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피터] 위장결혼 - 11

🕶x🕷/소설

2025. 6. 28. 17:05

마음이 불안할 때 피터가 향하는 장소는 대체로 비슷했다. 뉴욕의 야경이 가장 잘 보이는 빌딩 꼭대기나 다리, 그런 풍경으로도 진정되지 않을 때는 데어데블의 집으로 가곤 했다. 무엇이든 이야기해도 괜찮을 곳이라는 건 생각보다 많지 않아서 갈 수 있는 장소가 한정적인 탓도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맷의 집에서 살고 있으니까 그 장소는 탈락이다. 결국 한참을 방안에서 스파이더맨의 책임감과 그걸 이해해 주지 못하는 데어데블에 대한 작은 원망, 그리고 맷에게 민폐를 끼칠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뒹굴던 피터가 택한 곳은 메이 숙모의 집이었다. 스파이더맨은 환영받지 못할 테지만, 피터 파커는 언제나 환영받을 장소. 어린 시절의 추억 따위들이 남아 있는 메이의 집은 피터가 마음을 진정시키기에, 그리고 다시 무언가를 결심하기에 좋은 곳이었다.

“부족하지 않니? 휘트케이크는 얼마든지 더 있단다.”

메이가 자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벌써 두 접시째 비운 것을 보았으나 메이의 기준에서는 여전히 적당한 축에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더 이상 먹었다가는 웹스윙을 할 때 멀미를 할지도 모를 정도여서 피터는 빵빵해진 배를 두드리며 고개를 저었다.

“2시간만 더 주시면 얼른 소화 시킬 수 있겠지만…. 지금은 무리예요, 메이—!”

“네가 올 줄 알았으면 먹을 걸 더 사뒀을 텐데.”

메이의 표정이 아쉬움으로 젖었다. 연락도 없이 밤에 찾아온 피터를 환영해 준 데다가 아침까지 거하게 차려준 메이 숙모는 여전히 피터에게 주고 싶은 게 많은 모양이었다. 메이의 표정을 살핀 피터는 과장된 웃음소리를 내며 배에 공기를 불어 넣어 그 위에 손바닥을 얹었다.

“어휴—. 이미 사랑으로 가득 차 있답니다, 부인.”

피터의 농담에 메이가 소리 내 웃었다. 계속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가는 끝없이 음식이 등장할 것 같다는 생각에 피터는 냉큼 의자에서 일어나 메이의 뺨에 가볍게 뽀뽀를 한 후 테이블의 접시들을 치우기 시작했다. 아침부터 열심히 비운 접시들을 치우는 동안에도 메이가 즐거워 보여서 피터는 안심할 수 있었다. 언제나 환영받을 수 있는 집, 메이는 피터가 갑자기 온 이유도 묻지 않았다. 그저 현관문에 서 있는 피터를 보고 웃으며 얼른 들어오라 말해줄 뿐이었다. 피터는 설거지를 하면서도 쉴 새 없이 말했다. 데일리 뷰글의 1면 기사 이야기나 메이 숙모의 옆집에 살았던 신사분의 이야기 따위가 그 주제였다. 평소였다면 월세방이나 룸메이트 이야기도 했을 테지만, 이미 그곳을 나온지 오래된 피터는 메이에게 ‘살고 있는 집’에 관하여 이야기를 꺼낼 수가 없었다. 변호사 맷 머독과 동거하고 있으 사실은 그와 결혼까지—맷이 피터를 구하기 위해 멋대로 해버린 일이었지만—했다는 사실을 차마 메이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지 못했다.

메이는 설거지하는 피터의 등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피터”

메이가 식탁에 두 손을 차분히 올렸다. 피터의 두 손에는 접시와 수세미가 들려 있었다.

“무슨 일이든 말해도 된단다.”

쨍그랑—

거품이 칠해진 접시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크고 작은 파편으로 흩어진 접시 조각들을 보며 당황한 피터가 허둥지둥 유리 조각을 정리하려는데 메이가 빗자루를 챙겨왔다. 피터를 밀어내고 빗자루로 깨져버린 접시를 정리하는 메이는 능숙하고 차분했다. 피터는 손에 거품을 묻힌 채로 어정쩡하게 그 곁에 서 있어야만 했다.

