람처럼 맷에게 안겨 잠이 들었다. 아무런 꿈도 없는, 목소리도 존재하지 않는, 그냥 오직 부드럽고 따뜻함 뿐인 깊은 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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