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피터] 위장결혼 - 01

🕶x🕷/소설

2025. 6. 1. 19:18



상자 하나가 피터가 가진 것의 전부였다. 짐을 챙겨오겠다는 변명이 무색할 정도로 초라한 상자는 피터가 그간 얼마나 집에 무심했는지 깨닫게 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방 하나가 다였던 피터의 생활공간에서 버릴 것을 제외하면 웹슈터 용액을 만드는데 쓰는 비커나 도구, 몇 벌 되지 않는 티셔츠와 바지 정도가 다였고 그마저도 종이박스 하나에 깔끔하게 정리되었다. 룸메이트와 함께 뉴욕 이곳저곳을 다닐 때에도 함께하던 낡은 이불이나 이가 나간 접시도 챙겨야 할까 고민했지만, 깔끔하고 고급스러웠던 맷의 집을 떠올리자 조금 애착이 남았던 낡아빠진 것들을 모두 검정 봉투에 넣어버렸다. 버릴 것만 가득한 공간이었다.

월세방을 갑자기 비우는 것에 법적인 문제가 있지 않을지 걱정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로 집주인은 처음으로 피터에게 친절히 손까지 흔들어주며 그를 배웅했다. 아마도 며칠 전 맷이 먼저 집주인을 만났던 모양이라고, 피터는 친절히 웃는 부인의 얼굴에서 그 이유를 추측할 수 있었다. 첫 번째로는 변호사가 찾아와서, 두 번째로는 그 변호사가 너무 잘생겨서. 둘 중 어느 것이든 피터는 월세방을 쉽게 뺄 수 있었고, 보증금도 깔끔히 돌려받을 수 있었으니 좋은 일이다. 피터는 이 변화를 가급적 긍정적으로 해석하기로 마음 먹었다.

늘 노래를 시끄럽게 부르던 옆집의 아저씨나 층간소음에 예민하게 굴던 이웃들도 이날만큼은 피터의 등을 토닥여주며 문까지 쫓아와 앞길을 응원해 주었다. 변호사라는 직업은 참 대단한 거구나. 이웃들에게서 피터는 갑작스럽게 인생을 편, 신데렐라 같은 입장으로 알려진 모양이었다.

“파커, 정말 축하한다. 아! 이젠 파커가 아니겠구나!”

맨션의 주인인 부인이 미소를 가득 머금고 말했다. 피터가 이곳에 사는 동안 한 번도 본 적 없던 ―대체로 부인은 월세를 재촉할 때만 만났다― 따뜻한 표정이었다.

“아.. 네. 감사했어요, 부인.”

집주인에게 낡은 열쇠 하나를 돌려주고, 피터는 정들었던 낡은 맨션을 나섰다. 피터에게 남은 것은 종이 상자 하나뿐이었다. 이 정도면 거미줄로 감아서 가져가면 금방일 텐데. 지하철을 타는 것과 거미줄로 가는 것 중에 어느 쪽이 나을까 상자를 들고 고민하던 피터는 이내 찾아오는 두통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주변을 둘러봤다. 이사하는 날도 평범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구나, 스파이더센스. 결국 골목으로 빠르게 들어가 단정히 채운 셔츠의 단추를 풀며 피터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단추를 하나씩 풀 때마다 버릇처럼 입은 스판덱스 슈트가 드러나고, 바지 주머니에 대충 구겨 넣은 마스크가 제 차례를 기다리듯 밖으로 삐죽 튀어나왔다. 결국 이곳에서의 마무리도 스파이더맨이구나. 짐이 든 상자를 대충 거미줄로 벽에 고정해 두고, 옷가지도 함께 거미줄로 붙여버린 피터는 마스크를 뒤집어쓰며 재빠르게 벽에 올라타 옥상으로 뛰어올랐다.

