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피터] Parker Pride

🕶x🕷/소설

2025. 3. 31. 14:11

- 미완

자존심은 늘 모든 것을 망쳐버린다. 피터는 종종 그 사실을 가슴에 새기곤 했다. JJJ가 만들어내는 괴팍하고 정확하지도 않으며 오로지 헐뜯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는 가짜 뉴스를 보고 웃음을 터뜨리다가도, 문뜩 분노가 차오를 때가 있었다. 스파이더맨, 오늘도 뉴욕을 파괴하다! 평소 같으면 그저 억울하고 넘어갔을 데일리 뷰글 1면 기사에는 당연히 피터 파커가 찍은 스파이더맨의 사진이 있었다. 그 사진 속 거미인간은 무너진 벽 앞에 마치 제가 진짜 거미라도 되는 것 마냥 양발로는 사뿐히 땅을 딛고, 두 손까지 바닥에 툭 올린 채 포즈를 잡고 있었다. 오늘도 뉴욕을 파괴한 무시무시한 스파이더맨 앞에는 라이노가 서 있었는데, 조나는 그런 상황 따윈 절대 봐주는 법이 없었다.

결국 덤터기를 쓰는 건 나지. 라이노가 제 몸으로 부딪혀서 그 덩치만큼 커다란 구멍이 난 벽은 다시 스파이디의 책임이 되어버렸다. 아마 데일리뷰글 신문을 구독하는 사람들은 1면 기사 제목만 읽고서 ‘세상에 이렇게 사악하고 무서운 거미 인간이 존재하다니. 얼른 당국이 뉴욕 전체에 살충제를 쳐야해!’라고 외칠 게 분명했거니와 어느 누군가는 스파이더맨을 체포해야한다며 소리칠 게 뻔했다. 어린 시절부터 스파이더맨을 시작한 피터 파커에게는 아주 평범하고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굳이 열 받을 이유가 없다. 라이노를 막느라 슈트가 다시 찢어졌고, 1면의 사진을 판 돈으로 다시 슈트를 수리할 천을 샀다. 그 괴팍한 코뿔소에게 몸을 부딪혀서 갈비뼈에 금이 가고, 팔도 부러져서 정말 아팠었지만 어차피 아무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니까 이런 것에 하나하나 억울해하고 화를 내면 그 무엇도 될 수 없어. 피터는 스스로에게 몇 번이고 말했다.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그런데 왜 피터 파커의 일은 그렇게 쉽게 넘길 수가 없는 걸까.

플래시 톰슨의 놀림이나 해리 오스본의 잘난 척을 몇 달이고 봐왔음에도, 게다가 이것은 JJJ가 양산하는 허위 뉴스에 비하면 그렇게 심각한 사안이 아님에도, 피터는 화를 주체할 수 없게 되곤 했다. 결국 플래시의 바보 같은 말에 반박을 하면, 다시 또 별 것도 아닌 이야기—바보 파커는 오늘도 과학이랑 키스하나보지? 같은 정말 이상한 놀림이었다—로 돌아올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저런 멍청이들에게 괜히 화를 내다가는 나만 손해야. 피터는 그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종종 그것을 까먹고 말싸움을 해버리고 말았다.

괜한 자존심에 시작한 말싸움, 다가오는 ESU의 축제, 플래시 톰슨과 말싸움을 하는 피터를 범생이의 반란으로 생각하며 쳐다보는 동기들, 그만하라며 플래시의 어깨를 툭툭 치는 그웬, 바보 같은 축제의 의미부여를 하고자 번 돈은 봉사센터에 기부하겠다는 학생들의 아이디어, 너 같은 과학쟁이랑은 누구도 같이 밤에 있을 파티에 가주지 않을 거라는 톰슨의 말. 그 모든 것이 어우러져 피터 파커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처음부터 말싸움을 시작하지 않고, 무시했더라면 지극히 평범한 대학생활을 하는 파커가 곤란해질 일은 없었을 텐데. 스파이더맨 활동으로도, 피터 파커로도, 누구에게도 인정받지 못한다는 상황은 피터의 금이 간 자존심에 부채질을 하고 말았다.

