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CU 캠퍼스에서 만난 맷피터

🕶x🕷

2025. 1. 13. 20:55

- 노웨이홈 이후, 컬럼비아 대학 진학한 피터

- 그냥 피터가 위로 받는 게 보고 싶어서 쓰기 시작한 썰..

 

노웨이홈 이후 대학으로 진학한 피터가 대학교 캠퍼스 벤치에서 혼자 과제하다가 그 대학 졸업생 맷이랑 만나는 이야기 보고 싶다.

도와줬던 머독씨가 맞는데 피터 기억 못 하실 테고(스파이더맨은 하시려나) 파커럭을 생각해봐 피터를 알면 불운이 찾아올 거야- 하며 망설이는데 맷이 먼저 말을 걸었고.. 그렇게 벤치에서 가끔 만나는 사이가 되기. 근데 역시 피터 파커를 알아서 좋을 게 없으니까 망설이다가 결국 맷 잡는 이야기.

 

 

Mr. Murdock! 하는 피터랑 Matt이라고 불러요 하는 맷. 같은 대학 졸업생이라는 맷이 일 때문에 왔다가 잠시 포기 기다리며 피터랑 마주치는 거지. 벤치에서 혼자 과제중인 외로운 대학생. 그 나이대는 다 그렇지. 심장소리가 특이하네, 하고 심심해서 듣다가 배고픈 소리도 선명히 들어버림.

거리 두고 나란히 앉아 있는데 피터만 두근두근하는 거지. 그래도 아는 사람이었잖아. 물론 상대는 기억 못하겠지만. 과제하고 있었는데 생각도 안 나고 배도 고픈데 말도 걸고 싶고 맘 복잡한 피터.

맷의 귓가에 피터의 배꼽시계소리나 쿵쾅거리는 심장소리가 뒤섞여 들리는 거야. 손도 안 움직이는 거 같은데.

포기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니까 일어서려던 맷이 주머니에 받아둔 초코바가 떠오르는 거지. 어차피 단 거 별로 안 좋아했고.. 심장소리가 특이한 배고픈 대학생에게 말 걸고 주는 맷.

- 그때는 원래 늘 배고파요. 힘내요.

너무 놀라서 고맙다는 말도 못하고 앉아 있는 피터. 심장이 터질 거 같아

그런 만남이 몇 번 있던 거지. 피터 파커의 지정석 같은 대학교 구석 어느 벤치는 맷에게는 나름대로 조용하게 기다릴 수 있는 장소였고.

포기가 주로 진행하는 일이어서 잠깐 같이 상의하다가 계속 기다려야했고(같이 있기엔 불편해서) 특이한 심장소리 가진 대학생이랑 만나는 맷.

초코바 하나 건네준 뒤로는 나름 말도 했음. 어느 과냐고 맷이 먼저 물었고, 피터가 누구 기다리냐고 그 뒤에 물었고, 뭔가 그런 스몰톡하다가 결국 불쌍한 대학생이랑 통성명도 해버리기. 과는 다르지만 대학교 후배잖아. 갈 곳 없이 벤치에서 과제하는 피터를 보며 자기 대학시절 떠올리는 맷.

 

- 나도 여기 졸업생이에요, 피터.

- 어…, 그럼 선배님이네요? 머독 선배…님? 이상하네요. 머독 씨라고 부르게 해주세요.

머독 씨가 이 대학교 졸업했는지는 몰랐다 싶은 피터. 변호사도 대학교를 나와야하지, 참. 그게 근데 내가 입학한 대학일 줄이야.

그냥 뉴욕에서 다닐 수 있고, 신분이 불안정해도 입학할 수 있는(장학금도 중요해) 곳을 택했을 뿐인데. 본인은 피터 파커를 기억하지 못하지만 도움 받았던 사람이 다녔던 대학이라니까 왠지 기분이 좋았음. 좋은 변호사님이 다녔던 대학. 애착이 좀 생기는 것 같네.

- Matt이라고 불러요. 나도 이미 피터라고 부르고 있잖아요.

시선을 일부러 프린트해둔 과제에 두고 있던 피터가 놀라서 맷을 돌아보는 거지. 피터의 심장이 다시 두근거림.