“벤도 그랬지만, 파커들은 비밀이 많은 게 문제야.”

“메이 숙모…, 그게…,”

젖은 손이 피터의 바지에 물을 들였다. 메이가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지? 피터의 심장이 터질 듯 쿵쾅거렸다. 피터가 멋대로 맷과 혼인신고를 한 상태로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이나, 피터의 성이 머독으로 바뀌어버린 일, 그리고 맷에게 마음이 상해서 집에 들어가기 싫다는 이유로 메이의 집으로 도망치듯 왔다는 사실 따위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결국 그 시작에는 스파이더맨이 있어서 피터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메이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 무엇도 말하지 못하는 처지의 피터 머독은 그저 죄인처럼 제 바지를 꽉 쥘 뿐이었다.

“월세방 이야기는 들었어. 혹시나 돈이 없는 거면 숨길 필요 없어, 피터.”

메이는 아직 모든 것을 알지는 못한다. 피터는 눈을 끔뻑거리다가 정신을 붙잡았다.

“아…, 아니에요! 저 요즘은 뷰글에서 일해요!”

“뷰글? 다시 사진 기자로 일하는 거니?”

메이가 놀라며 되물었다. 열다섯부터 했던 일로 다시 돌아간 피터가 놀라울 만도 했다. 발전도 변화도 없이 다시 돌아가고 말았으니 말이다. 뷰글에 자리를 받은 것도 아니고, 정말로 어릴 적 했던 사진을 파는 프리랜서가 되어버린 피터는 그 사실은 메이에게 말하지 않기로 했다. 돈 문제는 전혀 걱정하지 말라며 웃으며 말하는 피터의 표정이 미심쩍은 듯 메이가 피터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선 앞에서 피터는 언제나처럼 밝고 태연한 척 농담을 하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오랜 시간 동안 메이를 속여온 피터는 언제나 그런 식으로 숙모를 안심시키곤 했다.

“지금은… 맷의 집에서 살아요.”

피터가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결혼 이야기는 모두 지워버렸다. 메이가 변호사 맷과 안면이 있어서 다행이다. 변호사라는, 보여주기에 적절한 직업을 가진 맷 머독은 월세방 주인에게도 그랬지만 메이에게도 꽤나 믿음직스러운 이미지로 남아 있었다. 어쩌다 보니 신세를 지게 되었다며, 곧 나올 생각이라고 피터는 결혼에 관한 이야기를 제외하고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피터 파커에게서 정보를 털고 싶어 하는, 스파이더맨을 싫어하는 정부직의 사람들만 잘 해결된다면 정말로 나올 생각이었다. 어차피 가짜 결혼이었고, 언제까지 맷에게 신세 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매튜의 침대를 나눠쓰면서 지내는 건 편하지만 면목이 없었다. 맷이 마련해준 피터의 작은 방도 마찬가지였다. 빌려 쓰는 처지다. 위장결혼에서 철저히 도움받는 처지인 피터는 언젠가 이 빚을 갚아야 한다는 걸 알았다. 신혼부부를 연기하는 일도 결국엔 끝이 있기 마련이다. 낡은 침대로 돌아가야 할 때가 돌아올 것이다. 그땐 그 모든 게 그립겠지. 폭신하고 편안한 침대나 소파, 그리고 부드러웠던 입맞춤이 떠올랐다. 맷이랑 키스하는 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닿아 있는 게 좋아서 어느 순간부터는 그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엉망진창인 삶을 잠깐 잊게 해주는 순간, 그때만큼은 이것이 가짜 관계라는 생각도 희미해져서 정말로 단단한 곳에 발을 붙이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피터의 얼굴이 조금 달아올랐다.

메이에게는 그저 맷에게 도움을 받아서, 잠시 신세를 지고 있으며, 다시 나올 것이라는 사실만을 나열했다. 메이는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피터를 보며 생각에 빠져 있었으나 더 이상 나무라거나 걱정이 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다행히 잘 넘긴 모양이라고 피터는 생각했다.

