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피터] 위장결혼 - 13

🕶x🕷/소설

2025. 7. 11. 19:44

 

“퇴원 수속은 끝났으니까, 짐만 챙겨서 돌아가면 돼.”

벗어두었던 재킷을 걸치며 맷이 말했다. 이제 병실 침대에서 해방이다. 피터는 천장을 뛰어다니며 기뻐하고 싶은 마음을 꾹 누르며 출근 준비를 하는 맷의 곁에 섰다. 넥타이를 정리하는 맷은 언제나처럼 변호사답게 철저하게 정돈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집과 병원을 바삐 오갔던 결과였다. 피터는 맷이 완전히 집에 돌아가길 바랐지만, 데어데블의 고집은 강했고 결국 약속한 것이 밤에는 함께 있는 것이었다. 좁은 병실 침대에 함께 누워 잠자기. 맷의 집에 있는 침대에 비해 턱 없이 작은 환자용 침대는 딱딱했고 두 사람이 누우려면 바짝 붙어야만 했지만 맷은 그런 점은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었다. 맷이 초감각 때문에 예민하다는 건 사실 거짓말일지도 몰라. 마주 보고 잠이 든 맷의 얼굴을 바라보며 피터가 생각했었다.

그냥 집에서 편하게 자도 좋을 텐데, 맷의 고집이 걱정하는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피터는 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메이 숙모의 곁에서 잠이 들곤 했던 때가 생각도 났고, 맷이 걱정하는 바도 분명해서 변명거리도 바닥이 났다. 밤에 스파이더맨을 하러 나가리라 의심하는 게 분명했다. 완전히 멀쩡해진 몸으로 스파이더맨 슈트를 입는 것이 무엇이 문제냐고 따질 수도 있었으나 스파이더센스는 얌전했고 맷의 표정은 단호했다. 라이노에게 방패로 이용당해 빌딩 벽과 기둥을 부수고, 수십 층 높이에서 떨어졌던 피터는 결국 고개를 얌전히 맷의 옆에 누워있어야만 했다. 왼손 약지에 끼워진 반지가 책임의 의미를 분명히 하고 있던 탓에 맷을 더 밀어낼 수도 없었다. 결혼반지는 무엇보다 좋은 수갑이었다.

그래도 이젠 퇴원이야. 옷매무새를 고치는 맷을 보며 피터는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이젠 편안한 침대에서 잘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며칠째 해가 질 즈음에 와서 함께 병실에서 잠을 자고 출근해야 했던 맷도 편히 집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말이었다. 함께 병원 동지가 되어주는 맷을 보며 찌릿찌릿 아팠던 피터의 양심도 이젠 자유였다. 멀쩡한데도 입원을 길게 해야 했다는 사실이 억울했지만, 모든 비용이 JJJ의 주머니에서 나간다는 사실을 가슴에 새기며 피터는 어떻게든 병원 생활을 견뎌냈다. 창문으로 나가고 싶었던 큰 고비도 맷을 보면서, 그리고 조나의 가벼워질 주머니를 생각하며 이겨냈다. 그래도 오늘부터는 제대로 순찰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스파이더맨 슈트를 입을 생각에 피터의 가슴이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다.

“피터, 다녀올게.”

피터가 생각에 빠져 있던 사이에 변호사 차림을 마친 맷이 어깨에 슬며시 손을 올렸다. 병실에서 변호사 사무실로 출근하는 맷과 키스하는 것도 이제는 익숙해졌다. 맷의 집 앞에서 하는 것보다 보는 눈도 적었던 데다가 좁은 침대에서 맷이랑 숨이 닿을 듯 가까이 붙어 잠에 들던 것이 꽤 큰 도움이 되었다. 피터가 맷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눈을 꼭 감으면, 맷의 손이 피터의 허리에 슬며시 감겼다. 입술을 가볍게 쪼듯이 부딪히다가 그 틈을 열고 혀가 얽혔다. 질척했지만 부드럽고 다정했다. 끈적하고 미끈한 감촉이 익숙했지만, 여전히 간지럽고 쑥스럽기도 했다. 맞닿은 입술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느낌이다. 서로가 가깝게 밀착된 탓에 두근거리고 떨렸지만, 처음만큼은 아니었다. 피터 자신도 이제는 즐기고 있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애초에 누군가랑 닿아 있는 걸 좋아하는 편인 데다가 맷은 키스를 너무나 잘했다. 언젠가부터 맷이 준비를 끝내고 불러주길 기다리고 있을 정도로—, 피터는 맷과 키스하는 게 좋아졌다.

피터는 닫고 있던 눈꺼풀을 슬며시 올려 멀어지는 맷의 얼굴을 보았다. 서로의 입술은 타액으로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쪽—

“잘 다녀와요!”

피터가 발꿈치를 들어 맷에게 입을 맞췄다. 키 차이가 있은 탓에 피터가 맷에게 키스를 하려면 매달리거나 까치발로 하고 서야만 했다. 맷이 한 것보다도 짧고 얕은 뽀뽀였다. 다소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남편을 배웅하는 아내 역할에 익숙해진 피터는 이제 이 정도의 가벼운 입맞춤은 떨지 않고 할 수 있었다. 여전히 얼굴은 붉어졌지만.

“응…, 패트롤 조심히 돌고.”

뽀뽀를 당한 맷이 입술에 닿은 감촉에 잠시 놀랐다가 잡고 있던 허리를 끌어당겨 피터를 꽉 안고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저녁 시간엔 늦지 마.”

“…노력해 볼게요.”

꼭 안긴 탓에 맷의 가슴팍에 얼굴이 닿은 피터가 웅얼거렸다. 즐거운 아침이었다.

 

 

홀로 병실에 남겨진 피터는 짐을 정리했다. 맷이 집에서 가져온 담요나 옷가지 같은 게 대부분이라 배낭 하나에 정리가 되었다. 맷이 집에서 가져다준 스파이더맨 슈트는 병실 이불 아래에 숨겨두었다. 스파이더맨 슈트로 갈아입고 옥상으로 달려갈 생각이었다. 병원에 있는 동안 스파이더센스가 조용해서, 그리고 맷이 피터보다도 먼저 문제를 알아차릴 수 있었던 탓에 피터는 나가봐야 한다는 변명도 대지 못했다. 맷이 일을 간 동안 잠시 빠져나가는 방법이 있겠지만, 낮에 도망쳤다가 맷의 초감각으로 들킬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피터의 양심에 찔렸다. 유릭에게 민폐가 될지도 모른다는 족쇄는 확실히 피터의 발목을 잡아주고 있었다. 맷은 분명 병원에 오기 전에 악마 일을 하고 왔을 게 분명했지만, 피터는 그 부분은 지적하지 않았다. 맷에게도 자유 시간은 필요했을 테니까. 메이 숙모를 간병하며 병원과 스파이더맨을 오갔던 때를 생각하며 피터는 애써 불만을 눌렀다.

