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피터] 잃은 것들

🕶x🕷/소설

2025. 4. 28. 16:26

넌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어.

도시가 불타오르고, 사람들의 비명이 귀를 찌른다. 익숙한 얼굴들이 유리창 너머로 사라지고 지킬 사람이 없는 도시를 우롱하듯 누비고 다녔다. 폭발과 함께 굉음이 들렸다. 가까운 곳에서 폭탄이라도 터진 것처럼 유리창이 흔들리며 발밑도 진동하고 있었다. 이건 가짜야. 어렴풋이 보이는 하늘은 붉은 빛으로 물이 들었다. 몇 번이나 있었던 뉴욕의 위기, 이런 종말의 선언은 언제나 있었지만 동시에 익숙해질 수 없는 것이기도 했다.

피터는 흔들리는 창문을 꾹 닫아두고 어지러운 발을 조심히 딛어 다시 침대로 향했다. 당장이라도 창문을 열고 뛰쳐나가고 싶은 충동을 꾹 누르는 것은 생각보다 큰 인내심이 필요해서, 꾹 쥐어진 주먹에는 저절로 강한 힘이 들어갔다.

이미 방문의 문고리도 고장내버린 터라 룸메이트의 출입을 막을 수단도 사라져 있었다. 사실 문이 열리고 룸메이트든 빌런이던 누군가가 들어왔을 때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할 자신도 없었다. 평소였다면 환상 따위는 스파이더센스로 쉽게 구분하고 현실을 찾아냈을 것이다. 자신을 탓하는 죽은 이들의 목소리는 언제나 익숙해져 있었으니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평소라면 당장 창문으로 몸을 던져서 도시를 구하는 것에 집중했을 것이다. 이런 문제 따위는 피터의 발을 잡을 것이 못 되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평소와 다르다는 게 피터를 검사한 이의 의견이었다. 이미 고장난 감각은 시도 때도 없이 일상의 모든 것에 과민하게 반응하며 피터의 머릿속 경보음을 울리고 있었다. 핏빛으로 물든 하늘이 정말이라는 듯 피터의 등을 떠밀었다.

얼른 사람들을 구해, 스파이더맨.

또 내버려둘 거야?

고장난 머리가 만들어낸 거미들이 유유히 창문으로 향하고 있었다. 확실히 방은 안전한 장소가 아니라는 것을 피터는 깨달았다. 잠으로 달아날 수 없도록 하는 세상은 피터로 하여금 다시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손을 뻗고, 주먹을 휘두르기를 강요하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무엇보다 간단한 일이었고, 자동차로 저글링도 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한 힘을 가진 스파이더맨은 사소한 사건으로부터 사람들을 쉽게 구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달라. 피터는 주먹을 꽉 쥐고서 떨리는 발밑의 감각이 진짜가 아니라는 사실을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아무리 머릿속의 경고음이 스파이더맨을 불러도 피터는 그 부름에 응할 수 없었다. 그렇게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뻗은 손으로 선량한 누군가를 다치게 한다면—. 상상만으로도 아찔해지는 풍경은 해변의 모래알처럼 쉽게 부스러져 바람에 날아갔다. 붉게 물들어서 세상의 종말을 고했던 하늘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푸르고 짙은 색으로 칠해져서, 평화로운 뉴욕을 빛내고 있었다. 스파이더센스는 다시 잠잠해져서 조용해진 도시를 반겨주었다. 부서졌을 건물도 도로도 모든 것이 완벽하게 돌아가 있었다.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덧칠되었던 풍경들은 다시 원래의 모습이 되어 피터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결국 피터가 택한 것은 도망치는 것이다. 대신 평소처럼 창문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현관문을 이용해서 밖으로 나섰다. 현관문을 고장내지 않도록 문고리를 조심히 잡아열고, 발걸음을 재촉하며 계단을 내려갔다. 유리창 너머에 존재했던 무너진 도시는 아직까지는 멀쩡한 모습으로 피터의 외출을 반겨주었다. 다시 환각이 시작되면 어떻게 하지. 그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제대로 구분할 수 없으면 어떻게 해야하는 거지. 비명 하나 들리지 않는 조용한 거리에서 우두커니 선 채로 피터는 목적지를 잃고 그저 멀쩡히 붙어 있는 건물을 보고, 하늘을 보고, 다시 앞을 보았다. 머릿속이 미쳐가더라도 믿을 수 있는 사람. 한참을 보도블럭 위에 서 있던 피터는 겨우 목적지를 택하고 빠르게 뛰듯이 걸었다. 쭉 뻗어진 도보는 어느새 다시 일렁이며 곡선으로 되고, 다시 직선이 되었다가, 울퉁불퉁하게 굽이진 길이 되었다. 빌딩과 건물에 가려져 바다는 보이지도 않을 도심에는 어느새 파도가 치고, 피터의 발밑은 해변이 되어 모래알이 밟힌다. 푹푹 들어가는 발걸음에 사로잡혀 걸음이 늦춰지면 다시 고장난 경고음이 울렸다. 피터는 그것에 반응하지 않기 위해 애쓰면서, 그리고 그것이 부디 ‘진짜’가 아니길 기도하며 앞으로 걸었다. 사람들의 원망이 가득한 목소리가 스파이더맨을 탓하고 있었다. 모래 같은 사람들은 스파이디의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고 바람에 날려사라졌다. 구하지 못한 사람들은 부스러지고 바스라져서 발밑에 깔렸다. 발을 멈출 수 없었다.

