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피터] 위장결혼 - 09
🕶x🕷/소설
2025. 6. 22. 17:25
- 제목미정
- ne님이 말씀해주신 위장결혼 맷피터 설정에 감명을 받아.. 시작되었습니다
- 편나누기가 어려움.. 짧습니다.
사람들이 저마다 가진 체취가 있듯이 각자의 지역이 가진 냄새가 있다. 열정과 희망, 분노와 복수 따위로 이루어진 그 냄새는 땅 위에 오래도록 남아 맷의 감각을 괴롭히곤 했다. 낮과 밤을 따지지 않는 범죄와 욕심을 채우기 위해 애쓰는 속삭임과 그에 짓밟히는 누군가의 비명 따위가 맷이 서 있는 곳에 가득 차 있었다. 주먹을 쥐고 그 냄새와 소리가 향하는 방향을 따라 휘둘러도 옅어지기만 할 뿐이지 근본적인 것은 변치 않는다. 어쩌면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숨이 막혀왔다. 분노만이 남은 주먹에 명분 따위는 사라지고, 그저 답답한 공기에 화풀이를 하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때 스파이더맨이 나타났다. 중요한 순간에는 없었던 주제에 뒤늦게야 나타나곤 하는 피터는 언제나 희망과 삶에 대해 이야기하곤 했다.
그래도 사람들을 구했잖아요.
그 목소리 앞에서 도시는 다시 희망으로 가득해졌다. 얕은 것들 밖에 보지 못하는 피터는 결코 맷이 느끼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있을 것이다. 맷은 피터의 그런 사고방식을 싫어하면서도 좋아했다. 결국 세상을 바꾸는 것은 그런 단순함일테니까.
세탁기에서 나온 슈트는 축축하고 젖어 있었지만 세제 향기만 남아서 깔끔해졌다. 맷은 세탁기에서 두 벌의 슈트와 마스크를 꺼내어 가볍게 털어내고 빛과 바람이 잘 드는 발코니에 널어두었다. 세상은 주먹으로 바꿀 수 없지만,슈트와 마스크에 베인 냄새는 세탁 세제 몇 스푼으로 해결할 수 있었다. 아침으로 먹을 사과를 꺼내고, 토스트 몇 조각에 계란스크램블을 만들며 맷은 닫혀 있는 방안으로 감각을 집중했다. 옅은 숨소리와 느긋한 심장박동으로 피터가 아직까지 잠들어 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책상에 엎드린 채 아직 아침인 줄도 모르고 잠든 피터는 새벽까지 깨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맷은 아침 메뉴가 준비가 다 끝난 뒤에 피터를 깨울 생각이었다.
가짜 다이아몬드가 확실한 반지를 어떻게 할 것인가. 맷은 감각이 뛰어나긴 했지만 처음 보는 물질을 완벽하게 분석할 수 있는 백과사전 같은 능력은 갖고 있지 않았다. 제일 먼저 생각한 것이 백스터 빌딩이었는데, 빌딩이 굳게 닫혀 있었다. 또 달이나 어딘가로 떠난 듯했다. 판타스틱 포에겐 흔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스타크 빌딩이나 어벤저스 타워로 가는 방법도 있었지만 굳이 그곳까지 가고 싶지 않다는 게 맷과 피터의 공통적인 의견이었고, 결국 남은 선택지는 전문가 수준의 지식을 갖춘 피터 뿐이었다. 피터는 모처럼 상자에서 오래 전부터 사용하던 현미경이나 과학도구 따위를 꺼냈다. 거미줄 용액을 만들 때는 쓰지 않아서 오랫동안 손을 타지 않았던 물건들이었다. 전문분야가 아니었던 맷은 책상 위에 도구를 늘어놓는 피터에게 꼭 조심하길 당부하고, 반지를 맡겼다. 집이니까 저번처럼 일이 생겨도 괜찮을 테지만 가능하면 일이 생기지 않는 편이 나았다. 피터와 섹스하는 것이 싫은 건 아니었지만, 정신이 온전하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제 욕망을 드러냈던 행위에 맷도 내심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다. 제대로 동의를 받아야했던 문제였다. 그 날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피터도 위기감은 느끼고 있었던 모양인지, 장갑에 보호경까지 단단히 착용하고 잠에 빠져 있었다. 옷은 맷의 티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었지만 말이다.
맷은 식탁 위에 샐러드와 토스트, 스크램블을 담은 접시를 모두 늘어놓은 뒤에 천천히 피터가 있는 방으로 가서 멋대로 문을 열었다. 잠금장치가 걸려 있지 않은 문은 쉽게 열렸고, 책상에 엎어져 있는 피터의 숨소리가 좀 더 선명하게 들렸다.
“Pete, 일어나. 아침이야.”