“피터, 혹시라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메이가 피터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진지한 메이의 표정에서 피터는 자신이 무언가 놓치는 게 있었는지, 혹여 메이에게 걱정 끼칠 일이 있었는지 생각해 봤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때 피터의 주머니에서 벨소리가 울렸다. 휴대폰에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였다. 피터가 잠시 망설이며 서 있는데, 메이가 어깨에서 손을 떼고 깨진 접시 조각을 말끔히 치우기 시작했다. 잠시 메이를 살피던 피터도 계속되는 알림에 휴대전화를 꺼내어 화면을 확인했다. 벤 유릭에게서 온 전화였다.

 


 

스파이더맨이 하는 잠입은 불법적인 경우가 많았다. 가끔 경찰에서 호의적일 때에는 함께 가는 경우도 있었지만, 스파이더맨을 좋아하는 형사를 만나는 일 자체가 허들이 높았다. 얼굴을 드러내지 않는 불법 자경단원을 환영해 주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스파이더맨은 특히나 더 미움을 사는 편이었다. 그건 모두 데일리 뷰글이 오랫동안 선동 기사를 낸 탓이다. 하지만 덕분에 피터가 편한 일도 많았다. 뉴욕의 사랑을 받는 데일리 뷰글 언론사는 그 이름 덕분에 뷰글 사원증을 내밀면 어디든 들어가기 편해졌다. 불법 자경단원 스파이더맨보다는 뷰글 사진기자 피터 파커가 환영받을 수 있을 때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도 비슷하다. 피터는 오랜만에 제대로 된 카메라를 목에 걸고 기자다운 태도로 당당하게 건물 로비로 들어갔다. 비욘드 코퍼레이션. 얼마 전 피터가 면접을 보았던 그 회사였다.

“유릭—! 과학 기사도 내실 줄은 몰랐어요.”

먼저 로비에 들어와 있던 유릭을 발견한 피터가 손을 흔들며 다가갔다. 평소처럼 조금 낡은 정장에 코트 차림의 유릭은 손에는 작은 수첩을 들고 있었다. 딱 사람들이 생각하는 기자의 모습이다. 모처럼 제대로 된 일을 한다는 생각에 피터는 기분이 좋았다. 면접을 볼 때에는 주눅이 들어서 왔던 회사에 카메라를 들고 들어서는 것도 꽤 재밌는 경험이었다.

“과학 일은 나도 전문이 아니라서 말이야. 그리고… 넌 눈썰미가 좋잖니, 피터.”

유릭이 나지막이 말했다. 비밀스러운 대화를 하듯 작은 목소리여서 피터도 유릭을 따라 목소리를 죽였다. 안내해 줄 직원을 기다리는 동안의 짧은 진짜 기자의 시간이었다. 아마도 무언가 찾아야 하는 게 있는 모양이라고 피터는 스파이더맨과 기자로의 경험으로 벤 유릭의 말에 담긴 뜻을 알아차렸다. 유릭이 주로 맡는 사건은 과학 부문에 들어가는 홍보 기사보다는 정치나 사회 부문에 들어가는 글이었다. 몰래 뒷돈을 받는 정치인이나 사실은 사악한 일을 하고 있었다는 기업 이야기, 혹은 범죄에 피해를 당한 피해자들에 관한 기사를 쓰는 게 벤 유릭이 주로 하는 일이었다. 조나는 그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잠입 취재의 기분이다. 피터는 카메라의 뷰파인더에 눈을 대고 로비 이곳저곳에 렌즈를 향했다. 회사 로비는 면접을 왔을 때 느꼈던 것처럼 다른 회사들에 비해 크고 넓었다. 사업도 꽤나 여러 방면으로 크게 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마땅히 여기선 이상한 게 없다. 안내해 줄 직원이 도착하고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나누며 걷는 유릭의 뒤를 따랐다.

면접을 보러 왔을 때는 둘러보지 못했던 터라 피터는 꽤 신이 나 있었다. 공학, 과학 따위는 피터 파커의 전문 분야였다. 공학 잡지를 보며 새로운 기술에 대해 언급이 있으면 그 기술에 대해 하루 종일 찾아보며 시간을 보낼 수도 있을 정도로 좋아했다. 물론 스파이더맨 일 때문에 그렇게 시간을 보낸 적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지만 말이다. 직원이 소개해 주는 새 물질이나 기술을 만드는 실험실과 개발한 물질들을 피터는 렌즈에 담았다. 셔터를 누르면 찰칵 소리를 내며 피터가 보는 프레임 속 광경이 작은 카메라에 남겨졌다. 신생 기업치고는 규모가 컸지만, 만들고 있다는 신소재나 기술은 적다. 이것으로 이 회사가 돌아갈 수 있는 걸까 하는 의문이 잠깐 들었으나 일단은 소개해 주는 것에 고개를 끄덕이고 열심히 사진을 찍었다. 벤 유릭은 직원의 말에서 반 이상은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소개는 여기까지입니다.”

