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피터] 위장결혼 - 10
🕶x🕷/소설
2025. 6. 27. 21:13
“맷, 무슨 일 있어?”
포기가 묵묵히 서류를 손가락으로 훑는 맷의 책상 위로 커피잔을 툭 내려두었다.
“…아무 일도 없어.”
“완전 얼굴이 죽상인데? 애인이랑 싸운 다음날 얼굴이잖아!”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 포기가 말했다. 아니라며 손바닥을 휘휘 젔던 맷은 이내 그렇게 티가 났나 싶어 제 턱을 슬며시 만져보았다. 나 그런 표정 자주 봤지. 무엇이든 안다는 투였다. 로스쿨 생활과 사무실 경영까지 함께 해온포기는 맷을 너무 잘 알았지만, 잘 알지 못했다. 포기에게 말하는 것과 아닌 것이 많이 나뉘어져 있는 맷은 피터와 결혼했다는 사실을 모르는 포기가 그저 장난으로, 혹은 상상 속의 다른 애인을 상정하고 말한다는 것을 알았다. 포기가 늘 말하는 스파이더맨의 비즈니스 파트너는 이 이야기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사실 애인이 아니라, 집에서 기다리는 아내—혹은 남편이겠지만—와 싸웠다고 말한다면 포기가 어마어마하게 화를 내겠지. 맷은 턱을 가볍게 매만지다가 손을 다시 서류로 옮기며 가짜 웃음을 지었다.
“난 애인이랑 안 싸워, 포기.”
“내가 몇 번이나 봤는데 무슨 소리야. 천하의 맷 머독이 여자에게 차여서 운 적도 있다고 소문 낼 거야!”
장난기가 가득한 미소를 짓는 맷을 따라 포기도 웃음을 터뜨렸다. 대학교 시절 이야기를 꺼내면 의심은 다시 없던 일이 된다는 것을 아는 매튜는 언제나 이런 식으로 상황을 넘어가곤 했다. 부부싸움을 했는데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다고 솔직히 말할 수는 없으니까. 포기와는 풋풋했던 학생 시절을 추억하며 다른 한쪽으로는 집안을 쿵쿵 울리던 피터의 발소리를 떠올리자 맷의 마음이 무거워졌다.
피터에게 연락을 해야할까. 맷은 사무실에 있는 동안 한참을 고민해봤지만 결심을 내리지 못했다. 피터가 화가 났다는 것은 심장박동과 호흡, 그리고 냄새 따위로 간단히 알아낼 수 있는 정보였으나 ‘사과하기’는 정보들의 조합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피터를 화나게 했을 때 평소라면 먼저 연락을 하거나 저녁에 만나자며 약속을 잡곤 했던 매튜는 이번에는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부부 사이를 들먹이며 피터에게 겁을 준 탓이었다.
넌 나랑 부부잖아. 정체가 알려지면 우리 둘다 위험해지는 거야.
피터의 신변을 걱정해서 한 말이었으나 피터에게는 그렇게 들리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냥 결혼한 사이니까, 사실 그런 사이가 아니었더라도, 네가 걱정이 된다고 솔직히 말해야 했던 게 아닐까 생각도 들었다. 약에 취해서 집에 돌아오지 못하게 되거나 돌이키지 못하는 사건으로 되어버릴 것만 같아서, 변호사 맷 머독이 해결하지 못하는 상황으로 치닫게 될 것이 염려되었다고 말이다. 하지만 그런 말로는 피터를 얌전히 만드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다. 여기서 사과를 했다가는 다시 피터에게 ‘계속 멋대로 행동해도 괜찮다’는 사인을 주는 결과가 될 뿐이다. 적어도 스파이더맨이 제멋대로 헬스키친을 뒤집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테니 그걸로 위안을 삼자며 맷은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번만큼은 안돼.