콧노래를 부르며 짐을 챙기던 피터는 찌릿찌릿한 감각을 느끼고 손을 멈췄다. 누군가 다가오는 걸까. 스파이더센스가 울리고 있었다. 큰 위기는 아니다. JJJ나 좀도둑이 다가올 때 정도의 가벼운 두통이었다. 조나는 병문안을 와줄 정도로 좋은 사람이 아니다. 게다가 유릭도 이미 병문안을 다녀간 뒤였다. 유릭에게 다친 이유를 둘러대느라 애썼던 걸 생각하면 또 일에 관련된 방문객은 아니었으면 좋겠지만…. 피터가 병실의 문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어…?”

어렴풋하지만 익숙한 얼굴이 나타나고 피터가 입을 벌렸다. 맷과 결혼하게 만든—맷이 멋대로 한 일이지만— 그 요원이었다. 뻔뻔하게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혹여 누군가 들어올까 싶었는지 다시 문을 닫아버렸다. 위험한 상황은 아니다. 피터는 가볍게 찌릿찌릿한 스파이더센스로 당장의 위험 수준을 알 수 있었다.

“…피터 파커, 스파이더맨과 연락해 줬으면 해.”

결혼한 사실도 잘 알고 있을 텐데 꿋꿋이 예전 성으로 부른 남성은 병원과는 어울리지 않게 딱딱한 차림이었다. 스파이더맨의 정체나 관련된 정보를 내놓으라며 피터를 딱딱한 의자에 앉혀두고 괴롭히던 그 요원이다. 다친 사람에게 병문안도 아니고, 다짜고짜 스파이더맨을 이야기하는 남성을 째려본 피터는 맷에게 연락해야 할지 고민했다. 또 협박이나 이상한 이야기를 시작하면… 멋대로 대응하다가 맷에게 잔소리를 들을 것 같았다.

“이야기를 들어보고 생각해 볼게요. 나라고 스파이더맨을 언제든 불러낼 수 있는 건 아니라고요.”

피터가 팔짱을 끼며 날카롭게 말했다. 추방 이야기까지 꺼냈으면서 스파이더맨을 다시 이야기하는 것은 다시 거미 인간의 정체 따위를 알아내겠다는 생각 때문이 아닐까 싶어서였다. 길바닥 자경단원의 신원을 알아내서 체포하겠다는 그 고집은 어디서 시작하는 거야. 많고 많은 불법 히어로들 중에서 굳이 스파이더맨을 콕 집어서 미워하는—일반병력으로 체포하기엔 친절한 이웃이 나아 보였겠지만— 정부 요원을 신뢰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또 스파이더맨을 꼬투리 삼아서 피터를 협박하려 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이제 겨우 퇴원하는 사람을 데리고 할만한 짓은 아니다. 피터는 남성의 얼굴을 직시하며 어깨를 펴고, 당당하게 굴었다. 여차하면 또 맷이 와줄 것이라는 믿음에서 기반한, 그리고 또 어쩔 수 없으면 도망가면 된다는 생각에서 나온 자신감이었다.

“스파이더맨이 도와줬으면 하는 일이 있어.”

“도와요…?”

스파이더맨이 약한 단어들이 있다. 도움, 책임 같은 그런 단어. 그 앞에서 피터는 자신의 위치도 잊어버리고 돕기 위해서 달려가고 마는 나쁜 버릇이 있었다. 그게 비록 자신을 딱딱한 의자에 앉혀두고 평생을 살아온 뉴욕에서 추방하겠다며 윽박지른 사람이라고 해도 말이다. 사실 바로 조금 전에 때리고 싸운 빌런이라고 해도 스파이더맨이라면 그 단어 앞에서 흔들리고, 결국 주먹 대신에 손을 내밀었을 것이다.

“스파이더맨을 만나게 해줘, 파커.”

“…좋아요. 근데 제 이름은 피터 머독이에요. 내 남편이 변호사인 건 알죠? 여차하면 법정에서 보게 될 거예요.”

아무튼 거짓말은 아니었다. 피터는 혀를 씹지 않고 말한 자신을 칭찬해 주고 싶어졌다. 맷과 아침저녁으로 붙어 있던 덕분이 아닐까. 이 자리에 맷이 있었다면 잘 대응했다며 변호사가 되어야 했다고 말해주었을 것이다. 이 영광을 출근한 변호사 머독 씨에게 돌립니다. 피터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이 일이 잘 해결되면 더 이상 거미 인간 일로 괴롭히는 일은 없을 거야, …머독 씨.”

요원이 낮게 속삭였다. 만날 장소를 정해두고, 이불 아래에 숨겨둔 스파이더맨 슈트를 입고 나가야 할 것 같다. 더 이상 괴롭히는 일이 없을 거라고 단언하는 요원의 얼굴을 응시하던 피터는 병원과 조금 떨어진 다이너 식당을 약속 장소로 알려주었다. 미심쩍은 듯 피터를 쳐다보던 요원이 얌전히 병실을 나가주고, 피터는 스파이더센스가 얌전해지길 기다렸다. 맷이 화낼 일이 없어야 할 텐데. 미리 이 만남에 관해 이야기할까, 고민하며 휴대전화를 손에 쥐었던 피터는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보고, 다시 스마트폰을 놓아두었다. 이야기만 듣는 정도니까, 괜찮을 거야. 반지를 끼워주고 잠에 들었던, 그리고 밤마다 찰싹 붙어서 불편하게 잠을 자던 매튜의 모습이 떠올랐다. 만약 책임질 상황이 사라진다면….

1인 병실에 마련된 욕실에 숨어 스파이더맨 슈트를 입고, 그 위에 다시 평소와 같은 옷을 걸치고 나온 피터는 짐이 든 배낭을 들고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가로질렀다. 맷의 집 근처를 배회하는 감시원들을 없앨 기회를 놓칠 순 없었다.