저녁이라도 사가야 하는데. 스파이더센스가 크게 울리는 방향을 향해 거미줄을 붙이고, 공중으로 날아오른 피터가 짧게 생각했다. 아무래도 입장이 입장인지라 무엇이라도 해야 할 것 같다는 책임감이 피터의 마음을 짓누르고 있었다.

악당를 거미줄로 묶어두고, 집에 도착하고, 얼른 상자를 정리하고, 저녁을 사서, 집주인을 맞이하기.

피터는 완벽한 계획에 스스로 감탄을 하며 웹슈터 버튼을 누르고 떼기를 반복했다. 맷의 퇴근 시간 전까지는 어떻게든 들어가자는 게 피터의 목표였고, 스파이더맨은 곧 떠날 정든 구역을 깔끔히 마무리하기 위해 바쁘게 움직였다.

 


 

이제부터 우리는 결혼한 사이야.

그것은 일주일간의 교도소 체험에서 피터가 들은 말 중 제일 충격적인 말이었다. 요원의 짜증스러운 말투도 신경을 거스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피터를 놀라게 할 정도는 아니었다. 피터를 마음대로 체포한 이들의 목적은 대체로 피터 파커보다는 늘 그와 연관된 사진의 주인공이었고, 이런 일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니었던 피터는 능청스럽게 이야기를 넘기는 법을 알고 있었다. 대충 몇 번 모른다고 잡아떼면, 스파이더맨은 그저 비즈니스 파트너일 뿐이라고 이야기하면 언제나처럼 포기하고 풀어줄 거라고 생각했기에 피터는 여유로운 체를 하며 딱딱한 의자에서 몇 시간을 앉아 있었다. 수갑이라도 차고 있지 않았으면 조금 덜 심심했을 텐데, 요원들은 피터가 밥을 먹을 때조차도 수갑을 풀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꼬박 하루를 붙잡혀 의자에 앉아 스파이더맨에 대해 털어놓으라는 압박을 받을 때만 해도, 피터는 이런 상황이 내일쯤이면 마무리될 거라고 믿고 있었다. 상대가 어느 쪽이든 간에, 스파이더맨을 아무리 미워해도, 민간인이었던 피터 파커를 어떻게 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자신감에서 나온 생각이었다. 그리고 그 추측은 보기 좋게 빗나갔고, 출신과 시민권에 대한 이야기까지 나오기 시작하자, 피터는 삐걱거리는 의자에 앉은지 26시간만에 전화 한 통을 부탁했다.

“변호사가 필요해요. 여기 의자가 끔찍해서 고소해야겠어요!”

통화를 하고 1시간이 채 되지 않아 지팡이를 든 변호사가 나타났다. 붉은 슈트 대신에 깔끔하게 정장과 코트까지 걸친 채로 또각또각 구둣발 소리까지 내며 모습을 드러낸 맷의 모습을 보며 피터는 하루가 넘도록 겁을 주던 요원을 향해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그때는 정말로 금방 나갈 줄 알았는데. 내 의뢰인의 권리-거기엔 덜 딱딱한 의자도 있었다-에 대해 이야기하는 맷의 모습은 믿음직스러웠고, 피터는 적어도 내일은 이곳에서 탈출할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결국 이야기는 길어지고, 국적에 대한 문제까지 나오기 시작했을 때 피터는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떻게든 스파이더맨을 붙잡고 싶은 상대는 무리하게 피터의 신상을 털었고, 그중에서 억지스럽게 나온 게 국적 문제가 되리라고는 맷도 상상하지 못했던 모양이었다.

“보아하니 미국인이 아닌 거 같은데.”

엄청난 건수를 잡았다는 듯 남자가 펜으로 책상을 두드리며 웃었다. 소름이 돋을 정도로 사악한 미소여서, 노먼 오스본이 떠오를 정도였다.

“난 퀸즈에서 20년 넘게 살아온 뉴요커라구요! 내 멋진 발음만 봐도 알잖아요. 나머지는 맨해튼에서도 살았지만..”

“피터, 도움 안 되니까 조용히 해.”