피터가 약에 취해 사무실에 왔던 날을 되새기며 마음을 단단히 했다. 그 뒤에 사무실에서 눈에 보일만한 증거들을 치우기 위해서 노력했던 것이나, 그뒤로도 한동안 오래도록 남아 있었던 정사의 흔적들을 떠올리자 결심은 더욱 확고해졌다. 모든 것이 확실하게 밝혀질 때까지는 피터를 떼어놓자. 큰 소리로 울리던 피터의 발소리가 생각이 나서 조금 울적해졌지만 맷은 나중에 피터와 함께 가면 해결될 일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피터는 단순하니까. 같이 가짜 다이아몬드 문제를 발생시킨 곳에 가자며 알아낸 정보를 늘어놓으면 금세 화를 풀고 같이 가줄 것이다. 맷의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강도와 다이아몬드의 연관성을 찾을 수 없다면, 일단 다이아몬드를 파는 곳을 찾으면 되는 문제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반지가 왔던 곳으로 쫓다보면 끝이 있기 마련이었다. 가짜 보석을 판매하는 가게.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맷은 곧 책상 서랍에 넣어둔 반지를 떠올리고, 서랍을 열어 반지 케이스를 꺼냈다. 피터에게 주려고 샀던 것이었다. 작은 다이아몬드로 장식되어 있는 결혼 반지. 직원이 깔끔하다고 추천해주기도 했지만, 맷이 만져보며 주먹을 쥐거나 부딪혔을 때 거슬리지 않을만한 것으로 고른 것이었다. 디자인보다는 감촉을 우선하여 고른 반지는 여전히 줄 타이밍이 없어서 맷의 책상 속에 잠들어 있었다. 피터가 좋아할지조차 할 수 없어진 채로 서랍에 담긴 반지를 맷은 고민하다가 주머니 안쪽에 챙겨두었다. 피터랑 화해하면 줄 생각이었다. 그러니 화해할 계기가 필요하다. 범죄자의 소굴 따위를 알아내서 데려간다면 피터가 금방 신이 나서 쫄래쫄래 뒤를 따라올 것이었다. 스파이더맨 일에 예민한 피터는 동시에 스파이더맨의 역할이 주어지면 마음이 유해졌다.
마음에 드는 반지를 찾기 전, 첫 번째 가게의 점원은 가짜 다이아몬드 반지를 판매하려 했었다. 다이아몬드는 아닌 무언가로 이루어진 가짜 보석은 경도가 약했고, 일반적인 보석과는 달랐다. 거기로 가면 되겠다. 목적지가 정해지고 맷은 퇴근시간이 다 되기도 전에 포기에게 가짜 약속을 핑계로 대며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맷이 정보를 얻는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다. 초감각을 이용해서 엿듣는 것은 언제나 숨쉬듯 할 수 있는 일이었고, 그 다음으로 자주 하는 것은 벤 유릭과 같은 정보를 많이 알고 있는 사람과 접촉하는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일을 쉽게 하는 방법은 당사자나 관련인에게 물어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데어데블은 언제나 그런 방식을 선호하는 편이다. 대체로 매튜가 원하는 정보를 지닌 당사자는 선한 사람보다는 악인이 많았고, 그것은 정보를 얻기 쉽다는 말과 같았다. 상대가 악당이라면 마음을 돌리기 위해서 애써서 다른 방법을 생각할 필요도 없다. 무엇보다 좋은 설득은 공포이니까.
“젠장…! 넌 개자식이야!”
발목에 밧줄이 묶인 채 건물 벽에 대롱대롱 매달린 남자가 소리쳤다. 아까까지만 해도 다이아몬드를 유통하는 회사를 알려줄 수 없다며 주먹을 휘두르던 이였다. 헬스키친에서 데어데블에게 주먹을 드는 이들은 한결 같다. 밝은 대낮에는 얼굴을 펴고 다닐 수 없는 이들이었다.
데어데블 슈트를 입고, 맹인에게 사기를 치려했던 귀금속 가게에 도착한 맷은 보석을 가져왔다며 대금을 요구하는 이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겁에 질린 주인으로 추측되는 여성 한 명과 돈을 요구하는 남성 두 명. 보석을 유통하는 사람들 치고는 거칠고 투박한 목소리와 걸음걸이는 일반적인 운전수보다는 범죄에 적합한 이들처럼 느껴졌다. 다이아몬드 같은 고급품을 싣기에는 잠금장치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운반트럭도 싣고 있는 짐이 가짜 보석이기 때문이라는 추측이 가능했다. 당장 현금을 요구하며 금방이라도 폭력을 휘두를 듯 거칠게 숨을 몰아쉬는 범죄자와 당장 현금이 없다며 겁에 질려 있는 주인. 결국 이 가게가 맹인에게 가짜 보석을 팔려고 했다는 점은 바뀌지 않으니 양쪽 다 법의 심판을 받게 될 예정이겠지만, 당장 데어데블이 도와야할 상대는 명확해졌다.
헬스키친의 주민끼리 돕고 살아야지. 맷이 발을 움직였다. 귀금속 가게의 유리창을 부수며 나타난 데어데블은 투박한 운전수 한 명의 머리통에 빌리 클럽을 던져 기절시키고, 다른 남성은 복부를 걷어찬 후 제압했다. 갈비뼈가 금이 갔을 것이다. 그래도 부러지지 않았고 금이 간 정도여서 생명의 지장은 없었다. 어느 곳에서 왔냐는 물음에 답만 해준다면 얼른 경찰을 불러서 보내줄 생각이었지만 남자는 말을 열지 않았고, 맷은 결국 그를 건물 위에 매달았다. 무엇보다 빠른 취조방법이었다.