 


 

피터가 얌전히 병원에 있는 동안 병원 근처의 범죄 검거율은 평균 이상을 유지했다. 성과가 있어서 다행이다. 하루 대부분을 스파이더맨 활동에 쏟고 있는 피터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서 맷은 연락처에 있는 동료들에게 연락을 돌려야만 했었다. 어벤저스는 아니었고 디펜더스 정도의 작은 동료 모임이었다. 대부분이 스파이더맨을 아는 사람들이어서 부탁하기도 편했다. 스파이더센스가 울리지 않도록 한다는 것은 꽤 큰 노력을 요구했다. 맷은 그 노력을 동료들로 채워 넣었다.

스파이더맨이 다쳤어.

그 말에 대부분이 흔쾌히 순찰을 돌아주었다. 동료들이 병원 근처의 범죄를 해결하는 동안 맷은 헬스키친을 돌본 뒤에 뿌듯한 마음으로 얌전히 병원에서 쉬는 피터를 확인하고 그 옆에서 함께 잠을 청했다. 조금이라도 스파이더센스가 울리면 튀어 나가는 피터의 성미를 고려해서 주위에 부탁한 보람이 있었다. 친구들이 병원 근처를 지켜준 덕분에 피터는 얌전히 병실에 머물러 있었고 그동안 고층에서 떨어져 부러진 뼈는 완벽하게 붙었으며 내상도 완전히 치유될 수 있었다. 그 상태로 또 나았다며 스파이더맨을 하겠다고 나갔으면 더 크게 다쳐서 왔을 게 분명하다. 피터를 오래 봐온 맷은 거미를 다루는 법을 알고 있었다.

아침부터 들떠서 키스까지 해주던 피터를 떠올리자, 맷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아마 지금 피터는 패트롤을 돌고 있겠지. 건강한 이웃의 복귀였다.

“맷—, 손이 쉬고 있는데.”

포기가 타자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을 알아차리고 지적했다. 맷의 입가에 웃음기가 도는 것을 발견한 포기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시각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 아닌 맷은 포기의 표정을 알지 못했지만, 미간이 찌푸려지고 입매가 비뚤어지는 것은 좋지 않은 신호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맷은 멈췄던 손을 다시 바삐 움직여 타자를 쳤다.

“아냐, 포기. 제대로 하고 있어.”

포기의 따가운 눈빛이 닿고 있는 것만 같다. 피터가 정신을 잃었던 동안, 그리고 입원했던 동안 출근 시간이 늦어졌던 맷은 포기에게 매서운 눈초리를 받아야만 했다. 스파이더맨의 비즈니스 파트너가 다쳤다는 말에 포기도 납득은 해주었지만, 맷이 다루는 일이 적어지는 만큼 포기에게 일이 쏠리는 게 사실이었다. 데어데블 활동을 하는 맷에게 이런 일은 자주 있는 일이었지만, 이번에는 맷 본인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포기도 알고 있던 탓에 당당하게 모르는 체할 수도 없었다. 벌써 몇 주째 맷과 같이 살고 있는 피터 파커—결혼해서 피터 머독이지만—에 대한 포기의 관심에 불을 지르는 계기가 될지도 몰라서, 맷은 열심히 일하는 체를 해야만 했다. 포기가 계속 물어보거나 혹여 집까지 방문하겠다고 했다가 결혼 사실을 들키게 될까 내심 두려웠다.

“간병은 끝난 거야?”

“응, 오늘 퇴원했을 거야.”

“안부 인사 전해줘. 좋은 애 같던데… 스파이더맨 때문에 인생이 꼬여서 어쩌냐. 뭐,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포기가 웃음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포기에게 피터는 ‘스파이더맨 때문에 삶이 복잡해진 청년’으로 기억된 모양이었다. 사과파이를 가져왔을 때 포기가 좋아하긴 했었지. 포기의 시선이 맷에게 꽂혔다. 맷의 손은 쉬지 않고 있었다.

“지금 나 쳐다보는 거야?”

“어. 맷, 너 보고 있어. 히어로 친구들 때문에 인생이 복잡해진 모임에 나도 가입할까 싶어서. 피터도 생각이 있나 물어봐.”

그런 모임도 있었나. 장난 섞인 말에 맷은 작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피터는 가입하지 않을 것 같지만, 물어볼 수는 있겠지. 그러면 피터도 그런 모임이 있었냐며 되물을 것 같았다.

“저녁 먹을 때 물어볼게.”

맷은 열심히 변론을 준비하며 저녁에 보게 될 피터를 떠올렸다. 피터랑 싸운 뒤에 처음으로 집에서 보는 날이었다. 만나서 같이 집에서 저녁을 먹거나, 슈트를 입고 밖에서 순찰을 돌다가 간단히 샌드위치를 사 먹어도 괜찮을 것 같다. 일부러 이웃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집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었던 때가 많았으니까. 오늘은 집안에서 배달 음식을 먹거나, 늘 보던 빌딩이나 다리 위에서 밤을 보내도 괜찮을 듯싶었다. 어느 쪽이 피터가 더 좋아할까. 맷의 생각이 저녁 약속으로 기울었다.

아직 헬스키친에 도는 다이아몬드 문제가 남아 있다. 강도 사건과 별개로 가짜 다이아몬드를 생산하는 회사가 존재한다는 문제. 피터가 떨어졌던 비욘드 코퍼레이션 빌딩은 건물 위층의 붕괴로 인해 통제 중이었다. 피터의 말에 의하면 빌딩 꼭대기 근처에서 라이노가 나타나서 벽을 부쉈다고 했다. 한 층 전체에 CCTV도 설치되지 않았고, 가짜 보석을 만드는 것으로 추정되는 화학물질이 가득하다는 피터의 설명에는 거짓이 없었다. 하지만 맷이 통제된 빌딩에 다시 찾아갔을 때 증거품은 모두 사라진 뒤였고 옅은 화학물질 냄새만이 남아 있었다. 실제로 약을 제조하는 공장은 다른 곳에 있을지도 모른다. 보석 형태로 유통하니 대량으로 만들지는 않았을 테지만, 아무래도 회사 빌딩에서는 약을 제조하고 유통하기에 불편한 점이 많았다. 킹핀이 운영하던 유령회사는 부둣가 근처로 땅을 사두는 경우가 잦았다. 여차하면 컨테이너째로 강이나 바다에 던져버리면 간단히 증거도 사람도 없애버릴 수 있었고, 한산해서 들키지 않을 가능성이 높은 곳이기도 했다. 이번에도 비슷하지 않을까. 여전히 윌슨 피스크를 의심하고 있는 맷은 경찰을 놓쳤던 부둣가를 다시 돌아봐야 할지 고민하고 있었다.