매튜가 미간을 찌푸렸다. 조금 덜 딱딱해진 의자에 앉아 수갑을 찬 피터는 맷의 말에 입을 다물고 자칭 요원이라는 노려보고 있었다. 맷이 해결해 줄 거야. 평생을 살아온 뉴욕, 혹은 미국에서 추방당하는 드라마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피터는 맷의 옆모습을 보며 굳게 믿었다. 높은 목소리가 오가고, 재판에 가기도 전에 추방당할 수 있으니 스파이더맨의 정체를 불라는 똑같은 이야기가 오고 가며, 일주일이 되기 전 맷이 내놓은 결론은 ‘메이 파커를 부르자’는 것이었다. 결국 상대가 가진 패는 피터의 국적 문제가 다였고, 지금까지 뉴욕에서 태어나 살아왔음을 입증한다면 그건 언제든 사라질 수 있는 패였다. 그리고 그것을 입증할 수 있는 사람은 피가 이어지지는 않았어도 벤 삼촌의 부인이자, 피터와 유일하게 남은 ‘파커’인 메이 파커라는 게 맷의 설명이었다.

“메이는 안 돼요, 맷.”

“그게 문제를 빨리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이야. 그게 싫으면… 스파이더맨의 정보를 줘야지 풀어줄 모양이니까.”

“차라리 여기서 일주일을 더 자더라도, 메이 숙모를 부를 수는 없어요. 숙모에게 걱정을 끼치는 건 절대 못 해요!”

피터가 소리를 치며 가볍게 책상을 두드렸다. 그 가벼운 행동에도 피터의 손목을 구속한 수갑이 부서지고, 책상에도 작은 균열이 남았다. 일주일간 교도소와 취조실을 오가는 것이 괴롭긴 했지만 메이를 부르는 건 결코 안 된다는 게 피터의 주장이었다.

“그래, 그러면 잠깐 기다려.”

피터의 단호한 말에 잠시 고민하듯 맷의 입꼬리에 힘이 들어갔다. 담담하고 낮은 목소리를 언제나 신뢰감을 주기 충분해서, 피터는 메이 생각에 울적해지던 마음을 조금 누를 수 있었다.

“얼마나요? 밤마다 울 것 같아요.”

“금방 다시 올게.”

그리고 그렇게 맷이 방안을 나가고, 하루가 채 지나지 않아 피터는 덜 딱딱해진 의자에서 탈출할 수 있었다. 여전히 미움으로 가득한 눈초리로 피터를 쳐다보는 요원은 이미 금이 가서 제 역할을 못하는 수갑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느슨한 열쇠 구멍에 열쇠를 꽂아 수갑을 풀어주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맷이 해낸 모양이라고, 피터는 스파이더맨의 정체와 피터 파커의 국적을 지켜준 변호사에게 가벼운 감사를 할 생각을 하며 일주일 만에 바깥의 공기를 맛볼 수 있었다. 맷은 바쁜 모양인지 자유가 된 피터를 맞이해 주지 않았고, 피터는 통화로 저녁에 다리 위에서 만나자는 맷의 말을 들을 수 있었다.

반나절 동안 마음을 추스르고 난 뒤에 피터는 맷을 만나 딱딱한 의자와 소리를 치던 요원 남자의 흉내를 내며 장난스럽게 웃었고, 데어데블 차림으로 나타난 맷은 스파이더맨의 이야기에 가벼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평범하게 그냥 흘러가는 밤 중 하나라고, 피터는 앞선 끔찍한 일주일을 DD와의 가벼운 대화로 털어버리기 위해 애썼다. 스파이더맨의 정체는 지켜졌고, 피터 파커의 국적도 안전하니까 더 이상 걱정해야 할 건 없을 거야. 피터는 제 불안감을 위로하며 과장된 어투로 취조실 안을 흉내 냈다.

그러다 그냥 문뜩 궁금해져서,

“도대체 어떻게 했길래 날 그렇게 풀어준 거예요?”