생각해보니 머독 씨가 이미 ‘피터’라고 불러주고 있었구나. 코끝이 시큰거리는 피터.

Peter, 알던 사람이 불러준다는 것은 또 느낌이 달랐어. 흔해빠진 이름인데 막상 패트롤을 돌 때는 잘 만나지 못했거든. 그랬다면 피터라는 이름을 가진 누군가를 부르는 소리에 무심코 고개를 돌려봤을 거야. 혹시나 피터 벤자민 파커를 불러주지 않을까 기대해버리면서.

갑자기 피터의 심장소리가 쿵쾅거리더니 울 것 같다고 생각하는 맷.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근데 싫어서 우는 것도 아닌 거 같고, 요즘 대학생들 감수성 따라잡기 힘들어. 두근거렸다가 쿵쾅대며 크게 울리다가 다시 잠잠해지고. 음악의 장르가 자꾸 바뀌고 있잖아.

 

울 것 같던 피터는 눈물을 흘리지는 않고 잠긴 목소리로 “네, 맷.”이라고 대답함. 그 뒤로 잠깐 정적이 흘렀어. 맷은 피터의 물기 어린 숨소리를 듣고 있었고, 피터는 선글라스를 쓴 변호사를 훔쳐봤음. 손이 멈춰 있었어. 맷은 문뜩 피터가 벤치에 나홀로 앉아서 매일 뭘 쓰고 있는 건가 궁금해짐. 요즘에 손글씨라 클래식하네.

- 뭘 그렇게 하고 있나 물어봐도 될까요? 사각거리는 연필소리가 듣기 좋거든요.

- 아…, 별거 아니에요. 개인연구과제인데, 기억의 휘발성에 대해서 공식화할 수 있을까 같은 그런 연구요.

- 기억이라… 공학도랑은 어울리지 않는 말이네요.

- 그래서 그걸 공식으로, 숫자로 표현해보려고 노력 중이에요. 그렇게 하면 다시 기억을 돌릴 방법도―, 아. 죄송해요, 맷. 역시 재미없죠?

피터가 하하, 어색하게 웃으며 말했어. 처음에는 주제를 바꾸려고 했는데 때마침 맷이랑 벤치에서 만나버린 거야. 나만 기억하는 변호사님. 

사실 나도 누군가 기억해주길 바랬던 걸까 생각하는 피터. 마법이긴 했지만 휘발되었다는 사실은 여전하고, 그걸 망각과 비슷한 영역으로 본다면… 그냥 방법만 생각해본 거야. 실제로 다시 되돌리겠다는 생각은 아니니까 연구 과제 정도로는 해도 되는 거잖아. 피터는 애써 그렇게 생각했음.

노트를 무릎에 놓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피터. 피터 파커의 삶에 누굴 다시 넣을 생각은 없어. 그냥, 언제든지 다시 기억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위안이 되니까. 그냥 처음부터 다른 걸로 할 걸 그랬어. 스스로가 전기를 흡수할 수 있게 몸의 변화가 일어난 사람의 몸 안에 흐르는 에너지를 어떻게 해야 할지라던가.

저 멀리서 포기가 부르는 소리에 맷이 일어났어. 피터는 제자리에 앉아 있었음. 아마 며칠 뒤에 또 보게 될지도 모르지. 맷은 남겨져 있는 피터에게 남은 무언가를 읽었어. 만날 때마다 노트를 꼭 쥐고 연필을 부러뜨릴 듯 잡고서 쓰던 게 그런 내용이구나.

가까운 사람이 기억을 잃게 되는 병이 있을 수도 있는 일이니까. 인류의 반이 갑작스럽게 사라질 수 있는 세상인 걸.

- 포기하지 마요. 

- …네?

- 과제요. 열심히 하던데, 좋은 점수 받아야죠.

법적인 거라면 도와줄 수 있었을 텐데 아쉽게 됐어요. 맷이 지팡이를 펴고 떠났음. 피터는 자리에 남아 노트를 꼭 쥐고  걸어가는 맷을 보는 거지. 맷은 피터의 시선이 자신의 뒤통수를 찌르는 걸 느끼는 거지. 요즘 대학생은 포기하지 말라는 말도 안 좋아하나. 확실히 맷 자신도 그렇긴 했지 싶은 거야.