피터에겐 나중에 말하자. 맷은 이제 막 퇴원한 피터를 다시 위험한 일을 끌고 가는 것은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피터랑 저녁을 먹고 재운 뒤에 혼자 나가서 살펴봐도 되는 일이었다.

“…스파이더맨에게 제대로 말하라니까.”

맷을 빤히 쳐다보던 포기가 입을 열었다.

“‘비즈니스-맨’이랑 연애한다고.”

포기가 두 손으로 따옴표 표시를 했다. 연애라고 거의 확신하는 투였다. 그 말에 손을 멈추고 포기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맷은 입술을 핥으며 잠시 고민했다. 포기는 이미 피터가 맷과 사귄다고 완전히 믿고 있었다. 단단한 심장 소리나 어조 등을 통해 그 사실을 알차린 맷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사귀는 사이라고 하자. 맷이 긍정하자, 포기가 오랫동안 봐온 맷의 연애 이야기를 꺼내며 그럴 줄 알았다며 소리쳤다. 피터를 집에 들이기로 했을 때부터 맷이 피터와 사귀게 되는 것은 당연히 정해진 일인 것처럼 말하던 포기는 제 감이 틀리지 않았다는 사실에 기뻐하는 한편, 스파이더맨에 이어 데어데블로 인생이 엉망이 될 피터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맷 머독의 주변인이라면, 특히나 가까운 사이라면 그것은 피해 갈 수 없는 절차였다. 그나마 유릭과 달리 포기의 심박과 호흡은 다소 차분했는데, 맷이 피터와 결혼했다는 사실은 모르기 때문일 것이라고 맷은 생각했다. 아마 결혼 사실을 안다면 지금보다 더 큰 소리로 화냈을 게 분명했다.

“무슨 일이 생기면, 난 도와줄 거야. 아직 어리잖아.”

포기가 냉정하게 말했다.

피터는 거의 서른이 되어가는 성인이었으나, 맷과 포기의 입장에서, 그리고 유릭의 시선에서 보면 피터는 이제 막 사회생활을 시작한 풋내기로 보일 수밖에 없는 나이였다. 피터가 들었다면 열다섯 살 때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한 어른이라고 외쳤을 테지만. 강한 근육의 탄성이나 힘을 알고 있는 맷에게 피터는 언제나 스파이더맨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 열일곱이던 피터는 맷이 빌런을 눈앞에 두고 안심하고 물러설 수 있을 정도로 믿음직스러웠다. 그리고 믿음직한 튼튼한 신체와 치유력은 피터가 제 몸을 쉽게 내던지는 이유가 되고 말아서, 데어데블은 기절한 스파이더맨을 붙잡고 구해내는 역할을 자주 맡았다. 정신을 잃고 늘어진 몸을 단단히 안아 들고, 이따금 입으로 인공호흡 따위를 해야 할지 고민하면서 제 몸을 아끼지 않는 스파이더맨을 돌보곤 했던 맷은 언젠가부터 피터를 다루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다.

단단한 근육과 힘에 비해서 피터는 단순하고 생각이 짧다. 옳고, 그름으로 간단히 나눠버리고 본인이 옳지 않다고 생각하는 일에는 냉큼 달려드는 성질을 갖고 있었다. 맷은 피터의 그런 태도를 통해서 피터가 아직 어리다는 사실을 자각하곤 했다. 그게 벌써 수년째 바뀌지 않고 있었으니, 어쩌면 어린 게 아니라 피터 본인이 가진 꿋꿋한 의지일지도 몰랐다. 피터가 보는 세상이 반짝이는 이유가 될 그 단순함은 어린아이가 말하는 유치한 정의와 같아서, 맷은 피터의 말을 통해서 그 시선을 나눠보는 것을 때때로 좋아했다. 함께 앉아서 도시에 대해서, 그리고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마스크를 쓴 ‘우리’의 삶을 이야기하면 그 순간만큼은 매튜의 세상도 단단해졌다. 결코 부러지지 않을 선에 대한 믿음. 옳은 일을 행하겠다는 굳은 의지. 스파이더맨은 나이 먹지 않게 하는 것은 그런 단순한 삶의 태도일 것이다.

아마 눈이 보이는 사람들 눈에 피터는 더욱 어려 보이는 모양이다. 피터의 얼굴이나 피부를 손끝으로 만져보아도 외견의 나이를 알기 어려운 맷은 포기의 선언을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저녁 메뉴를 떠올리고 있었다. 피터가 얌전히 같이 밥을 먹고 잠에 들면 다시 나가자. 그러기 위해서는 피터가 좋아할 메뉴가 좋겠다는 생각이 덧붙여졌다.

 


 

피터가 가끔 들리는 다이너 식당은 커피에서 탄 맛이 조금 나긴 했지만, 팬케이크가 맛있었다. 스파이더맨 슈트를 입고 앉아 있어도 그냥 코스프레 정도로 생각하는 불친절한 직원이 언제나 모두를 형편없게 대해주는 완벽하게 평등한 식당이었다. 이곳에서는 코스튬을 입은 불법 자경단도 조금 이상한 옷을 입은 사람 정도로 취급될 뿐이었다. 그러니 코스튬 차림의 자경단원과 정장 차림의 요원이 만나는 것은 하나도 어색하지 않은 일이다. 돈은 그쪽에서 내겠거니 생각하고 팬케이크 두 접시와 커피를 한 잔 주문한 스파이더맨은 팔짱을 끼고 맞은편에 앉은 요원을 째려봤다. 불친절한 직원이 1인 1음료를 말하는 바람에 요원은 커피를 한 잔 추가했다.

“나한테 부탁할 게 뭔데요. …나쁜 요원 씨.”

스파이더맨은 친절한 이웃치고는 불친절한 태도로 앉아 있었다. 물론 괴롭힘 받았던 것은 피터이고, 스파이더맨이 아니었지만 일단 기선 제압이 중요한 법이다. 이미 뉴욕에서 피터는 스파이더맨과 오랜 시간 함께한 사진사로 알려져 있었고, 그것은 스파이더맨이 화를 낼 이유로 충분했다. 피터는 마스크를 쓴 탓에 상대에 보이지도 않을 것을 알면서도 미간에 힘을 주고 있었다.

“경계하지 마, 스파이더맨. 난 FBI 소속 요원이니까.”

“FBI 요원이 일반인을 가둬요? 더 경계해야겠는데.”

“피터 파커 일은 미안하게 됐어. 위쪽에서 난리를 치는 바람에…”

“머독.”

“어, 그래, 피터 머독…. 사진사를 건드린 건 우리 쪽 실수야.”