“…난 악마이야. 뿔도 달고 있잖아.”
데어데블이 담담히 남성의 말에 대꾸했다. 개자식보다는 악마 자식이 더 맞는 표현이야. 남자가 묶인 밧줄 끈 위에 발을 올린 채 차분히 말을 하며 맷은 다시 밧줄을 늘어뜨릴 준비를 했다.
“보석을 유통하는 회사가 어디야?”
“그걸 내가 말할 리가… 으아악!!”
꽉 묶어둔 밧줄의 매듭을 풀자 늘어져 있던 밧줄이 아래로 스르륵 내려가기 시작하며 남자의 몸이 건물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여분의 밧줄이 모두 풀려버리면 남성은 땅에 부딪혀 적어도 갈비뼈가 부러지고 머리를 크게 다칠 것이고, 최악의 경우에는 사망할지도 모른다. 남자의 머리통이 바닥과 만나기 전에 데어데블은 밧줄을 두 손으로 꽉 붙잡았다. 스파이더맨이라면 힘으로도 간단히 할 수 있었겠지만 맷은 그 정도의 힘이 없어서 건물의 기둥을 지렛대로 사용하여 길이를 조절했다. 피터가 있었다면 좀 더 쉬웠을 거야. 데어데블은 화가 나 있을 스파이디를 떠올리며 줄을 다시 위로 올렸다. 줄에 걸린 남성은 겁에 질려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어디지?”
데어데블이 다시 차분히 물었다. 뿔이 솟은 마스크는 이제 남자에게 진정한 악마로 보여지기 시작했다. 악마다. 데어데블은 답을 얻을 때까지 영원히 이 놀이를 반복할 것이라는 걸 그제야 알아챈 남자가 몸을 떨었다. 그래봤자 결국 줄에 매달린 삐에로일 뿐이지만. 그리고 그 밧줄 끝은 악마가 쥐고 있었다. 말할 생각이 없다면 어쩔 수 없지. 악마는 다시 밧줄의 매듭에 손을 대고, 남성의 몸은 빠르게 아래로 떨어졌다. 공기를 가르며 세상의 소리들이 더욱 커져서 귀를 찌르고, 동시에 유년의 추억들도 지나갔다. 주마등이었다.
“비욘드—!!!”
얼굴이 바닥과 만나기 직전에 남자가 급히 외쳤다. 눈물과 콧물로 범벅이 된 탓에 목소리가 뭉개졌지만 악마는 명확히 알아들었는지 줄을 붙잡아주었다.
“비, 욘드… 코퍼레이션….”
비욘드 코퍼레이션. 처음 들어보는 기업의 이름에 고개를 갸웃하던 맷은 일단 밧줄을 완전히 풀고 남자를 바닥에 툭 내려주었다. 스르륵 건물 아래로 함께 떨어진 줄이 떨어지며 철푸덕 소리를 냈다. 떨어진다는 긴장감과 공포로 땀을 가득 흘린 남자는 도망갈 기운도 없을 것이다. 다리가 후들거려서 일어나지도 못하고 바닥을 기는 운반책을 두고, 그제야 경찰에게 연락을 한 데어데블의 입가에 미소가 돌았다. 일단 유통하는 기업을 알았으니까 피터에게 이야기하면 아침에 화났던 것도 금방 해결할 수 있을 거다. 집에 돌아가서 피터에게 제대로 설명해주자며 다짐한 매튜는 경찰이 운반책 두 명을 체포하는 것을 확인한 후에 집으로 돌아갔다. 당연히 피터가 와 있을 줄 알았는데, 맷의 집에는 적막만이 깔려 있었다. 창문으로 들어오기 전부터 맷은 집이 비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맷이 생각하지 않아도 알아차릴 수 있을 체취가 너무나 옅게 남아있어서였다. 그리고 창문을 열자 그 사실을 무엇보다 명확하게 느낄 수 있었다. 피터가 집을 나간지 적어도 수 시간은 지났다. 남은 체향이 딱 그 정도였고, 맷이 마련해준 피터의 방에 남아 있는 거미줄 용액 냄새도 그랬다. 다행히 피터의 방에는 여러 겹으로 봉해둔 가짜 반지가 남아 있었지만 피터의 흔적은 없었다.