“바보 파커, 네가 50달러라도 벌면 내가 네 앞에서 물구나무 서서 사과할게. 물론 너는 그럴 리가 없지만 말이야!”

“플래시, 네 멍청한 머리가 사과라는 단어를 아는구나? 부디 축제가 끝나고도 그 단어를 잘 기억해두길 바랄게.”

자존심을 부리면 스스로 멍청해지고 만다는 것을 벤 삼촌에게 그렇게나 배워놓고도, 멍청한 피터는 다시 제 가슴에 가시를 세우고 말았다. 벤 삼촌이 보셨다면 분명 ‘피터, 내가 너를 그렇게 가르쳤니. 친구가 멍청해진다고 너까지 멍청해지면 안 되지’라고 하실 게 분명했지만 안타깝게도 벤 삼촌은 피터가 ESU에 입학도 하기 전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것도 내 탓이지. 벤 삼촌을 생각하니 급격히 몰려오는 우울감에 피터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삼촌의 말은 틀린 적이 없었다. 플래시와 그 무리가 멋대로 축제부스 목록에 제 이름을 채워넣는 것을 보며 피터는 제가 큰 잘못을 했음을 깨달았다. 제멋대로 휘갈겨 쓴 PETER PARKER—그 멍청한 플래시가 웬일로 철자를 틀리지 않았다—라는 단어 옆으로 KISSING BOOTH라는 말이 더 붙어버리고만 것이다. 멍청한 파커. 플래시에게 맞춰서 지능이라도 낮아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피터는 그 상황에 어떤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괜히 발소리만 쿵쿵 크게 울리며 화학실을 빠져나갔다. 그 댓가는 다시 지금의 피터가 지게 될 것을 알면서도 말이다.

 

대학교 캠퍼스의 모두가 축제준비로 한창이던 때에 피터 파커는 그웬에게 걸려오는 전화를 무려 여섯 통은 무시하며 스파이더맨 활동을 했다. 아마 그 사이에는 해리의 전화도 있었을 것인데 닥터 옥타비우스나 벌쳐 같은 빌런들이 쏟아지는 탓에 전화를 받을 틈이 없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확인한 문자 메시지에는 [피터, 지금이라도 플래시에게 사과하면 더 나쁜 상황은 안 생 길거야.]라는 걱정이 가득 담긴 말이 적혀 있었는데, 피터는 빌딩 옥상에서 마스크를 쓴 채로 한참을 그 메시지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웬도 해리도 나쁜 마음으로 보낸 말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정말로 더 큰 창피를 당하게 될까 걱정해서 친구로서 해준 말일텐데, 최근에 쌓인 일로 그 메시지가 ’피터, 너는 인기도 없고 다들 싫어하니까 지금이라도 멍청한 플래시에게 네가 바보임을 인정해‘라는 말로 이해되는 것은 순전히 피터 파커의 알량한 자존심 때문이라는 것을 피터는 알았다. 하지만 플래시에게 먼저 무릎을 꿇는다는 선택지를 택할 수 없어서, 피터는 다시 마스크를 뒤집어 쓰고 뉴욕을 한 바퀴 돌며 빌런들을 때려주는 쪽을 선택했다.

그렇게 축제날까지, 플래시가 낄낄거리며 멋대로 키싱부스를 캠퍼스 구석에 세워버릴 때까지 피터는 뉴욕 곳곳에 거미줄을 쏘며 악당을 잡았다. 그만큼 데일리뷰글에는 스파이더맨이 뉴욕을 망치고 있다는 기사가 몇 배로 늘었지만 말이다.

겨우 KISSING BOOTH라는 휘갈겨진 단어만 붙어 있는, 황량하게 서 있는 종이 부스가 피터가 창피를 당할 장소였다. 차라리 스파이더맨 활동으로 머리가 부딪혀서 어느 옥상에 잠들어버리거나, 뼈가 크게 부러져서 길바닥에 널부러져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파커의 불운은 꼭 필요할 때 작동해주질 않았다. 축제에서 부스를 맡았다는 피터의 말에 메이가 친구들과 사이가 좋다는 말로 오해하여, 옷을 골라주는 것도 파커럭이긴 했다. 아마 메이 숙모의 상상 속 피터 파커는 가슴에 꽃을 달고, 드레스를 입은 이를 에스코트하며 축제의 여운을 달래는 댄스파티에 가서 어설픈 키스를 나눌지도 몰랐다. 메이가 골라준 남색의 양복을 입고 선 피터는 거울에 비친 제 모습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은 분명 피터 파커의 장례식이 틀림 없다. 하찮은 자존심의 장례식. 피터는 그 위에 꽃잎을 날려줄 준비를 할 것이다.