피터 파커일 때에는 그렇게 강압적으로 말하라고 소리치던 이가 스파이더맨 앞에서는 참으로 예의 발랐다. 건수를 어떻게든 건지고 싶었던 탓에 어쩔 수 없다 변명하는 FBI 요원의 코를 한 대 쳐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피터는 애써 그 충동을 눌렀다. 누구 씨 덕분에 월세방을 나와서 맷과 살며, 성까지 바뀐 처지가 되었는데 상대는 스파이더맨이 피터 머독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다. 어디까지 스파이더맨은 피터 머독과 일로 엮인 길거리 히어로일 뿐이라는 사실을 상기하며 피터는 애써 툭툭 튀어 나가려 하는 모난 말들을 꾹꾹 눌렀다. 분노를 누를 때는 최근 있었던 좋은 일을 떠올리는 게 좋았는데, 맷과 아침에 했던 키스가 큰 도움이 되었다.

주문한 팬케이크 두 접시와 커피가 나오고, 스파이더맨은 마스크를 코언저리까지만 걷어 올리고 팬케이크를 썰어 입에 넣었다. 짜증 나는 것과 별개로 배는 고팠다. 병원 식당 메뉴는 너무 건강하고 신선한 메뉴뿐이어서 피터는 끔찍하게 달고 배부른 음식들이 간절했다. 밀가루로 만들어진 팬케이크는 그 소망에 부합하는 메뉴였다. 스파이더맨이 먹는 동안 FBI 요원은 요구사항을 늘어놓고 있었다. 커피는 탄 맛 때문인지 한 모금 마시더니 더 이상 마시지 않았다. 마실만 한데. 팬케이크를 씹어 삼키는 사이사이 커피를 더하며 피터가 생각했다.

“그러니까— 공장을 조사해서 증거를 넘겨주면 되는 거야. 간단하지?”

“간단하면 그쪽에서 하면 되잖아요. 라이노도 처리하시고.”

팬케이크 한 접시를 빠르게 처리한 스파이더맨이 새로운 팬케이크를 자르며 어깨를 으쓱였다. 시럽이 축축하게 밴 밀가루 팬케이크는 꽤 맛있는 편이었다. 메이 숙모의 휘트케이크가 더 좋았지만 말이다. 그래도 병원을 나와서 하는 첫 식사로는 괜찮은 선택이다. 메이플시럽을 가득 뿌린 팬케이크를 우물우물 삼키며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것만 해결하면 더 이상 널 귀찮게 할 일은 없을 거야, 거미 친구.”

“스파이더-맨이에요. 그리고 피터도 내버려두는 거죠?”

“그래.”

그럼 좋아요. 팬케이크 두 접시를 비우고 입술을 할짝댄 스파이더맨이 팔짱을 끼고 등받이에 기댔다. 다소 거만한 자세였는데도 요원은 긍정적인 대답에 만족한 듯 표정이 좋아 보였다. 그 얼굴을 보니 거절하고 싶은 마음이 더욱 커졌으니, 방법이 없다. 가짜 보석 제조가 이루어지는 공장 주소까지 알아봐 주었는데, 싫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인 데다가 어차피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맷과 도시를 뒤집고 다닐 수고를 덜은 셈이었다. 처음부터 스파이더맨 뒤꽁무니를 쫓는 대신에 도시를 엉망으로 만들고 있는 범죄에 대해서 쫓았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피터는 굳이 그 부분은 지적하지 않았다. 어차피 말해봤자 이런 성과를 쫓는 요원들은 이해하지 못할 문제였다. 차라리 데어데블과 함께 이야기하는 쪽이 더 말도 잘 통하고 즐겁겠지. 피터는 저녁에 맷을 마주할 생각으로 기분을 풀며 입을 꾹 닫았다.

이 문제를 FBI가 손대는 이유도 결국 마스크를 쓴 사람들이 연관되어 있기 때문일 뿐이다. 평범한 일반 범죄자보다는 이상한 코스튬을 입은 범죄자를 잡는 게 큰 성과로 여겨지는 정부 조직의 체계를 스파이더맨은 이해할 수 없었으나, 그냥 그런가보다 생각하기로 했다. 저런 엉망진창인 경찰, 혹은 요원과 달리 가짜 보석을 유통 중인 홉고블린이 대단한 편이다. 고블린이 붙은 빌런은 뉴욕을 엉망진창으로 만드는 것을 좋아했는데—피터의 편견이었지만—, 이렇게 조용히 물밑에서 작업을 할 줄은 몰랐다. 피터는 지금까지 제게 덤벼왔던 빌런 모임들을 떠올리며 가짜 보석 제조를 책임지는, 그리고 비욘드 코퍼레이션의 숨겨진 진짜 회장에게 감탄했다. 가짜 다이아몬드를 제조하고 있는 공장이 있는 데다가, 라이노에 일렉트로까지 돈으로 끌어들인 사업수완은 그린 고블린이었던 노먼 오스본이나 피스크가 떠오를 정도였다. 경비원으로 라이노는 좀 아니었던 것 같지만.

“계산은 알아서 해요. 난 주머니가 없어서!”

벌떡 일어난 스파이더맨은 그 말을 남기고 식당을 휙 나갔다. 뒤통수에 어이없어하는 한숨과 불친절한 직원이 영수증을 내미는 소리가 들렸지만, 피터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웹슈터를 건너편 건물에 붙여 몸을 공중으로 띄웠다. 웹스윙이 그리웠다. 당장 공장으로 튀어가고 싶긴 했지만, 그동안 살펴보지 않은 이웃들이 많았던 탓에 피터는 우선 패트롤 루트를 돌아보기로 했다. 라이노가 회사 빌딩을 부순 탓에 생산라인이 멈춰버려서, 공장에서 만들어진 약이 귀금속 가게로 가지 못하고 있다는— FBI 요원이 알려준 소식 때문이기도 했고,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가 피터에게 ‘멋대로 행동하지 마’라고 말하는 기분이 들게 하던 탓도 있었다. 슈트 장갑에 가려진 손가락에는 맷이 끼워준 반지가 여전히 자리 잡고 있었다. 진짜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반지 말이다. 반지를 낀 채 맷과 몇 번이고 손을 맞잡았던 게 생각이 났다. 손가락을 엇갈리게 붙잡고 병실 침대에 누워 수다를 떨다가 잠들었던 장면이 선명히 떠오르는데, 일주일이 넘도록 같이 병실에서 함께 자준 맷에게 말하지 않고 혼자 가는 것은 어쩐지 양심에 찔렸다.