직원이 말했다. 여전히 가보지 못한 남은 층이 있었다.

“다른 곳이 더 있지 않나요?” 유릭이 수첩을 손에 쥐고 말했다.

“위층은 보안 구역이라 소개해 드릴 수가 없어요.”

보안 구역. 피터는 눈을 굴리며 그것의 의미를 떠올렸다. 회사의 기밀이기도 하고, 가끔은 그게 범죄의 증거가 모인 장소이기도 했다. 유릭이 무언가 의심하는 게 있다면 당연히 그곳에 있을 것이다. 다른 것은 얼마든지 소개를 더 할 수 있다며 직원은 유명 신문사 기자에게 친절히 답했다. 유릭을 잠시 힐끗 보던 피터는 잠시 화장실을 가도 되겠느냐고 물었다. 화장실은 복도 끝에 있다는 직원의 답변에 고개를 끄덕이고 방문을 열고 나서며 유릭에게 윙크를 남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유릭만큼은 아니었으나 피터도 데일리 뷰글에서 잔뼈가 굵은 기자였다.

게다가 스파이더맨이기도 하지.

다른 층으로 올라가려면 보안카드를 엘리베이터에 스캔해야만 했다. 하지만 스파이더맨은 벽 정도는 간단히 타고 오를 수 있는 힘이 있었다. 혹시 카메라가 있는지 힐끗 주위를 보며 스파이더센스로 위험 요소를 체크한 피터는 망설임 없이 엘리베이터 문을 강제로 열고 통로를 기어 올라갔다. 보통 이런 곳에는 카메라도 두지 않는다는 것을 피터는 잘 알고 있었다. 어느 누가 엘리베이터 통로를 타고 오르리라 생각할 수 있을까. 그리고 스파이더맨은 그 허점을 찌르는 것을 좋아했다. 간단히 올라가서 엘리베이터 문을 강제로 열고 위층으로 올라간 피터는 아래와는 확실히 다른 분위기에 이곳저곳 눈을 돌렸다. 스파이더센스가 울리지 않는 것을 보면 카메라도 없는 게 분명했다. 어느 기업이 카메라도 두지 않고 보안구역을 만들까. 자신들이 남겨지면 안 될 일을 하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말이다. 여러 문이 있는 복도를 조심스럽게 걸으며 피터는 제 감을 믿기로 했다. 스파이더센스가 울리지 않는 문들은 간단히 넘겨버리고, 조금이라도 울리는 곳이 있으면 그곳으로 들어가자. 피터의 감각은 확실한 이유는 알려주지 못했으나 경고는 확실히 해주었다.

“오—, 세상에. 내가 들어갈 뻔한 회사가 보석 제조사라니….”

감각을 따라 문 안으로 조심스럽게 들어간—사실 잘 열리지 않아서 힘으로 열었다— 피터는 반짝이는 다이아몬드가 가득 들어가 있는 상자들을 발견했다. 만든 것을 보관하는 창고인 모양이었다. 보석을 이렇게 마구잡이로 보관하는 사람이 어딨어. 피터는 이것들이 가짜 다이아몬드임을 보관 방식을 통해서 알 수 있었다. 게다가 스파이더센스가 미친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함부로 만져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피터는 상자의 내용물만 확인한 후 카메라 셔터를 눌러 다이아몬드와 그것들이 담긴 상자들을 찍었다. 제조하는 곳이 있을 것이다. 몸을 숨겨 천천히 다른 곳으로 발을 옮기며 피터가 생각했다.

제조 시설은 이곳에 없을지도 모른다. 피터가 발견한 것은 가짜 다이아몬드와 그것의 원료가 될 만한 화학품들이었다. 이곳이 연구시설일지도 몰라. 피터는 약품이 담긴 병을 사진으로 남겼다. 일단은 다시 자리로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화장실을 너무 오래가 있으면 의심을 사게 될지도 모른다.