피터가 가볍게 맷을 돌아보며 물었다. 변호사일 때와는 다르게 편안한 모습으로 서 있던 코스튬 차림의 맷은 별 것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가볍게 올라가는 입꼬리에 자신이 넘쳤다. 데어데블 마스크에 눈이 가려져 있었지만 분명 눈도 저렇게 과한 자신감으로 가득 차 있을 게 분명하다고 피터가 생각했다.

“서류에 장난을 좀 쳤지.”

맷의 목소리는 변함없이 담담하고 침착했다.

“이제부터 우린 결혼한 사이야.”

그것은 피터의 인생에서 다시는 들어볼 일 없을 듯한 폭탄 같은 프로포즈였다.

 


 

맷의 퇴근 전까지 들어가겠다는 계획은 언제나처럼 무너져 있었다. 피터는 찢어져서 속살이 비치는 스파이더맨 슈트를 내려다보다가, 골목에 던져둔 상자와 옷을 찾아 들고, 빠르게 웹스윙을 했다. 맷이 퇴근을 하고 집에 도착하고도 남을 시간이어서 계획한 것 중에 지켜진 게 하나도 없었다. 저녁이라도 사갈까 고민했던 것이 무색할 정도여서 맷이 이미 혼자서 저녁을 먹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데어데블을 하러 나갔을지도 모르지. 매튜의 집에 자주 놀러 가긴 했지만 서로의 일정을 공유한 적 없었던 탓에 피터는 맷이 지금 집에 있을지 없을지도 추측하기 어려웠다. 스파이더센스가 울리는 곳을 돌아보고 악당의 엉덩이를 가볍게 차주고 가려던 생각은 끊임없이 울리는 두통에 무너졌고, 결국 밤까지 티격태격 추격전과 주먹을 주고받아야만 했다. 해가 지고 남은 것은 너덜너덜하게 해어진 스파이더맨 슈트 뿐이었다.

차라리 맷이 없으면 마음이 편할지도. 여전히 어색한 관계를 떠올리자, 마음 한구석이 찌릿찌릿 아팠다. 맷은 어디까지나 피터의 고집에 어울려 준 것이고, 쉬운 길을 돌고 돌아 어려운 길을 택한 것은 본인이라는 사실을 피터는 알고 있었다. 이렇게 어색해하는 것조차도 맷에게 미안해서 속이 쓰릴 정도였다. 매튜와 결혼한 사이가 되고 이제 막 2주가 되어가는 시점이지만, 피터가 맷을 제대로 만난 것은 한 손에 꼽을 정도였다.

미안하고, 어색해서.

사실 감시가 붙지 않았더라면 한 달은 계속 그렇게 있을 것 같았는데, 갑작스럽게 피터 파커에게 따라붙은 눈초리에 결국 피터는 맷의 집에 들어가는 것 말고는 선택지를 찾을 수 없었다. 자연스러운 부부인 척을 하려면 같이 사는 게 당연한 거지만―, 맷의 괜찮다는 말에도 피터는 죄책감을 지울 수 없었다. 겨우 상자 하나를 갖고 들어가는 게 정말 괜찮은 걸까. 찢어진 스파이디 슈트를 입은 피터는 맷의 집 근처에 도착해서는 웹스윙의 속도를 늦추고 주변을 가볍게 둘러보다가 스파이더센스가 얌전한 것을 느끼고 빠르게 창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 맷! 집에 있었네요…?”

창문으로 들어가 가볍게 바닥에 발을 딛은 피터가 발견한 것은 셔츠 차림의 맷이었다. 넥타이를 풀고 소파에 앉은 맷은 피터의 등장에도 놀라지 않은 듯 무심한 얼굴로 피터가 있는 쪽으로 고개만 까딱였다. 집주인이 집에 있는 게 당연한 거지. 피터는 맷을 보자마자 화들짝 놀란 스스로를 탓했다. 둘 사이에 달라진 것이라고는 가짜 서류 하나가 다인데. 그것도 맷이 피터를 위해 해준 일인데, 고작 그걸로 맷을 어색하게 대하는 스스로가 조금 부끄러워졌다. 매튜는 언제나처럼 무심한 듯 잔잔하게 피터를 대해주는데 말이다.