데어데블에게 말하자. 공장에 대한 것은 솔직히 털어놓아야 할 것 같았다. 어차피 혼자 가는 것보다는 감각이 예민한 맷과 함께 가는 편이 증거를 보존하기에도 편했다. 평소 증거 수집보다는 부수고, 구하는 것이 더 익숙한 피터는 맷에게 종종 잔소리를 듣곤 했다. 증거를 남겨야 법의 심판을 받느니 형량이 어쩌네 하는 변호사의 언어로 말하는 데어데블에게 스파이더맨은 고개만 주억였다. 그러니까 이런 일에는 맷이 어울린다. 상대가 홉고블린이고, Gobby들은 완벽하게 피터의 담당 빌런이어서 맷을 완전히 끌어들이는 것은 마음이 내키지 않는 게 문제였지만. 혹여 일렉트로가 그랬던 것처럼 맷이 크게 다치는 일이 생기면 스스로를 용서하기 힘들 것이다. 데어데블은 슈퍼히어로 비즈니스에서 피터가 오랫동안 알아 온 동료이고, 믿음직스러운 자경단원이다. 하지만 맷이 다쳐서 돌아왔던 날에 넘쳐버린 눈물샘은 그 믿음에 구멍을 뚫어버렸다. 죄책감이 피터의 발목을 붙잡았다. 변호사 맷의 일상을 나 때문에 망치고 싶지 않아. 피터는 복잡하고 정돈되지 않은 삶이 익숙했다. 스파이더맨 활동을 하느라, 누군가를 구하느라 던져둔 인생은 언제나 부메랑처럼 돌아와서 피터의 뒤통수를 후려갈겼지만 괜찮았다. 언제나 그랬으니까. 하지만 변호사 맷 머독의 삶은 달라 보였고, 그것은 피터로서는 이룰 수 없는 삶의 균형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데어데블에게 거짓말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데어데블은 삶을 공유할 수 있는, 그리고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몇 없는 동료다. 비밀투성이인 피터의 삶에서 맷은 무엇이든 말할 수 있는 사람 카테고리에 들어가는 상대였다. 그 카테고리는 피터가 평생 지키리라 다짐한 메이 파커도 들어가지 못했다. 맷에게 무엇이든 이야기할 수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피터의 숨통을 틔워주곤 했다. 스파이더맨도, 피터도 맷에게는 같은 사람이었으니까. 그리고 피터에게 맷은 변호사이자 데어데블이었다. 피터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책임과 죄책감. 그것은 전혀 다르지만 비슷한 단어였다. 얄팍한 천 아래에 숨겨진 반지가 피터의 손을 붙들고 있었다.

차라리 닌자나 킹핀이면 좋았을 텐데.

그랬다면 맷에게 붙어 닌자를 때려주겠다며 능청스럽게 농담도 할 수 있었고, 맷이 킹핀에게 경고를 하러가자고 하면 멋진 거미 포즈도 보여주었을 것이다. 피터는 도시에 거미줄을 치며 저녁에 만날 데어데블에게 어떻게 이것을 설명할 수 있을지 고민하다가, 머릿속을 찌르는 감각과 누군가의 비명에 생각을 미뤄버렸다. 스파이더맨은 일주일이 넘도록 내버려두었던 이웃들을 살피기 위해서 거미줄에 의지한 채 빌딩 사이를 가로질렀다. 아직 해가 반짝이며 뉴욕을 빛내고 있었고, 친절한 이웃은 할 일이 많았다.

 


 

“맷! 같이 가요!”

지팡이로 땅을 짚으며 걷던 맷을 발견한 피터가 쪼르르 달려왔다. 기쁨으로 쿵쿵 빨라지는 심장 소리와 타박타박 가벼운 발소리가 맷의 청각을 사로잡았다. 피터가 인적이 드문 골목길에서 착지해서 옷을 갈아입던 것까지 모두 알아차리고 있었던 맷은 놀라지 않고 달려오는 피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오늘은 제시간에 왔네.”

맷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놀릴 의도가 다분한 말에 피터는 자신도 시간 약속은 지킬 줄 안다며 투덜거렸다. 가끔 늦을 뿐이라구요. 나란히 걸으며 피터가 말했다. 맷은 고개를 끄덕여주며 지팡이를 접어 손에 들고 다른 손으로 피터의 허리를 가볍게 당겼다. 나란히 걷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맷의 야근이나 피터의 가출, 그리고 입원으로 인해 한동안 잊혀졌던 일상이 돌아온 느낌이었다. 피터가 입은 얇은 셔츠 아래로 스파이더맨 슈트가 한 겹 더 있다는 것을 맷은 손끝의 감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피터가 풍기는 뉴욕의 이런저런 냄새를 통해서 맷은 스파이더맨이 오랜만의 자유를 만끽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어깨가 닿을 정도로 바짝 붙은 거리가 맷에게 피터의 하루를 들려주었다.

허리를 감싸고 있는 맷의 손을 신경 쓰지 않고 걸으며 피터는 퇴원한 뒤에 살폈던 이웃들 이야기를 하며 맷에게 몇 번이고 동의를 구했고, 그때마다 맷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작은 감탄을 해주었다. 퇴근길을 함께하는 것도 좋은 것 같다. 맷의 입가에 웃음기가 스몄다. 

“푹신해…!”

오랜만에 집에 들어선 피터가 냉큼 짐가방을 던지고, 침대에 드러눕는 것을 맷은 그냥 두었다. 평소였다면 씻고 누우라던가 외출복은 벗고 침대 위에 올라가라고 잔소리했을 테지만, 오늘만큼은 그런 잔소리도 하고 싶지 않았다.

“병원 침대가 딱딱하긴 했지.”

“이 침대가 너무 그리웠어요! 싸구려 매트리스는 질색이야!”

푹신한 침대에 온몸을 맡긴 피터가 팔을 휘적거리며 즐거움에 빠졌다. 떠나게 된다면 역시 이 침대를 영원히 그리워할 것만 같았다. 침대와 온몸으로 인사를 나누는 피터의 콧노래를 들으며 맷은 정장 재킷을 벗어 소파 위에 올려두고, 어느 구석에 던져두었을 배달 책자를 찾기 위해 이런저런 것들이 들어가 있는 서랍을 뒤적였다.

“피터, 저녁 메뉴는 피자로 할까?”