맷은 잠든 피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체온과 심박이 모두 정상적이라는 것을 손바닥의 감각을 통해 느낄 수 있었다. 맷이 가볍게 어깨를 흔들자 잠들어 있던 피터가 끙끙 앓는 소리를 내며 깨어났다. 느리게 뛰던 심장도 점점 평소와 같이 점점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운동선수와 같은 빠르고 큰 심장소리가 피터가 가진 특징 중 하나였다.
“좋은 아침이에요…”
길게 하품을 하며 의자에 등을 푹 기댄 피터가 인사를 건넸다. 벗는 것을 깜빡한 것인지 보호경이 피터의 콧등을 꽉 누르고 있었다. 라텍스 장갑도 두 겹이나 끼고 있는 것이 재밌어서 맷이 옅게 웃었다. 신경쓰지 않는 척, 모른 체하면서도 피터도 어느 정도는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피터에게서 그날과 같은 문제는 없지만 혹시 모른다는 이유로 맷은 고개를 숙여 의자에 앉아 있는 피터의 뺨과 목 부근에 가볍게 코를 댔다.
“간지러워요, 맷!”
“검사하는 거야.”
뺨과 목에 닿는 숨결이 간지러워진 피터가 움찔거렸다. 맷은 그 외침에도 피터의 등과 배 부근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리며 혹시 놓친 것은 없지 않은가 꼼꼼히 확인했다. 맷의 티셔츠와 바지는 피터의 덩치에 비해서 꽤 큰 사이즈여서 손을 넣기 적절했다. 슈트도 세탁을 위해서 전날에 빼앗긴 피터는 맨살에 닿는 맷의 손길에 웃음을 터뜨릴 뿐이었다. 피터의 체취도 여전했고, 무언가 달라진 것은 없었다. 화학물질이 조금씩 새어나오던 반지는 확실히 밀봉되어 책상과 멀찍이 창가에 놓여 있었다. 검사가 끝나고도 여전히 게으르게 의자에 폭 박혀 있는 피터를 억지로 일으켜 세운 맷은 식탁까지 그를 끌고 갔다. 맷에게 거의 들리다시피해서 식탁으로 가는 동안에도 하품을 늘어지게 하던 피터는 식탁 앞에 가서는 스스로 서서 의자에 앉았다.
”지금까지 보던 거랑, 음— 이거 맛있어요, 아무튼 다른 종류 같았어요.“
”제대로 씹고 말해.“
토스트를 우물거리며 말까지 하려고 하는 피터를 맷이 가볍게 타박했다. 피터의 입가에 묻은 빵가루가 피터가 여기저기 떨어지고 있었다. 급하게 음식을 가득 넣고 씹는 피터에게 우유가 든 잔을 밀어준 맷은 팔짱을 끼고 피터가 제대로 이야기하길 기다렸다. 우유로 목까지 축인 피터는 자신을 향해 있는 맷의 표정을 보고 장난스레 웃었다. 맷의 흐릿한 푸른 눈이 피터를 향해 있었다. 피터는 종종 맷이 정말로 보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때가 있었다. 시각으로 보는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냥 그럴 때가 있었다. 맷과 눈이 마주칠 때면 거짓말이나 장난으로는 가려지지 않는 생각들을 늘어놓고 말았다.
잠시 말을 고르며 피터는 유리잔을 만지작거렸다. 우유잔 표면을 검지로 훑자 물방울이 모여 손가락 표면을 따라 움직였다.
”약은 흔해요. 한 달에 몇 번은 약물 중독 반응으로 쓰러진 노숙자를 안고 응급실로 가는 게 보통의 루틴일 정도로요. 그런 것들은 갱단들이 각자 구역에서 팔아치우는 것들이 많죠. 빠른 효과에 높은 중독성. 그리고 그렇게 판 약들은 늘 사람들이 잘 보지 못하는 곳으로 가요. 굳이 손길을 줄 필요도 못느끼는 그런 곳이요. 굳이 깨끗하게 포장할 필요도 없을 테니까 편리하잖아요.“
“보통은, 그렇지.”
그렇게 유쾌한 이야기는 아니다. 피터는 맷의 굳은 표정을 보며 작은 숨을 내뱉었다. 응급실에 안고 간 약물 중독자는 대부분 저소득층이어서, 그런 이유로 제대로 봐주지 않는 의료인도 많았다. 모두를 돕고, 살리고 싶은 스파이더맨에게는 즐겁지 않은 일이었다.