안녕, 나의 바보 같고 멍청한 자존심아. 난 플래시에게 고개를 숙일 거야.

학생들의 웃음소리로 가득한 엠파이어 스테이트 대학의 캠퍼스가 피터에게는 비통한 장례식장으로 느껴졌다. 밤에 있을 댄스 파티를 준비하며 정장과 드레스를 차려 입은 학생들, 유령의 집을 준비해서 머리에 어항을 쓰고 미스테리오로 분장한 학생들을 스쳐지나가며 피터는 제 자존심이 죽어버릴 키싱부스로 향하고 있었다.

피터 파커, 0원을 기록하며 플래시 톰슨에게 제대로 턱을 얻어맞습니다—! 여기서 포기하나요?

점점 무거워지는 걸음은 앞으로 나아갈 줄을 몰랐다. 누군가 신발에 무게추라도 붙여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무거웠는데, 라이노보다도 더 묵직한 게 한 걸음 한 걸음이 버거웠다. 이런 걸 누군가는 멍청한 자존심이라 부를 것이다. 그리고 피터는 이것을 파커의 자존심이라고 불렀다. 바보 같은 파커. 너는 왜 늘 스스로 일을 망치는 거야. 스스로를 탓하는 일만큼은 누구보다 뛰어나게 잘하는 피터는 몇 톤은 되는 듯한 걸음을 멈추고 캠퍼스 중앙에 우두커니 서고 말았다. 사람들의 시끄러운 웃음소리, 여전히 준비 중인 부스들에서 들려오는 못질 소리가 낯설어지는 것은 금방이다. 피터는 이곳에 속할 수 없는 사람처럼 멍하니 주위를 둘러보고 있었다. ESU의 대학생 피터 벤자민 파커, 뉴욕의 파괴범 스파이더맨. 그 어느 쪽도 평탄하지 않아서 어디로도 도망갈 수 없었다.

“피터?”

멍하니 길에 서 있던 피터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퍼뜩 고개를 들었다. 피터라는 이름이 분명 제 이름인데,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스파이디나, 웹헤드나 그런 쪽이 더 어울릴 것 같은 그런 목소리. 피터는 눈앞에 서 있는 맷의 모습에 잠깐 멍하니 짙은 색의 색안경을 쳐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숙여 깔끔하고 비싸보이는 양복을 보고, 다시 고개를 들어 붉은 머리칼을 눈에 담았다. DD? 이름보다도 먼저 튀어나오려는 애칭에 맷이 다물라는 듯 피터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D—, 아니 맷이 어쩐 일이에요?”

피터가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리며 말했다. 여전히 피터의 어깨에 올려진 손은 긴장을 풀라는 듯 가볍게 어깨를 주물러주고는 제자리를 찾아가듯 맷의 허릿춤으로 돌아갔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대학, 대학생들의 축제, 그것과는 어울리지 않을 인물의 등장에 피터의 머릿속이 뒤집어지며 단어들이 뒤섞였다. 변호사, 플래시, 키싱부스, 멍청이, 맷, 50달러, 바보파커, 데어데블. 맷은 데어데블이자 변호사였다. 얼마 전에도 함께 우연히 만나 빌런을 때려주고 어설픈 인사를 나누었던 데어데블이 ESU에는 어쩐 일인가 싶은 피터는 혹여 축제를 틈타 빌런이라도 대학교에 숨어든 것은 아닐지 고민을 했다.

차라리 그게 좋을지도, 아냐 무슨 소리야. 닥터 옥토퍼스라도 나타나서 플래시를 휙 잡아들고 다니며 축제를 엎어주면 키싱부스도 뭣도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거잖아. 양심보다도 큰 자존심은 여전히 바보 같은 생각을 만들어냈다. 제발 DD가 빌런을 잡으러 스파이처럼 잠입한 거라고 해주세요!