두근두근. 피터의 심장이 뛰는 소리만 들어도 좋아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병원 생활 동안 피터는 정크푸드와 거리를 둔 삶을 살아야만 했었다. 결혼 전, 피터가 종종 피자 한 판을 들고 왔던 것을 떠올리며 맷은 배달 책자를 집어 들었다. 매튜의 메뉴 선택에 크게 만족한 피터의 심박이 날뛰기 시작하고 있었다. 쿵쿵 뛰는 심장은 피터의 발소리와 비슷했다.

“Matty! 

침대에 누워 영원히 이곳에서 살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피터가 벌떡 일어나 맷에게 폴짝 뛰어왔다. 스파이더맨은 사실 버니맨일지도 몰라. 침실에서 거실까지 총총 뛰는 피터의 사뿐한 발놀림을 감각으로 느끼며 맷이 생각했다.

“맷—! 내가 좋아한다고 말했어요?”

“…가끔?”

“좋아해요! 피자 친구!”

피터가 맷에게 대롱대롱 매달리며 기뻐했다. 다리까지 감고 온몸으로 붙어버린 탓에 피터의 무게에 조금 휘청였던 맷은 금방 중심을 잡고 그대로 소파까지 걸어가 앉았다. 소파에서도 여전히 맷에게 찰싹 붙은 피터는 다시 노래를 흥얼거렸는데, 노랫말이 침대에서 피자로 바뀌어 있었다. 평범한 부부가 어떤 것인지 단언할 수 없었지만, 이런 관계가 아닐까. 부부 역할극을 신경 쓰며 종종 뻣뻣하게 굳어버렸던 피터가 떠올렸다. 키스하는 것보다 지금의 거리가 사람들에게는 더 가까운 관계처럼 보일 테지만, 굳이 피터에게 말할 필요는 없겠지. 맷은 피터를 옆구리에 낀 채로 책자의 전화번호를 손끝으로 살펴 피자 가게에 페퍼로니 피자 한 판과 치즈를 뺀 미트볼 스파게티 한 접시를 주문했다. 피자는 피터의 몫이었고, 스파게티는 맷의 저녁이었다. 맷과 자신을 피자 친구라 주장하는 피터는 맷이 피자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지금까지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완벽한 저녁이야. 피자 한 판을 혼자서 모두 해치운 피터는 만족스럽게 웃으며 맷에게 기댔다. 맷의 집에 있는 소파는 두 사람이 나누기에 충분한 크기였지만 피터는 괜히 매튜에게 더욱 가까이 붙어 앉아 있었고, 맷은 피터를 밀어내지 않고 한 팔로 감싸안았다. 피자가 배달오기 전에 함께 샤워까지 마친 피터에게서는 익숙한 바디워시 향기가 풍겼다. 맷과 같은 향기였다. 맷은 그 향기를 통해서 피터가 드디어 집에 돌아왔음을 뼛속 깊이 느낄 수 있었다. 피터가 입은 맷의 티셔츠에서 피자 냄새가 나긴 했지만, 그것까지도 피터의 귀가를 알려주는 표지판 같아서 즐거워진 맷은 피터를 끌어안았다. 이대로 피터가 잠들면 슈트를 입고 나가야겠지. 맷은 일렉트로를 마주쳤던 부두에 갈 생각을 하면서 다른 손으로 피터의 복근과 허리 부근을 쓰다듬었다. 배가 잔뜩 부른 피터는 아침보다도 더 말랑했고 촉촉했다. 손길이 좋은 모양인지 피터가 더욱 몸을 맷에게 붙여왔다. 맷은 피터의 허리에 손을 올리고 엄지로 피부를 부드럽게 쓸었다. 이대로 피터가 잠이 들 때까지 좋아하는 곳을 쓰다듬어 줄 수도 있었지만, 피터의 혈을 눌러 강제적으로 잠에 빠지게 하는 방법도 있었다. 어디를 어느 정도로 눌러야할지 잘 알고 있는 맷의 손이 망설임으로 배회했다.

어느새 무릎 위에 앉아 있는 피터를 껴안고 고민에 빠져 있던 맷을 정신 차리게 한 것은 피터의 제안이었다.

“맷, 잠깐 나갈래요?”

아까보다 나긋하고 나른했다. 그냥 잠들어도 괜찮은데. 장난스럽게 침대로 가자고 말할지 생각하던 맷은 피터의 목소리에 담겨 있는 고민과 떨림을 알아차리고 목적지를 바꾸기로 했다. 무언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침대보다는 다른 곳이 나았다.

“늘 가던 곳으로 갈까?”

피터의 어깨를 가벼운 손길로 주물러주며 맷이 물었다. 피터의 심장이 강하게 울리고, 근육으로 이어지는 혈액의 흐름이 맷의 손끝을 간지럽혔다. 메뉴에 이어서 장소도 피터의 마음에 든 모양이다. 맷은 피터가 대답하기도 전에 정답을 알아차렸다.

티셔츠를 벗고 슈트로 갈아입는 피터의 신난 심박을 들으며 맷도 입고 있던 편한 옷을 벗어 데어데블 슈트로 갈아입었다. 데어데블 착장을 마친 맷이 먼저 창문으로 뛰어내리자, 다급해진 피터도 마스크를 턱까지 당겨쓰고 그 뒤를 따라 창틀을 밟고 공중으로 몸을 던졌다. 데어데블이 빌리 클럽을 이용해 건물 사이를 스윙하고, 스파이더맨은 거미줄에 몸을 의지해 그 뒤를 따라갔다. 마음만 먹으면 맷보다도 빠르게 화학 섬유 가닥을 발사해 속도를 높일 수 있었지만, 피터는 그러지 못했다. 해가 지고 야경이 펼쳐진 뉴욕의 도심은 오히려 낮보다도 화려해서 웹스윙을 하다가도 그쪽으로 시선이 팔려버렸다. 자동차의 전조등 불빛으로 반짝거리는 도로 위, 불 켜진 건물이 만들어내는 풍경들은 피터가 병원에 있었던 동안 그리워했던 평화로운 도시의 모습이었다. 그 풍경을 담고 있느라 뒤늦게 크라이슬러 빌딩 위에 도착한 피터가 팔짱을 낀 맷의 옆에 착지했다.

“늦었잖아. 벌써 지름길을 까먹은 거야?”

“가끔은 주위를 살피며 다니라구요, Magoo!”

데어데블의 장난스러운 꾸중을 스파이더맨이 가벼운 농담으로 넘겼다.