Tingle

스파이더센스가 크게 울렸다. 피터의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아, 위험해. 피터는 주머니 속의 마스크를 재빨리 꺼내어 썼다. 슈트가 없었다. 맷의 집에 널어둔 채로 마스크만 챙겼던 것이 그제야 생각이 났다. 일단 나가자며 움직이려는데 큰 소리가 나며 땅이 흔들리고, 두통은 더욱 강해졌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며 진동도 커지는 것이 마치 지진이 일어난 듯했다. 나가야 해. 당장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피터가 움직이기도 전에 눈앞의 벽이 무너지는 게 빨랐다. 벽이 큰 구멍이 뚫리며 나타난 커다란 덩치의 사내는 피터를 발견하자마자 사납게 달려들었다. 그 머리통이 얼마나 단단하고 강한지 밀려보지 못한 사람은 상상도 못할 것이다. 피터는 라이노에게 밀려 등이 벽에 부딪혔다. 마스크를 쓰고 있어서 다행이다. 아픔보다는 그런 생각이 앞섰다. 라이노에 힘이 몰린 스파이더맨의 몸뚱이는 가볍게 벽에 부딪히고 척추가 으스러지는 듯한 고통을 겪었다. 뷰글에서 스파이더맨의 약점은 등이라고 기사를 낸 게 분명해. 스파이더맨이 생각했다.

“스파이더맨—!!!”

“아윽, 오랜만… 이네, 라이노…!”

스파이더맨이 신음을 삼키며 애써 말했다. 여전히 벽과 부딪힌 몸을 놓아줄 생각이 없는지 라이노는 더욱 콧김을 뿜으며 강하게 부딪혀왔다. 벽에 박혀 있던 피터는 결국 그 힘에 밀려 부서지는 벽과 함께 뒤로 밀려났다. 라이노는 강한 힘으로 스파이더맨을 방패처럼 써먹었다. 딱딱한 벽에 부딪히는 것은 피터의 몸이었고, 라이노는 아픔도 고려해 주지 않고 무작정 앞으로 달렸다. 회사의 건물이 부서지는 것은 신경도 안 쓰이는 모양이었다. 온몸이 부서지는 것 같아. 강한 힘에 밀리고, 등으로 온몸이 부딪힌 피터가 통증에 표정을 찡그렸다.

일단 라이노를 멈춰야만 한다. 그 생각이 늦었던 모양이다. 마지막 남은 강화 유리창과 피터가 충돌하고, 스파이더맨의 몸은 어느새 공중에 떠 있었다. 몇십 층은 넘는 빌딩 위에서 떨어져야 한다니. 온몸에 느껴지는 아픔에 정신을 못 차리던 피터는 제 목에 걸려 있던 카메라도 함께 떨어지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 냉큼 그것으로 손을 뻗었다. 일단 카메라부터 지켜야 해. 안에 들어 있는 메모리 카드가 망가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중력에 떨어지는 것은 익숙하니까. 피터는 카메라에 웹슈터를 쏘아 어떻게든 손에 쥐었다. 빠르게 떨어지는 몸은 얼른 거미줄을 쏘아 해결하면 된다. 거의 빌딩 바닥에 가까워지기 직전에야 겨우 거미줄을 놓은 피터는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빌딩 뒤편의 쓰레기통에 안전하게 처박힐 수 있었다. 쿵 하는 소리가 나긴 했지만, 빌딩 위에 있을 라이노는 스파이더맨이 어디로 떨어졌는지 알 수 없을 것이다.

온몸으로 한 층의 벽을 다 부수면 누구라도 제정신일 수 없을 거야.

피터는 뼈가 으스러진 듯한 통증에 숨을 헐떡였다. 다행히도 손에는 카메라가 쥐어져 있었다. 기자로의 본분을 잊지 않은 피터는 카메라를 품에 안고 정신을 잃기 전에 스파이더맨 마스크를 벗어 주머니에 넣었다. 혹시라도 환경미화원이 발견해 준다면 어쩌다 쓰레기통에서 자는 노숙자로 생각해 주는 편이 나았다. 손이 떨리고, 호흡이 흐트러졌다. 뼈가 가루가 된 듯했다.