피터가 마음 속으로 간절히 기도했다.

“일 때문에. 마스크 말고, 변호사 쪽.”

파커럭은 바라는 것을 주는 법이 없었다. 말끔하고 세련된 양장은 맷 머독이 얼마나 좋은 변호사인지를 알려주는 증거 같았다. 그에 비해서 피터 파커는 얼마나 초라한지. 맷이 키싱부스를 열었다면 50달러 쯤은 금방 벌었을 게 분명했다. 키스 한 번에 10달러는 족히 받아서, 100달러도 벌었을 거야. 피터는 괜히 구둣발로 땅을 차며 “그래요?” 하고 의미 없는 대답을 했다. 어깨가 축축 처지며 아까보다도 더 무거워진 느낌이었다. 라이노 두 마리를 얹고 있는 기분. 지금 당장 자동차로 저글링이라도 하면 50달러 쯤은 금방 벌 수 있을 것 같은데, 대학교에 스스로 스파이더맨이라고 광고하는 꼴이나 다름 없었다. 피터 파커가 스파이더맨이다. 그렇게 되면 스파이더맨의 광팬인 멍청한 플래시는 스파이더맨을 싫어할지, 그도 아니면 피터 파커도 좋아하게 될지 그 생각만으로도 우스워서 배가 아팠지만 당연히 해서는 안 될 짓이었다. 이제는 차마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스파이더맨의 서커스를 상상하자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파커의 삶에 쉬운 길 따위는 존재하지 않아서 삶이 팍팍하기 그지 없었다.

땅이나 쳐다보며 기운 없는 숨을 내뱉는 피터의 모습에 맷이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 손을 올려 피터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였다. 맷의 손이 올려진 어깨가 무겁고, 따뜻했다.

“오늘 늦게 마쳐?”

맷이 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주위의 어수선함과 달리 차분한 어투는 안정과 신뢰를 불러 일으켰다. 변호사 맷 머독이 데어데블이라는 걸 알기 전에 피터가 맷을 좋은 사람이라 믿게한 것도 이런 단정한 모습 때문이었다. 친절하고 다정한 변호사. 화가 많고 성질 나쁜 데어데블. 참으로 어색한 조합이 아닐 수 없었다.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피터는 늦어지는 대답에 고개를 갸웃하는 맷의 모습을 보고,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마무리 때는 도망갈 거라 저녁은 한가해요.”

”파티는 안 갈 모양이네.“  맷의 입가에 웃음기가 스몄다.

”파트너를 못구했거든요. 바빴어요.“

힘없이 웃으며 피터가 말했다. 괜히 붙인 바빴다는 말이 일종의 변명처럼 들려서 어쩐지 기분이 이상해졌다. 파트너를 못구한 건 정말 바빠서가 맞으니까. 그러니 대학교에서 인기라고는 처참하게 없다는 말처럼 들리는 건 분명 가시를 잔뜩 세우고 있는 자존심 탓인 게 분명했다.

“그럼 같이 저녁 먹을까? 마스크 관련 일도 있으니까, 한 바퀴 돌면 좋을 거 같아.”

“맷은 이제 가는 거예요?”

“응, 사무실에 가봐야해서.”

평소보다 다정한 목소리에 피터는 괜히 맷에게 있었던 이야기를 늘어놓고 싶어졌다.

사실은 내기를 했는데, 질 게 뻔한데도 자존심 때문에 일을 더 크게 만들었어요.

그렇게 말하면 맷은 바보 같다고 할까. 눈이 보이지 않는 짙은 색안경 속에 비추어지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처량하고 비굴해서, 피터는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기로 했다. 피터 파커가 잠깐 자존심이 부서지면, 스파이더맨이 데어데블이랑 신나게 뉴욕을 돌고 맛있는 핫도그라도 어느 다리 위에서 나눠먹으면 되니까. 저녁을 위안 삼아 견디면 될 일이라고 피터는 어깨 위의 무거운 짐덩어리를 애써 덜어냈다.