다시 두근거리는 특이한 심장소리가 울리고 흑연이 종이의 거친 표면에 부딪혀 만들어내는 사각임이 들려왔음. 대학생 연구과제로 무언가 달라질 세상은 아니지만, 피터가 바라는 무언가는 이뤘으면 좋겠다 싶은 맷. 그 뒤로 맷은 한참 피터랑 만나지 못 했음.

일도 마무리 되어가고, 아마 다시 대학교 캠퍼스에 올 일은 없을 것 같은데 인사도 못하고 간다 싶었음. 심장소리가 특이한 대학생, 피터 파커. 공학도라면서 늘 연필을 쓰는 것도 신기했고. 벤치에 앉아 있기 말고도 다른 할 일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 맷은 피터가 있는 벤치를 발견한 뒤로 대학에 올 일이 있으면 거기에 가 있었음. 특이하다는 건 특별하다는 거지. 특별한 것에 집중하면 다른 것들이 별것 아닌 것처럼, 조용한 것처럼 여겨지니까. 캠퍼스는 자유롭지만 청춘은 시끄럽기 마련이니까.

 

피터가 혹시 있을까 싶어서 샌드위치나 커피를 사왔는데 번번이 없어서 포기가 가져갔음. 그렇게 마지막 날이 되었어. 가을이었고, 추워지기 전이었지. 뉴욕에 겨울을 앞둔 어느 날. 확실히 밖에서 과제할 날씨는 아니었지.

- 피터?

맷은 피터의 심장소리를 들었어. 특이한 소리니까 몇 주 안 들었다고 해서 까먹을 만한 소리는 아니었으니까 확실해. 이 날씨에 벤치에 앉아서 과제를 한다고? 심장소리만 특이한 게 아니구나 싶은 거지. 이럴 때 따뜻한 커피를 들고 있어야했는데, 맷은 빈손이었음.

그냥 벤치에서 몇 분 이야기 나눈 사이일 뿐이긴 했는데, 대학생이라는 피터의 신분이 맷에게 친근감을 불러일으킨 거지. 대학교에서 포기도 만났고, 피터도 만난 거지. 정말 대학을 아주아주 늦게 왔으면 피터에게 선배라고 불렸을지 누가 알겠어?

케인으로 바닥을 툭툭 짚으며 맷이 피터에게 다가갔어. 피터의 무릎 위에는 노트북이 놓여 있었어. 오늘은 뭘 안 쓰는 모양이야.

- 어…? 맷?

맹인이 먼저 알아보고 말을 거는 건 이상해서 피터가 알아봐주길 기대하며 천천히 다가오던 맷이 그제야 웃었어.

- 오랜만이에요, 피터. 오늘은 벤치에서 외롭게 기다리지 않아도 되겠군요.

피터 가까이에 붙어 앉은 맷. 날씨가 추우니까 벤치 표면도 엄청 차가워. 와, 어떻게 여기에 앉아서 과제를 할 생각을 하지?

- 오늘은 공학도답네요?

맷이 피터의 노트북 위에 손을 툭 올리며 말했지.

- 네, 확실히 다들 노트북으로 하는 이유를 알겠더라구요. 노트랑 연필은 좀 이상하죠?

피터가 웃었어. 하던 과제는 어떻게 되어 가냐는 맷의 질문에 피터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가, 발끝으로 땅을 몇 번 찼어.

쿵쿵. 피터가 신은 낡은 스니커즈가 바닥에 닿으며, 피터의 심장소리도 함께 아래로 떨어졌지. 마음처럼 되지 않는 모양이야. 맷은 위로할 말을 고르고 있었어.

- 주제를 바꿨어요.

- …피터가 열심히 하던 거 아니었나요?

- 네…, 그런데 역시 안 될 거 같아서요.

- 원래 상상이 많을 나이잖아요. 물론 답을 내리긴 어렵겠지만요.