시야가 흐릿해지고 피터는 카메라를 손에 쥔 채 고개를 떨궜다. 쓰레기통은 스파이더맨의 좋은 친구였다.

 


 

자신들이 팔아치운 보석을 다시 훔치는 회사가 말이 되는 걸까. 맷과 포기는 다시금 쌓인 문제와 고민에 끙끙 앓고 있었다. 강도 혐의를 받은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라도 결국엔 그것을 유통하는 회사를 파고들어 봐야 할 것 같았다. 게다가 맷에게는 가짜 보석이—마약이— 헬스키친에 유통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커다란 걱정거리도 있었다. 비욘드 코퍼레이션에 대해 알아보았지만, 나오는 정보는 여러 신기술과 신소재를 개발한다는 전형적인 홍보문구였고, 회사의 회장은 이름만 대충 적혀 있을 뿐 그에 관한 이야기는 어디에도 없었다. 보통 이 정도가 되는 회사들은 회장들이 직접 나서서 홍보하며 이야기하기 마련인데 말이다. 스타크 인더스트리나 오스코프 같은 기업들이 그러하듯 새로운 기술은 언제나 그 얼굴을 앞세우기 마련이었다. 이렇게 정보가 적다는 것은 의심스럽다. 결국 언제나처럼 맷이 가장 의심하는 것은 킹핀, 윌슨 피스크였다.

헬스키친을 넘어서 뉴욕의 범죄를 주무르는 피스크는 이러한 문제에 늘 중심에 있곤 했다. 킹핀의 페이퍼 컴퍼니를 몇 번이고 들쑤신 적이 있었던 맷은 이번에도 킹핀의 짓이 아닐까, 생각했으나 킹핀 치고는 방식이 엉망진창이었다. 비욘드 코퍼레이션은 꽤 멋들어지고 큰 기업이지만, 강도 짓은 킹핀의 성미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팔았던 것을 다시 훔친다는 것은 범죄의 제왕이 할만한 일도 아니었고, 보석으로 약을 유통해 봤자 돈이 있는 사람들 정도나 엮여들 뿐이었다. 보석을 좋아하거나 선물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이들 말이다. 이런 일을 할 만한 사람은 좀 더 품위를 신경 쓰지 않는 쪽이 어울린다.

“보험금을 노린 게 아닐까?”

펜으로 책상을 툭툭 두드리며 포기가 말했다. 뉴욕은 히어로들이 몰려 있는 만큼 범죄도 잦았다. 귀금속 가게는 특히나 강도가 잦았고, 가게들은 대부분 손해 보험에 가입되어 있을 게 분명했다.

“가게 운영하는 것보다 그쪽이 더 효율적이잖아. 사람을 고용해서, 자기 가게에서 훔쳐달라고 하는 거지!”

“…그리고 그 강도는 부도덕한 경찰이다? 범죄 드라마잖아, 포기.”

맷이 웃음을 터뜨렸다. 포기는 범죄 드라마를 무시하지 말라며 제 추측을 늘어놓고 있었다. 경찰과 가게 주인들이 연결되어 있다는 생각은 꽤 그럴 듯했다. 게다가 맷이 피터와 함께 미행했던 경찰은 그 보석이 가짜인 것도 모르고 여자 친구에게 선물하기까지 했으니 말이다. 알았다면 약으로 뭉쳐져 만들어진 보석을 여자 친구의 손가락에 끼워주지 않았을 것이다. 기업과는 별개로 또 다른 욕망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된다면 확실히 강도에 엮인 아이에게 혐의가 몰린 이유와 스파이더맨이 잡은 강도의 수가 줄어든 이유도 설명이 되었다. 문제는 다시 가짜 보석을 유통하는 기업의 의도는 다시 알 수 없다는 거였지만. 포기의 의견을 들으며 맷은 피터와 함께 기업에 침입할 생각을 했다. 피터에게 사과도 겸해서 연락하면 되지 않을까. 일단 가짜 보석이 유통되는 것을 막고, 강도를 처리하는 것은 그 뒤의 일이었다.

벤 유릭. 전화. 벤 유릭. 전화.