맷에게 부스에 와달라고 하면 어떨까. 그래도 겨우 3달러니까 플래시가 말한 50달러에는 한참 못미치는 가격이었다. 게다가 ‘맷, 정말 미안한데.. 와서 키스해줄래요? 한 번에 3달러예요.’라고 한다면 플래시에게 고개를 숙이기도 전에 스파이더맨의 자존심이 와장창 깨질 게 분명했다. 와, 세상에 나 너무 초라하다. 괜히 세운 바늘 같은 자존심은 플래시 같은 애들을 찌르기는 커녕 스스로의 가슴을 푹푹 찌르는 것 같았다. 너덜너덜해진 마음으로 맷을 만나서 저녁을 먹고 한 바퀴 돌면 풀릴 것이다. 스파이더맨이 위협이라 불리는 기사에도, 스파이더맨을 체포해야한다는 말에도, 그리고 초라한 피터 파커를 발견했을 때도 피터는 어떻게든 잘 견뎌낼 수 있었다.

“저녁에 봐요, 맷.”

어깨를 도닥여주는 손길에 괜히 머리를 툭 기대고 싶어져서, 피터는 어깨에 올려진 맷의 손을 가볍게 잡아 내렸다. 여기서 더 있었다가는 스파이더맨 일뿐만 아니라, 피터 파커의 일까지 맷에게 늘어놓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까지 늘어놓으면 맷도 귀찮아할 것이라는 생각과 동시에, 너무나 비굴해보여서 피터는 제 자존심이 스스로를 찢어놓더라도 말하지 않기를 택했다. 어차피 맷에게 말해도, 지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니까 맷에게까지 작은 모습을 보여줄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피터, 하고 무언가를 더 물어볼 듯 이름을 부른 맷은 금방 “그래, 좀 이따 보자”라는 말만을 남기고는 걸음을 바삐했다. 변호사 일도 바쁠 테니까. 부탁하지 않기를 잘했다며, 멀어지는 맷의 꼿꼿한 등을 쳐다보며 피터가 생각했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마련된 부스로 걸어가길 택했다. 그래도 끝나고 데어데블이랑 같이 빌런이나 몇 명 때려주면 기분이 풀릴 거라는 마법 같은 말로, 제 어깨와 발에 얹여진 무게추가 조금은 덜어졌다. 아까보다 가벼워진 발걸음은 부스에 가까워질수록, 멀리 플래시의 재수 없는 금발과 걱정어린 눈으로 기다리던 해리와 그웬을 보자 다시 무게감을 되찾고 말았다. 피터 파커의 처형식이다. 끝이 나면 플래시에게 고개숙여야할 생각에 벌써부터 스파이더맨이든 거미인간이든 뉴욕의 위협이든 무엇이 되어 도망치고 싶어진 피터는 어깨를 다독이던 맷을 떠올리며 꿋꿋하게 걸었다. 등을 세우고, 어깨를 펴자. 패배자가 되더라도 비굴해지지는 말자.

다행인 것은 스파이더맨의 능력은 어디까지나 위협을 감지하는 것이지, 저 멀리서 낄낄거리며 힐끗힐끗 쳐다보는 플래시 톰슨의 목소리가 들리는 능력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레모네이드를 파는 주택가의 꼬마도 아니고, 시끌벅적한 대학교 축제에서 허그1달러, 키스 3달러를 붙이고 있다는 게 정말 이상해서 그런 비웃음까지 들렸으면 차마 있지 못하고 벌써 스파이더맨으로 달아났을 것이다. 레모네이드 한 잔보다 저렴할 포옹과 키스. 다행이도 파커의 모난 자존심은 제 입술이 이토록 저렴하다는 사실에는 크게 절망하지 않았고, 그냥 누군가에게 그런 모습을 보인다는 게 조금 부끄러웠다. 텅빈 곳에서 누군가 지폐나 동전을 주고 키스해주길 기다리는, 그런 모습 말이다. 부스가 캠퍼스 한 중간에 있지 않다는 사실에 피터는 감사했다.

메이 숙모가 골라준 어색한 정장을 입은 피터는 그렇게 초라하기 그지 없는 키싱부스에서 제 목이 떨어지길 기다리는 사형수가 되었다. 반으로 잘리는 것은 피터 파커의 목숨이 아니라 자존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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