피터가 늦을 모양이다. 데어데블 슈트를 벗은 맷은 부엌의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기 위해서 손을 뻗었다.
“메모…?”
냉장고에 붙은 메모지가 맷의 손에 잡혔다. 맹인이니까 메모 같은 것을 평소에 붙여둘 이유도 필요도 없었고, 맷의 집은 늘 깨끗하게 정돈된 상태로 있었으니 이런 메모가 붙여진 것을 모르고 있었을리도 없었다. 맷은 이 손바닥만한 종이가 오늘 자신이 출근한 뒤에 쓰여진 것임을 금방 알아차렸다.
메이숙모 집에서 자고 올게요
- P.P
작은 메모지에 볼펜을 꾹꾹 눌러 쓴 짧은 통보였다. Peter Parker. 굳이 제 성까지 명확히하는 이니셜을 남기는 피터의 의도가 명확했다. 나 화났어요. 메모를 한 손으로 들고 다른 손으로 더듬어 읽은 맷은 작게 한숨을 뱉었다. 오늘 피터는 돌아오지 않을 모양이다. 맷은 오랜만에 홀로 집에 남겨져 있었다. 남은 것은 적막한 집과 그 밖으로 넘치는 소음들이다. 생수를 꺼내려던 맷은 그 대신에 맥주병을 꺼내어 들고 소파에 앉았다. 조용하고 시끄러운 집안은 언제나와 같은데 이상하게 낯설었다. 피터와 함께 사는 동안 피터의 심장박동과 목소리, 호흡 따위에 익숙해져 그것에 감각을 집중하면 바깥의 소리를 지우기 한결 편했는데 지금은 피터가 없었다. 맷은 오롯이 스스로의 힘으로 바깥의 이야기들을 무시해야만 했다. 사람들의 크고 작은 이야기들, 누군가의 울음과 비명 따위들이 귓가를 간질이고 날카롭게 찔렀다. 바늘과 같은 말들이었다. 그리고 그런 바늘들 사이에는 이웃들의 관심도 섞여 있다.
변호사가 또 싸운 모양이야.
그 젊은 아내가 집을 나갔나봐.
맹인이랑 사는 게 보통 일은 아니지.
그런 추측으로 난무한 말들이 맷을 꾹꾹 눌렀다. 맥주를 두 모금 마시고 소파에 몸을 푹 기대고 긴 한숨을 내뱉었다. 피터가 내일도 오지 않으면 퀸즈로 가봐야하는 걸까. 맷은 어느 쪽이 피터를 덜 화나게 할지 알 수 없었다. 메이 파커는 피터에게 남은 유일한 가족이었고, 메이랑 마주치게 된다면 피터가 더 예민하게 굴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맷에게도 남은 가족은 성인이 된 이후에나 알게된 매기 수녀뿐이었으나, 피터처럼 애뜻한 관계로 지내고 있지는 않았다. 그냥 가끔 찾아가게 되는 때가 있지만 그뿐이었다. 매기가 ‘매기 머독’이길 포기한 순간부터 생긴 거리는 그리 쉽게 좁혀지지 못했다.
내일은 집에 오려나.
맷은 피터가 남긴 메모를 손에 쥐고 생각에 빠졌다. 부부니까. 비록 서류상으로 만들어진 관계였으나 사인을 할 때부터 맷은 책임질 각오를 단단히 했었다. 피터를 지켜줄 마음을 먹는 것은 맷에게 무엇보다도 쉬운 일이다. 그냥 할 수 있는 걸 해주면 되는 것뿐이니까. 변호사가 필요하다면 변호사 맷이 되어 변호를 해주고, 악마가 필요하다면 악마가 되어 곁에 섰다. 그리고 지금은 남편이 필요하니까 맷은 피터의 남편이 되어주기로 했다. 그 간단하고 손쉬운 각오는 언제나 큰 대가를 필요로 했다. 어느 때는 맷이 가진 전재산이었고, 또 어느 때는 마스크 아래의 정체이기도 했으며, 그리고 지금은 이 관계를 지속하겠다는 굳은 마음이었다. 얼마든지 해줄 수 있어. 맷은 홀로 남겨진 집안에서 다시금 각오를 다졌다. 내일도 피터가 돌아오지 않으면 만나러가겠다는 다짐이었다.
이번에도 ne님이 장면을 그려주셔서... ㅜㅠㅜㅠㅠㅠ 너무 귀엽다... 열심히 결말까지.. 달리자..
マトピタ(론니さんの小説のFA)
— ne (@neuneon.bsky.social) 2025년 6월 23일 오후 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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