맷의 휴대전화에서 음성 알림이 울렸다. 시각장애인용으로 개조된 휴대전화는 언제나 알림을 읽어주도록 설정되어 있었다. 맷은 휴대전화를 손에 쥐고 음성으로 통화를 연결했다.

“데어데블이 필요하네!”

다급한 목소리였다. 악마를 불러내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맷은 유릭에게 이유를 묻지 않았다. 함께 통화를 들은 포기도 맷을 막을 생각은 없는 듯했다. 얼른 가보라며 등을 떠밀어주는 포기를 향해 희미한 미소를 지어준 맷은 넥타이를 풀어 헤치고 옷을 벗어 던졌다. 마스크를 쓰면 데어데블이 되어 있다. 창문을 보는 사람들이 누구도 없으며 주위에 데어데블의 등장을 알아차릴 사람이 없음을 레이더센스로 확인한 맷은 재빠르게 몸을 창밖으로 던졌다.

 


 

사라진 기자를 찾아달라는 부탁이었다. 한참을 뛰어다녔는지 유릭은 땀에 젖어 있었고, 담배 냄새가 났다. 떨리는 손으로 다시 담뱃갑을 꺼내는 유릭의 손에서 담배를 단호히 쳐낸 데어데블은 유릭에게서 사라진 이의 정보를 들었다. 나이는 이십 대 후반이며 남성이고, 조금 어려 보이는 외모, 키는 맷보다는 작다는 어렴풋한 설명들이었다. 함께 회사에 들어갔는데 갑자기 건물이 흔들려서 대피했으나 화장실에 간 기자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설명하는 유릭은 죄책감에 젖어 있었다. 초감각을 갖고 있는 맷에게 사람을 찾는 일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사람이 살아만 있다면 말이다. 사라진 지 이제 서너 시간이 된다는 기자. 맷은 유릭이 있었던 건물을 우선으로 살펴야할지 고민했다.

“피터를 부르는 게 아니었는데…” 유릭이 중얼거렸다.

피터. 익숙한 이름을 들은 데어데블이 유릭을 돌아보았다.

“사라진 기자 이름이 피터입니까?”

“그래, 피터 파커. 비욘드 코퍼레이션이 의심스러워서… 살펴보려고 불렀는데, 갑자기 건물이 흔들렸어.”

“…정신이 없었겠군요.”

“대피하지 못한 거라면 큰일이야.”

벤 유릭이 괴로운 목소리로 말했다. 무슨 일이 생겼다면 자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유릭의 말에 맷은 주먹을 꽉 쥐었다. 피터가 뷰글에 사진을 팔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것은 피터가 오랫동안 해온 일이었고, 기자 일도 종종 해오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혹시 회사 안에서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가짜 보석과 회사의 관계를 이미 알고 있는 데어데블은 피터가 사라졌다는 층을 조사해야 할지 고민하며 유릭을 두고 먼저 빌리 클럽을 던져 무너진 회사 건물 근처로 향했다. 빌딩이 무너진 곳은 수십 층 위였고 아래층은 멀쩡했다. 피터라면 무너진 층에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스파이더맨은 언제나 제일 위험한 곳을 향하는 편이었으니 말이다. 빌리 클럽을 던져 위로 올라야 할지 고민하며 맷은 감각을 집중했다. 건물 위층에서 떨어진 유리조각과 화학품, 먼지들이 감각에 잡히고, 시끄러운 도시의 소음이 귀를 찔렀다. 건물 안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피터의 심장 소리는 보통 사람과는 다르다. 맷은 그 사실을 상기하며 빌리 클럽의 와이어를 이용해 건물에 더욱 가까이 붙어 스윙했다.

작지만 익숙한 심장박동. 화학물질의 냄새. 그리고 라임.

건물 위로 올라가려던 맷은 아래에서 익숙한 것을 발견하고, 빌딩의 뒤편으로 향했다. 쓰레기 따위를 모아두는 뒤편은 관리가 되지 않는 모양인지 빌딩의 앞과 달리 지저분했다. 맷은 악취 속에서 익숙한 체취와 심박을 찾아냈다. 사람이 들어가도 모를 정도로 큰 쓰레기통에서였다.

“피터…!”