- 아, 아뇨! 그런 뜻은 아니었구요! 그냥, 제가 할 일이 아닌 거 같아요. 제가 손대면 안 될 일이에요.

맷이랑 마지막으로 만난 뒤로 다시 생각을 깊이 해본 피터. 메이 숙모를 보러가서 몇 번이나 물어봤어. 그래도 괜찮을까요?

 

진짜로 하려는 건 아니구요. 그냥 꿈만 좀 꿔보는 건 안 될까요? 사실 메이 숙모는 무엇이든 괜찮다고 하실 거야. 네 탓이 아니라고 말할 거 아는데도 피터는 그렇지 못 했음.

피터 파커랑 엮이면 되는 일이 없어. 다시 피터 파커가 스파이더맨이라는 사실이 알려져서, 변호사님이 길가다 벽돌이라도 맞으면 어떻게 해. 그냥 같은 대학교 출신이란 이유로, 캠퍼스에서 피터 파커의 옆에 앉아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피터는 주제를 바꿨어. 그냥 우주에서 겪었던 일들을 떠올리며 우주적 존재에 대한 과학적인 분석과 공식을 더 했지. 노트를 들고 다니면서도 다시 펼쳐볼 용기도 나지 않았어. 피터는 과제를 하는 곳을 벤치에서 어느 옥상으로 바꿨어. 스파이더맨 슈트를 입고 스파이더맨이 갔던 우주의 어느 행성 따위를 떠올렸지. 그런 커다란 사건을 떠올리면 지구에서 있었던 소동은 작아질 테니까.

추워져서야 이제 맷도 오지 않겠지 싶어서 벤치로 돌아온 피터. 그리고 맷을 만난 거야.

피터는 메이숙모를 떠올렸어. 그리고 끝내 죽이지 못했던, 노먼을 생각했지. 창문으로 던져진 벽돌도 피터를 막아 세웠어. 피터를 아는 사람에게는 불행이 찾아와. 다치고 말거야. 지켜줄 힘도 없는 주제에. 피터가 아래로 가라앉았어.

- 피터

- ...네? 네, 맷

- 아직도 갖고 있어요? 열심히 쓰던 과제말이에요

- 아... 있어요.

맷은 아무렇게 바닥에 놓인 피터의 가방에 노트가 있다는 걸 알면서 물었음. 피터의 손떼가 가장 많이 묻어 있었거든.

- 읽어봐도 될까요?

- 네?

- 어차피 발표 못할 과제인데 닳는 것도 아니잖아요. 피터가 쓰는 걸 듣는 것도 꽤 재밌었거든요.

- 재미 없으실 거예요.

- 친구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낫겠죠.

맷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음. 곧 포기가 올 시간이야. 겨울이 다가오는 캠퍼스는 오래 앉을 곳이 못 되었어.

선글라스 뒤로 언뜻 보이는 맷의 눈이 피터를 흔들리게 만들었지. 피터라고 불러주는, 피터 파커를 알고 있던 변호사님. 지금 피터는 맷에게 단순히 벤치에서 만난 후배일테지만, 피터에게 맷은 스파이더맨과 피터 파커를 모두 알아주던 사람들 중 한 명이었어. 게다가 그 둘을 도우려고 해준 사람.

피터가 떨리는 손으로 노트를 꺼냈어. 맷은 장갑 한쪽을 벗고 종이의 표면을 더듬었지. 꾹꾹 눌러쓴 글씨가 어지간히 간절했던 거구나 싶기도 했어. 얼마나 눌러서, 진하게 썼는지 글씨를 더듬는 맷의 손끝에 흑연이 칠해졌지. 대부분 숫자와 수식이라 맷이 알 수 있는 것은 아니었어.

‘마법의 적용 범위?’ ‘망각의 영역’ ‘P.P/SP’

맷이 이해할 수 있는 언어들은 짧은 도막으로, 스케치처럼 쓰여 있었어. 공대생에게 어울리지 않는 마법이라는 말이 이상하게 느껴지진 했지만 그런 것에 기대고 싶을 정도로 간절할지도 모르지.

P.P는 피터 파커일테고, SP는 무엇의 약자인 모양이야.