 

“피터, 우유는 마셨으면 냉장고에 넣어둬.”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맷이 담담한 어조로 말했다. 식탁에 대충 얹어진 우유팩을 눈이 닿기도 전에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감각이 좋은 사람이었다. 피터는 소파에 웅크려 앉은 채 대답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피터를 스쳐지나간 맷은 옷장을 열고 편안한 옷을 찾으며, 셔츠의 단추를 풀었다. 차분하고 단조로운 걸음이나 어투는 평소와 같았다. 피터를 탓한다거나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을 생각도 없는 모양이었다. 언제나 멋대로 찾아와도 신경쓰지 않는 집주인은 오늘도 마찬가지라는 듯 피터가 있는 것을 신경쓰지 않았다. 소파에 두 발을 올린 채 무릎에 얼굴을 대고 있던 피터는 고개를 슬쩍 들어올려 맷을 눈에 담았다.

...목소리가 들려요.”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작게 울렸다. 그런 작은 숨소리 같은 말도 쉽게 들을 수 있는 맷은 피터의 말에 고개를 피터를 향해 까딱였다가, 이내 부엌의 냉장고로 향했다.

“미스테리오에게 당하기라도 했던 모양이네. 푹 쉬어.”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진중한 고백처럼 피터가 말을 내뱉었다. 잔뜩 떨리는 목소리에 장난기조차 없어서 맷은 피터가 또 어떤 일에 휘말렸음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종종 피터는 스스로도 버거운 문제가 생기면 맷을 찾아오곤 했고, 이번도 마찬가지일거라고 매튜는 생각했다.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어 든 맷은 소파로 다가가 잔뜩 힘이 들어가 있는 피터의 등을 손으로 더듬었다. 평소와 달리 슈트가 아닌 평범한 셔츠차림으로 왔음을 맷은 손에 닿는 익숙지 않은 질감으로 알 수 있었다. 피터의 스판덱스 슈트는 이보다도 매끄럽고 탄성이 있는 소재였다. 옷 위로 가볍게 등과 목 뒤를 만지며 맷은 피터에게서 어떠한 화학약품의 흔적이나, 장치가 붙어 있지 않은지 살폈다. 알 수 있는 것은 피터의 심장이 평소보다도 더 빠르게 뛴다는 것과 몸이 떨리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가볍게 닿는 손길에 긴장으로 굳어 있던 몸이 조금 풀어지고, 피터의 숨소리가 조금 안정되었다. 맷은 뒷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무릎에 얼굴을 묻어버린 피터의 옆자리 앉아 피터의 어깨를 부드럽게 매만졌다. 하루종일 조용했던 뉴욕에서 들릴 목소리라고는 있었다고해도 피터의 옆집에 있다는 시끄러운 이웃 정도일 터였다. 매일 노래를 부른다는 옆집 노인을 따라하던 피터의 목소리가 떠올라서 맷은 땀이 배어 있는 피부를 더듬었다. 그런 노랫소리를 피해 왔을리는 없다. 매튜는 피터의 상태가 오늘 포기가 읽었던 신문의 기사와 연관이 있을 것이라는 간단한 추론을 했다.