데어데블이 다급하게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이런저런 것들 안에 깔린 피터를 찾아내는 것은 맷에게는 무엇보다 쉬운 일이었다. 피터의 피 냄새는 악취와 섞였지만, 맷은 개의치 않고 손을 뻗어 쓰레기 속에서 그를 꺼냈다. 피터를 찾았다는 소식에 유릭이 다급히 달려왔다. 데어데블은 사진기자 피터를 두 손으로 들고 있었다. 의식을 잃은 피터는 맷에게 공주님마냥 안겨 있는 줄도 모른 채로 눈을 감고 있었다. 생명에 위협이 되는 정도는 아니었으나, 내상이 심하다. 맷은 피터가 빌딩 위에서 추락했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었다. 온전한 뼈가 드물었다. 스파이더맨이 아닌 일반인이라면 죽었을 것이다. 맷은 피터가 스파이더맨이라는 사실에 감사했다.

툭. 피터의 품에서 바닥으로 떨어지는 카메라를 유릭이 다급하게 받아냈다. 피터의 것이다. 카메라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냄새로 맷은 피터의 것을 구분할 수 있었다. 품에 들린 피터는 쌕쌕 숨을 쉬고는 있었으나 의식을 잃은 지 오래 지난 듯했다. 피터의 옅은 숨결이 끊기지 않아서 다행이다. 맷은 피터를 안아든 채로, 이대로 집으로 가야 할지, 나이트 너스를 찾아가야 할지 고민했다.

“구급차를 부르세. 보호자에게도 연락을 해야겠어! 조나라면 알고 있을 거야!”

유릭이 데어데블의 어깨를 붙잡으며 말했다. 데어데블은 그제야 자신이 들고 있는 상대가 스파이더맨이 아니라, 피터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벤 유릭은 피터가 스파이더맨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조나에게 메이의 연락처를 물어보겠다며 급히 전화를 걸려는 유릭을 말로 막은 맷은 입술을 가볍게 깨물었다. 피터는 여전히 의식이 없다. 아주 천천히 회복되고 있었지만, 가벼운 상처도 아니다. 게다가 유릭에게 피터는 평범한 청년이었다. 보호자를 부르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피터는 메이를 끔찍이 아낀다. 메이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아서, 교도소에 있을 각오까지 할 정도로 말이다. 위장결혼이라는 방법을 택한 것도 결국 피터가 메이 파커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 했기 때문이었다. 맷은 언제나 해야 할 일을 알았다. 휴대전화를 든 벤 유릭을 불러세우고, 피터를 들고 있는 팔에 힘을 주었다. 구급차는 부르는 게 좋을 것이다. 하지만 보호자에게 연락하는 것은 안 된다.

“벤, 구급차만 불러요.”

데어데블이 단호히 말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유릭이 미간을 찌푸렸다.

“자네는 안 보이니 모르겠지만, 피터의 상처가 커. 구르기라도 한 건지 멍투성이야. 보호자가 필요할 거야.”

겉으로도 피터의 상처가 보이는 모양이다. 맷은 피터를 안아 든 채로 작은 숨을 내쉬었다.

“제가 보호자입니다. 제가 피터의 남편이에요.”

“…뭐?”

“구급차를 불러주십쇼.”

제가 같이 갈 겁니다. 맷은 피터를 안아 들고 천천히 걸었다. 너무 흔들리면 고통스러울 것 같아 발걸음이 조심스러웠다. 피터의 결혼 소식을 갑작스럽게 전해 들은 유릭은 당황했으나 우선 구급차를 불렀다. 데어데블은 피터를 들어 올린 채로 구급차가 닿기 좋은 도로로 향하고 있었다. 피 냄새와 악취, 거미줄 용액 냄새, 그리고 라임 따위가 섞인 냄새들이 매튜의 감각을 어지럽혔다. 피터 머독이 병원에 도착하면 거기서는 다시 맷 머독이 되어야 할 것이다. 피터의 숨은 작지만 계속 이어지고 있으며, 피터의 회복력은 어떻게든 부러지고 뭉개진 뼛조각을 모으기 위해 애쓰고 있었다.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저 멀리서 다가온다. 

피터를 안아 든 손이 조금 떨렸으나 맷은 내색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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