“가짜 다이아몬드에 들어 있는 성분은 그것보단 약해요. 그리고 빠르게 휘발되죠. 단단하게 뭉쳐서 코팅한 것 같은데, 아마 반지나 목걸이로 쓰다보면 코팅이 천천히 벗겨지면서 그 안의 물질이 새어나오도록 의도한 모양이에요. 천천히 약물에 절여지는 거죠. 중독 위험은 없는 것 같은데…”
피터가 입술을 꾹 깨물며 말끝을 흐렸다. 하지만 굳이 이걸 보석으로 유통할 필요가 있을까. 성분을 알았다고 해서 그 의도가 완벽하게 해명되는 것은 아니었다. 다이아몬드인 줄 알았던 아름다움이 약물이라는 사실만 남을 뿐이다. 누가 무엇을 위해서. 탐정이 된 기분이었다. 단서가 몇 개 없지만 어떻게든 범인을 추적해야 하는 탐정놀이에 갇혀버린 피터는 긴 한숨만 내쉬었다.
“…내가 알아볼 테니까 그동안 얌전히 있어.” 맷이 단호하게 말했다.
“약 냄새를 쫓는 건 내가 더 나을 거야. 헬스키친 사건이기도 하고.”
“지금 구역으로 심술 부리는 거예요, 맷?”
피터가 미간을 찌푸렸다. 화가 난 모양이다. 아까는 슬픈 기색이 가득했던 목소리가 이제는 짜증이 녹아서 쿵쿵 울렸다. 맷은 피터에게 어떤 말을 해서 잠시 그를 밀어둘 수 있을지 고민했다. 스파이더맨이 약하기 때문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약물에 노출되었을 때의 결과를 아는데도 피터가 혼자 제멋대로 헬스키친 안을 누비게 둘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강도 사건과 가짜 다이아몬드의 연관성도 밝히지 못했는데, 피터가 또 강도를 잡으려하다가 사건에 휘말릴지도 몰랐다. 그리고 거기엔 경찰이나 그보다 높은 권력이 엮여있을 수도 있었다. 스파이더맨을 싫어하는 요원들처럼 또 그를 미워하는 누군가가 있을지도 모르는 문제였고, 피터는 언제나 멋대로 행동하는 편이었으므로 가능하면 확실해질 때까지는 문제에서 떨어뜨리는 것이 낫다는 게 맷의 판단이었다.
“피터 파커의 신분도 위험한 때잖아. 집 주위를 감시하는 사람도 있고.”
“잘 피해서 다니고 있는 걸요. 이 정도는 문제도 아니에요!”
“피터, 냉정하게 생각해. 넌 요주의 인물이고, 조금만 사건에 엮여도 다시 위험해질 거야. 그러니까 같이 살기로 한 거잖아.”
맷이 차분하게 말하는 동안에도 피터의 심장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화가 난게 분명하다. 피터의 숨소리와 심장박동, 주먹에 들어간 힘 따위는 맷에게 피터의 감정이 거칠어졌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아까까지는 토스트가 맛있다며 신나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것으로는 풀리지 않을 정도로 화가 나 있다. 스파이더맨을 마음대로 사건에서 제외시키는 것은 맷도 원하는 결과는 아니다. 나중에는 같이 갈 것이고 함께 하겠지만, 지금 당장은 조심해야한다는 게 맷의 생각이었다.
“넌 나랑 부부잖아. 정체가 알려지면 우리 둘다 위험해지는 거야.”
맷은 하고 싶지 않은 말도 꺼내야했다. 피터에게 책임을 얹어주고 싶지 않았으나 피터를 설득할 말이 부족했다.
“…알았어요.”
맷의 설득에 결국 고개를 끄덕인 피터가 발을 쾅쾅 울리며 방으로 걸어들어갔다. 화가 난 게 분명해. 쿵쿵 바닥을 울리는 발소리를 들으며 매튜가 생각했다. 그래도 다행인 것은 피터가 심하게 화를 내며 언쟁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피터와 언쟁을 시작하면 맷은 대체로 승률이 좋지 못했다.
맷은 식탁에 앉아 긴 한숨을 쉬었다가 테이블 위에 남은 음식들이 담긴 접시들을 모두 싱크대에 두고, 가운을 벗고 출근할 준비를 시작했다. 피터가 말을 잘 들을리도 없음을 알지만 그렇다고 멋대로 헬스키친을 쑤시고 다니게 둘 수도 없는 노릇이다. 피터가 기절하거나 약에 취한 상태로 골목 따위에 있을 가능성을 생각하니 아찔해진 맷은 이것에 대해서는 단호히 굴기로 했다. 스파이더맨은 어디까지 바닥이 있는지 상상하지 못하는 면이 있었다. 사람들의 다정한 면을 먼저 보고, 희망을 먼저 골랐다. 그래서 쉽게 다치고, 넘어졌다. 피터가 기절할 때 잡아줄 사람이 없다면 그 상태로 위험에 노출된다는 뜻이었고, 맷은 변호사 일로 하루종일 피터에게 붙어 있을 수 없었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어. 매튜는 마음을 단단히 했다.
“피터—, 다녀올게.”
맷이 현관문을 나설 때까지도 피터는 방안에 박혀 있었다. 키스가 없는 출근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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