“짐은 그게 다야?”

피터의 손에 들린 상자를 알아차린 맷이 물었다. 상자 안에 든 것이 그렇게 많지 않다는 것까지 알아차린 투여서 피터는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웃었다.

“네, 뭐. 이것저것 다 버렸더니 생각보다 너무 없더라구요.”

“어디든 네가 편한 곳에 둬, 피터. 필요하면 책상이나 서랍도 사면 되니까.”

소파에서 일어서며 맷이 친절하게 말했다. 상자를 어디 둘지 몰라 멀뚱히 서 있는 피터에게 다가온 맷은 상자를 빼앗아 들고, 소파 앞에 탁자에 내려두었다. 네 집처럼 편하게 있으라던 맷의 말을 정말 그대로 실천했던 피터는 이제는 제 몸조차 어디에 두면 될지 갈피를 잡을 수 없게 되었다. 그냥 혼인신고서 정도가 하나 더해졌을 뿐이고, 맷이랑은 변함없는 사이인데도 마음이라는 게 참 이상해서 피터는 상자를 빼앗기고도 그저 서 있을 뿐이었다. 피터의 그런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맷은 재촉하거나 화도 내지 않고 피터의 등을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그을린 탓에 조금 탄 흔적이 남아 있는 천 위로 닿은 손이 조심스럽게 그 위를 쓸고 지나갔다.

“찢어진 슈트로는 식당에는 못 가겠는 걸.”

맷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선글라스에 가려진 눈은 보이지 않았지만 입가에는 장난기가 가득했다. 가벼운 어투에 피터의 긴장이 조금 사그라들었다.

꼬르륵.

어색한 긴장감이 누그러들자마자 찾아온 것은 허기짐이었다. 피터는 눈치 없는 제 위장의 목소리에 가볍게 한숨을 쉬며 맷의 어깨에 머리를 툭 기댔다.

“저녁을 사오려고 했는데…, 월세방을 나오자마자 엉망이 됐어요.”

“됐어. 같이 나가서 먹지 뭐. 피터, 네가 당장 옷만 갈아입는다면 말이야.”

웃음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매튜가 피터의 귓가에 속삭였다. 지금 당장 나가면 헬스키친 최고의 맛을 볼 수 있을 거야. 귀를 간질이는 숨소리에 결국 웃음이 터진 피터는 맷에게서 떨어져 상자를 열고 갈아입을 것을 찾아 찢어진 스파이더맨 슈트를 벗어 던지고, 멀쩡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그 사이에 맷은 벗어둔 재킷을 걸치고 시각장애인용 지팡이를 손에 들고 있었다. 언제나 보는 변호사 맷 머독의 차림이었다.

식당으로 가는 길은 어둡긴 했지만 위험한 길은 아니었다. 그냥 이렇게 평범하게 걸어보는 게 오랜만이어서 어색할 뿐이라, 피터는 매튜의 곁에 서서 괜히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앞으로 걸었다. 맷의 팔이 자연스럽게 피터의 허리를 붙잡고 있어서 피터는 그저 맷의 옆을 천천히 따라갔다. 일반인 차림으로 이렇게 걷는 건 자주 있는 일이 아니어서 새롭긴 하다. 피터는 툭툭 바닥에 놓이는 케인의 끝과 맷의 검은 선글라스를 슬쩍 쳐다보다가 이내 앞으로 눈길을 돌렸다. 아마 당분간은 계속 이렇게 지내야 하는 거겠지. 맷이니까 불편한 것은 없을 거라며 피터는 애써 자신을 위로했다. 맷에게 미안하긴 했지만, 메이 숙모를 끌어들이는 것보다는 이 편이 훨씬 나았다.