맷은 손가락을 내리는 것으로 그 답을 알 수 있었음. 다른 것들에 비해서 연하게 쓰여진 글자였어. 아마 지우려던 모양인데 자국만은 남아 있어서 맷의 손끝에서는 숨길 수 없었지.

‘SPIDER-MAN’

피터의 심장은 낮은 소리로 울리고 있었어. 피터의 시선은 아마 맷의 손에 가 있을 테지.

처음 생각은 스파이더맨을 동경하는 걸까? 였어. 스파이더맨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이야기들이 있었지만 여전히 그를 좋아하는 팬보이들도 남아 있을 수 있잖아. 맷의 손가락은 지워져 있는 그 단어에 머물러 있었음. 피터는 맷이 무얼 읽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 피터 파커, 스파이더맨.

스파이더맨은 살인을 할 인물이 아니라는 생각도 덧붙여졌음. 스파이더맨을 만난 적이 있었나? 맷은 자신이 헬스 키친을 벗어난 적이 없음을 상기했어. 스파이더맨에게 도움 받은 기억도 없었지.

피터의 이름과 스파이더맨은 어감이 너무나 잘 어울렸어. 이상할 정도로.

- 피터 파커. 스파이더맨.

맷이 작게 중얼거렸어. 두근. 맷은 커다란 심장소리를 향해 고개를 향했지. 피터의 심장소리가 과하게 빨라졌어. 요즘 대학생들은 흥분이 빠르니까, 라고 생각하기에도 이상했지. 지독하게 잘 어울리는 피터 파커와 스파이더맨이 맷의 혀끝에 맴돌았어. 피터의 심장소리는 과할 정도로 빠르고 컸지.

장르랄게 없는 엉망으로 만들어진 선율. 울고 싶은 것인지 과도하게 흥분한 것인지, 그도 아니라면 분노한 것인지 알 수 없는 커다란 심장소리.

- …괜찮아요?

닫힌 노트북 위에 얹어져 있던 피터의 손등에 제 손바닥을 포개며 맷이 다정히 물었어. 노트를 읽고 있던, 장갑을 벗은 손이었어.

맷의 입에서 피터 파커와 스파이더맨이 동시에 나왔을 때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어. 혹시 노트에 정체를 적었던 걸까? 분명 스티븐이 다 지웠던 거 같은데. 혹시라도 기억이.

스파이더맨과 피터 파커를 동시에 알고 있는 사람은 없어. 애초에 피터 파커를 불러줄 사람들조차도 없으니까. 도망가, 파커.

손등을 덮고 있는 손이 너무 따뜻해서 피터는 눈가가 따가워졌어. 피터의 엉망진창으로 흐트러진 맥박이 맷의 손바닥을 간지럽혔지. 살짝 내려간 선글라스로 변호사의 눈이 보였을 때, 피터는 도망쳐야한다는 걸 알았어. 피터의 삶에 누군가가 끼어들면 안 돼.

- …수업이 있어요! 가볼게요, 변호사님!

피터 파커에게는 선택지가 많지 않았어. 그중에서 피터가 고른 것은 도망친다였지. 혹시나 변호사님이 기억이 돌아왔다면? 일말의 희망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런 생각조차도 사치임을 알고 있는 피터는 맷에게 재빨리 인사를 하고 가방을 잡아 들고 잽싸게 뛰었어.

- …요즘 대학생은 다 저런가?

추운 벤치에 홀로 남겨진 맷이 허, 하며 한숨을 뱉었어. 어린 꼬마가 뭣도 모르고 건반을 치는 것처럼 피터의 맥박은 엉망으로 뒤섞여 있었어. 심장소리처럼 달리는 건 재빠르네. 쫓아가려고 해도 힘들겠어. 맷은 슬슬 몸까지 으슬으슬 떨려서 벤치에서 일어났어.

노트는 안 가져가요? 과제로 안 낸다고 했지만, 노트에 이것저것 여러 가지를 적어둔 것 같은데.

스파이더맨의 팬보이라는 걸 들킨 게 부끄러운 것인지, 그도 아니라면 정말 피터 파커가 스파이더맨과 가까운 사이인 것인지 맷은 알아내지 못했어. 그 전에 피터가 도망쳤거든.