두근거리는 심장. 풍경을 담고 있는 듯 저 멀리 향한 시선. 빌딩 위에서 느낄 수 있는 상쾌한 밤공기. 웹스윙을 하던 사이에 흘린 땀이 바디워시의 향기와 섞이고, 빌딩 위의 강한 바람에 날려 맷에게 무엇보다 익숙한 향기들과 감각들을 만들어냈다. 크라이슬러 빌딩 위는 평범한 사람은 결코 올 수 없는 장소였지만, 맷은 이곳에서 자주 피터를 만났었다. 높은 고층을 두려워하지 않고 뛰어내릴 수 있는 두 사람은 이곳을 내기 장소나 가벼운 약속 장소로 이용했다. 피터는 이곳에서 보는 뉴욕을 좋아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 다음가는 뉴욕의 거미 관광 스폿이었다.

피터와 함께 야경을 즐기지 못하는 맷은 풍경을 보는 대신 그 옆에 앉아 뉴욕을 담고 있는 피터를 느꼈다. 조금 긴장한 듯 굳어 있는 몸은 피터가 무언가 생각이 많다는 것을 알려주는 듯해서, 맷은 피터를 안아주어야 할지 고민했다. 아니면 다시 어깨나 목뒤를 만져주어도 좋을 것이다. 피터의 기분을 풀어주는 여러 방법을 떠올리며 맷이 고민하는데, 풍경을 눈에 담고 있던 피터가 먼저 마스크를 머리까지 올리고 장갑 한 쪽을 벗었다. 왼손이다. 맷은 피터가 벗은 장갑을 놓아두고, 머뭇거리는 동안 차분히 그 옆에 앉아 있었다.

“저기, 맷….”

피터가 맷의 손 위에 제 손을 포개었다. 피터의 심장이 쿵쿵 깊게 울리며 요동치고 있었다. 그 모든 소리와 신호들을 알아차릴 수 있는 맷은 작게 미소를 지으며 데어데블 마스크를 슬며시 올리고 피터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뉴욕의 차가운 밤공기가 맷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서로 이해할 수 있는 사람끼리 비밀을 만들고 싶지 않아요.”

피터의 목소리는 여느 때보다도 단단했다. 맷은 손을 꼭 잡은 피터가 나름의 각오로 떨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피터의 손에 끼워준 반지가 반짝이는 것을 볼 수 없었지만, 피터가 몇 번이고 반지를 보는 것을 통해 그 반짝임을 유추할 수 있던 것처럼 매튜는 여러 신호와 단서들로 상대의 마음을 알아차렸다. 피터가 주는 신호는 특히나 더 간단하고 알기 쉽다. 입원했던 동안에 몇 번이고 반지가 끼워진 손을 펼쳐 이리저리 흔들어보다가 슬며시 웃던 피터가 주는 포근함이 좋아서, 맷은 피터에게 결혼반지를 끼워주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비록 그게 멋진 상황은 아니었지만 말이다. 손가락 크기를 제대로 재어보지 않고 산 것이지만 흘러내리지 않고 사이즈가 딱 맞았다. 몇 번이고 잡았던 손을 기억하는 것은 맷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냥 그대로 있어 줘도 돼. 맷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피터,”

일부러 노력하지 않아도 돼. 넌 좋은 사람이잖아. 맷은 어떤 말이 피터를 달랠 수 있을지, 그리고 부담을 주지 않을까 고민했다. 피터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주었을 뿐이고, 해줄 수 있는 것을 해주었을 뿐이다. 맷은 제 손에 닿아 있던 피터의 손을 제대로 맞잡았다. 꼭 잡은 피터의 손은 따뜻하고 단단해서, 언제나 믿음직스러운 스파이더맨이었다. 몇 번이고 맷을 붙잡아주었던 손은 얇고 작았지만 강하고 든든했다.

꽉 잡은 손을, 그리고 마스크를 벗은 매튜의 얼굴을 차례로 보며 피터는 숨을 삼켰다. 무엇보다 큰 각오가 필요했다.

“…그러니까 나도 맷을 책임질게요.”

우린 부부잖아요. 피터의 목소리가 빌딩 위를 울리고, 바람에 흩어졌다. 진지한 고백처럼 단단하고 비장했지만, 그 말의 의미는 언제나와 같았다. 맷은 대답 대신에 피터를 끌어당겼다. 맷의 삶이 조금 빗겨나가는 순간마다 피터는 제멋대로 찾아와서 충고의 말을 늘어놓곤 했다. 그것은 단순하고 뻔하디뻔한— 선한 사람의 말이었지만, 그래서 매튜에게는 무엇보다 필요한 조언이었다.

이미 책임지고 있었어.

밤공기에 식어가던 몸이 서로의 온기로 따끈해졌다. 차가운 바람과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어 있던 피터의 몸은 맷에게 안겨 부드럽게 녹았다. 더 이상 무엇도 엉망으로 만들고 싶지 않아. 피터 파커의 엉망인 삶을 누군가와 나누는 것이 익숙하지 않은 피터는 뾰족해지는 마음을 둥글게 깎아내며 맷에게 안겨 있었다. 따뜻하고, 포근하고, 단단하다. 피터는 스스로 나아갈 타이밍이라는 것을 알았다.

피터 파커의 삶은 엉망이지만 피터 머독은 다를지도 몰라. 머독이 되어버렸으니까 파커럭이 덜해졌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러니까 맷에게 기댈 조금의 여유가 생겼을지도 몰라. 피터는 제 삶을 변명하고 변명하며 이유를 만들어냈다. 맷을 마주 안으며 피터는 제 삶에 책임을 아주 조금 더 얹을 각오를 했다. 누군가와 제 삶을 나누는 것은 피터에게는 무엇보다도 큰 결심이 필요한 일이었다.

맷은 결국 피터를 잠재우는 것을 포기했다. 밤은 길었고 서로를 돌볼 시간은 충분히 있었다. 거짓말이 사라진 밤하늘에 남은 것은 오직 솔직한 이야기뿐이다. 뉴욕의 야경도, 반짝이는 별도 볼 수 없는 맷은 피터의 목소리와 웃음소리, 체향 따위에 감각을 집중했다. 그것은 누군가를 온전히 챙겨줄 수 없는 서로의 삶에 주어진, 아주 작은 여유였다.

'🕶x🕷 > 소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맷피터] 위장결혼 - 15 🔞  (0) 2025.07.19
[맷피터] 위장결혼 - 14  (0) 2025.07.16
[맷피터] 위장결혼 - 12  (0) 2025.07.05
[맷피터] 위장결혼 - 11  (0) 2025.06.28
[맷피터] 위장결혼 - 10  (0) 2025.06.27
2025.01.13
myosk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