“피터”

갑작스럽게 발걸음을 늦춘 맷이 피터를 부르고, 맷에게 붙어 걷던 피터가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매튜를 쳐다봤다.

“맷? 왜―, 웁!”

입술에 닿는 따뜻한 감촉에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피터는 입술에서 느껴지는 부드러운 느낌에 눈을 꼭 감았다가 이내 눈을 떴다. 맷의 새까만 선글라스가 눈앞에 있었다. 그리고 그 사이로 흐릿하게 비치는 초점을 잃은 눈. 장난이라고 하기엔 진지해 보여서, 피터는 결국 맷을 밀어내거나 화를 내는 대신에 어색하게 맷의 가슴팍에 손을 올리고 눈꺼풀을 닿았다. 아랫입술을 가볍게 깨물고 핥던 가벼운 키스는 이내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질척해졌다. 맷의 손이 자연스럽게 턱을 감싸고, 케인을 쥔 손은 피터의 허리를 단단히 붙들고 있었다. 입안을 훑고 입천장을 쓸고 지나가는 것이 너무도 자연스러워서, 피터가 할 수 있는 것은 맷의 재킷이나 셔츠를 쥐는 것뿐이었다. 한참을 붙어 있던 입술이 떨어지고 서로의 타액으로 젖어 있는 매튜의 입가가 보였다. 그것은 피터도 마찬가지여서, 피터의 얼굴에 열이 올랐다. 만약 환한 낮이었다면 얼굴이 붉어진 게 보였을 게 분명했다.

이제 끝인가. 타액으로 반들거리는 매튜의 입술을 보며 피터가 생각하는데, 촉촉해진 입술이 다시 피터의 뺨에 닿았다. 서로를 껴안은 자세로 거리에서 키스를 하는 이 상황이 당황스러워서 피터는 맷의 행동을 막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지켜보고 있는 사람이 있어.”

피터의 뺨에 입술을 붙인 맷이 속삭이며 말했다. 피터는 그제야 제 스파이더센스가 울리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맷이 갑자기 키스하는 바람에 놓친 게 분명했다. 아무리 그래도, 결혼한 사이라고 하지만, 이건 좀 과한 연기가 아닐까 싶었지만 피터는 결국 맷에게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매튜를 끌어안고 있었다. 키스 때문에 얼굴이 열이 올라서 조금 어지러웠던 데다가 모처럼 누군가가 안아주는 게 기분 나쁘지 않아서, 피터는 우선 맷이 하는 대로 그저 안겨 있는 쪽을 택했다.

어색한 동거 생활의 첫날은 키스로 시작하는구나. 피터는 키스까지 하는 매튜의 노력에 다시 양심이 찔렸다. 너무 가벼운 마음으로 대충 맷이랑 살려고 했던 게 아닐까 하는 고민도 얹어졌다. 이 어색한 동거 생활의 원인은 피터 파커 본인이다. 피터는 그 사실을 상기하며 맷에게 바짝 붙었다. 피터의 스파이더센스가 덜 따끔거릴 때까지, 그리고 맷이 상대가 사라졌다고 단정할 때까지 맷과 피터는 한참을 붙어 있었다.

식당으로 가는 길에 피터의 배꼽시계가 조금 크게 울렸고, 맷이 웃음을 터뜨렸다.

“깜짝 놀랐네. 천둥 같아.”

놀리는 듯한 어투에 피터가 맷의 옆구리를 가볍게 찔렀다.

“라이노랑 싸운 뒤에 들으면 더 놀랄걸요.”

농담으로 가득한 대화를 하며 맷과 피터는 어두운 거리를 걸었다. 피터는 매튜를 어색하게 대했던 스스로가 조금 부끄러워졌다.


ne님이 그려주신 장면이 너무나 감격스럽고 완벽해서 멋대로 링크 올립니다.. 완벽한 맷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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