-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말도 못 했네

캠퍼스를 오는 것은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말 했어야 했는데. 말하기도 전에 분실물까지 습득해버리고 말았어. 볼일을 마친 포기가 이 추운 날씨에 벤치에서 기다린 거냐며 기특한 강아지를 칭찬하듯 말했지. 맷은 잠깐 미간을 찌푸렸다가 다시 입가에 미소를 둘렀어.

- 포기, 나 잠깐 들릴 곳이 있어.

- 뭐?

- 노트를 주웠거든. 주인 찾아주고 돌아갈게.

피터가 두고 간 노트를 들어 올리며 맷이 말했어. 포기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허? 하고 숨을 뱉었지만 이내 맘대로 하라며 난 추우니까 먼저 돌아가겠다고 말했지. 맷은 고개를 끄덕이고 추위로 삭막하고 조용해진 캠퍼스를 걸었어. 따뜻할 때, 볕이 좋을 때는 너나할 것 없이 밖에 나와 있던 요즘 대학생들은 모두 건물 안으로 피한 모양인지 지독히도 조용했어. 그리고 그건 맷 머독에게 좋은 일이었지. 소음이 덜하다는 거니까. 그리고 장르 없던 그 음악을 찾아내기에도 편하다는 거야.

캠퍼스가 꽤 넓긴 했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닐 거 같았어. 데어데블은 범죄자의 발소리도 쫓아 가는 걸. 요만한 대학생의 쿵쾅대는 심장 소리를 쫓는 것은 그보다 더 쉬운 일이지. 게다가 여긴 맷 머독의 모교야. 변호사가 되기 위해 고생했던 기억이 서려 있는 곳.

케인으로 바닥으로 툭툭 치며 맷은 피터를 떠올렸어. 공대생이라고 했지. 행동반경은 엇비슷할 거야. 수업이 있다는 건 거짓말이 아닌 것 같으니까 여전히 캠퍼스 어딘가에 있을 테지. 맷은 발걸음을 옮겼어. 사실 이렇게까지 돌려줄 이유는 없는데 말이야. 그냥 맷은 그러고 싶었어.

엉망인 심장 소리도 그렇고, 기억 이야기를 할 때 목소리가 딱 울 것 같았거든. 피터라고 부를 때마다 피터의 심장소리가 강렬하게 울리며 말했지. 나 너무 슬퍼요. 자기 이름을 불러줄 때 그렇게 슬퍼하는 사람이 어딨어. 맷은 피터의 심장 소리도, 그 안에 감추어진 감정에도 신경이 쓰였어. 호기심일지도 모르지. 그리고 스파이더맨과 피터 파커가 이상하게 입에 익은 이유가 궁금해졌거든. 피터가 고민하던 과제의 적용 대상이 누구인지 물어본다면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 같았지. 아, 찾았다.

수업이 있다는 말이 거짓말은 아니었던 모양인지 피터는 어느 커다란 강의실의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었어. 쿵쿵 울리는 심장 소리가 딱 피터의 것이었거든. 보통의 대학생들과는 다른 심장 소리가 강의실에 있는 다른 학생들의 웃음소리와 맥박들 사이로 아주 강하게 제 존재감을 뽐내고 있었지.

강한 힘으로 펌프질을 하는 심장, 손을 움직일 때마다 몸의 근육들이 움직이는 소리들이 들렸거든. 보통 사람이면 갖고 있지 않은 소리들이었어. 그렇게 보면 피터는 특별한 장르일 거야. 지금까지 없었던 새로운 장르, 강한 힘으로 엉망으로 울리는 어린아이 울음소리 같은 멜로디.

아직 수업이 시작하지 않은 강의실로 마음대로 들어간 맷은 피터의 옆자리에 앉았어. 눈치 채지 못하고 노트북을 쓰고 있던 피터는 옆자리에 맷이 앉고서야 잠깐 눈길을 주었지. 강의실에 자리도 많은데, 일부러 구석진 자리를 골랐던 건데, 옆에 누가 앉는 일이 흔치 않았거든.