스파이더맨,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다. 기사의 사진 속 스파이더맨은 자동차를 두 손으로 들어올리고 있다고 포기가 말했다. 그 정도는 언제나 피터가 하는 일이었으므로 맷은 그런 것에 큰 신경을 쓰지 않았다. 자경단 활동에는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존재했고, 타인의 재산을 모두 지켜줄 수 없는 것이 이 바닥의 일이었다. 필요해서 던졌겠지. 맷은 스파이더맨을 탓하는 세상 대신, 거미 인간의 편을 들어 대꾸했었다. 문장으로 이루어진 스파이더맨은 평화로운 도시를 파괴하며 시민들을 놀래켰다고 했다. 언제나처럼 피터가 싸우던 상대가 지워져 있었던 거라고, 맷이 쉽게 생각하며 넘긴 기사였다. 유독 스파이더맨에게 박한 뉴욕의 감정은 언제나 거미 인간 앞에 서 있는 라이노나 일렉트로 따위를 지우기 일쑤였고, 그 결과 언제나 덤터기를 쓰고 속상해하는 것은 피터였다. 이번에도 비슷한 일이겠거니하며 매튜는 피터의 긴장을 풀어주며 다시 말을 잇기를 곁에 서서 차분히 기다렸다.

“사람들이 비명을 질러요.”

맷은 피터의 어깨를 만지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그런데 다 구할 수가 없어요. 아무리 손을 뻗어도, 무너져요..”

떨리는 숨소리가 맷의 감각을 간질였다. 뭐가 진짜인지 모르겠어요. 시간이 지나 부스러지는 마른가지처럼 힘없이 흩어지는 피터의 숨이 맷의 손끝에 닿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시작되는 악몽은 제멋대로 시작되고 사라진다. 평소였다면 스파이더맨 활동을 지칠 때까지 하고서 쓰러지듯 잠에 들면 해결되는 문제였는데, 악몽이 현실에 닿아버리자 방법이 없었다. 제멋대로 울리는 스파이더센스를 무시하려고 애쓰면 그것이 진짜라면 어쩌지하는 불안감이 피터를 좀먹었다. 정말로 누군가 도움이 필요하다면 어쩌지. 고장난 머리는 뉴욕이 무너지는 환상을 보여주고, 악의에 깔려 부스러지는 사람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시끄럽게 울리는 스파이더센스가 다시 피터를 창문으로 불러내고, 옅은 잠에서 깨어난 피터가 고개를 들었다. 오랜만에 겨우 감겼던 눈꺼풀은 불안감으로 다시 가벼워져서 잠을 몰아내버렸다.

또 죽게 두는 거야? 부드러운 실크 이불을 손으로 꽉 쥐어 얼굴까지 가리며 무시하려 애쓰던 피터는 결국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부드러운 시트가 손가락 사이를 매끄럽게 스쳐지나갔다.

“피터.. 다시 자.”

잠에 취한 목소리가 울리고 맷의 손이 피터의 손목을 붙잡고, 힘을 주어 끌어당겼다. 하지만 사람들이—. 붉어진 세상은 다시 스파이더맨을 불렀다. 영원히 구하지 못할 사람들에게 손을 뻗으라고, 그리고 손가락 사이로 흩어지는 생명들은 너의 탓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창가로 닿았던 피터의 시선은 중심을 잃고 맷의 품으로 무너지고, 매튜의 가슴팍에 코끝이 부딪혔다. 아프도록 울리는 경고음은 지금 당장 나가라고 외치고 있었다.

“아무 일도 없을 거야. 괜찮아.”

피터의 나약한 인내심을 대신해서 피터를 꽉 붙잡은 맷이 말했다. 차분하고 담담한 목소리.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하게 된 피터는 결국 그 단단한 약속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하는 것들이 무너지는 소리는 시끄러웠고, 피터를 꽉 붙든 맷의 팔은 따뜻했다. 이게 진짜야. 눈을 감고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를 외면하기 위해 애쓴다. 맷의 감각은 틀리는 법이 없으니까. 도시는 종말을 향해 가고, 피터는 여전히 침대 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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