피터는 잠깐 고개를 돌렸다가 자신을 향해 빙긋 웃는 변호사를 발견하고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겨우 삼켜냈어. 대신 피터의 심장이 소리를 질렀지. 쿵쾅거리며 빨라지는 리듬. 드럼을 마구 잡이로 두드리는 것 같았어.

- 맷…?

- 피터? 우연이네요.

맷이 놀랐다는 투로 말했음. 피터는 노트북을 덮어둘 생각도 못하고 옆자리에 앉아 있는 맷을 멍하니 쳐다봤어.

왜 변호사님이 강의실에 있어요? 우연이라는 말이면 일부러 찾아온 것도 아닐 거 같은데, 졸업하셨다고 하지 않았나요? 공대 학위가 필요하셔서 새로 다니시는 건가? 그러다가 어쩌다보니 내 옆자리에 앉은 거고? 피터, 침착해! 침착하게 묻는 거야. 뭘 물어야하지? 자리를 옮기면 이상하게 보시겠지?

피터의 머릿속이 시끄러워졌어. 호흡이 흐트러졌지. 도망갈 구석이 없어.

- 피터?

노트북에 올려져 있던 피터의 손 위로 맷의 손바닥이 덮였어. 밖에서도 따뜻하다고 생각했는데, 안에 들어와도 역시 따뜻한 손이야. 피터는 마지막으로 누군가와 이렇게 가까이 있었던 적이 있었던가 떠올렸어. 집 계약을 하거나, 친구들이 보고 싶은 마음에 갔던 카페에서 잠깐 커피를 건네받을 때나, 스파이더맨 슈트를 입고 이웃들을 도울 때는 좀 더 많았지. 이런 저런 사람들을 돕고, 여전히 살인범이라는 소문이 돌지만 그래도 스파이더맨을 아는 사람은 많으니까. 피터 파커를 스쳐지나가는 사람들보다는 많을 거야.

손등을 덮은 맷의 온기만으로도 피터는 충분하다 생각했어. 욕심내지마, 피터. 그날을 떠올려.

- 아, 아니요. 맷이 공학에 관심이 있는지 몰라서… 좀 놀라서요!

- 하하. 변호사도 가끔 공학적 지식이 필요하거든요.

- 그래서 학부생부터 다시 시작하는 거예요?

피터의 밝은 물음에 맷은 잠깐 무슨 소리인가 싶어서 고개를 갸웃거렸어. 그리고 곧 피터가 자신이 재입학을 한 것이라고 오해하고 있음을 깨달았지. 물론, 배움에 빠르고 느림은 없다지만 변호사 사무실을 차렸는데 대학까지 다시 다니려면 너무 바쁘지 않을까요. 피터? 물론 피터는 맷이 어떤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는지 전혀 모르고(금전적인 이득을 많이 얻기에는 매우 좋지 못한, 아주 작은 변호사 사무실이라 칭하자), 그저 같은 대학을 졸업한 법학부의 어느 변호사로 생각할 테니까 그 어려움을 모를 테지만 말이야. 맷이 웃음을 터뜨리며 고개를 저었어. 아니에요, 피터. 맷이 크게 변명하기 전에 교수가 들어와 수업이 시작되었지.

- 사실 피터를 쫓아온 거예요.

맷이 피터에게만 들릴 정도로 작은 소리로 속삭였어. 피터가 깜짝 놀라서 맷을 돌아봤는데, 맷의 눈은 눈앞의 강의에 가 있었지. 사실 시선만 옮긴 거지 보이지 않아서, 결국 피터의 심장소리나 호흡을 듣고 있었어. 이러다 피터의 심장이 터지는 게 아닌가 모르겠어. 대학생을 괜히 놀리는 기분이 되어버려서 맷은 입꼬리를 당겨 미소를 지었지. 

피터의 머릿속은 아까보다 더 엉망이었어. 맷이 피터 파커와 스파이더맨을 함께 불렀던 것도, 지금 맷이 피터를 쫓아 왔다는 것도 모두 꿈처럼 아득하게 느껴졌지. 혹시나 맷이 기억을 찾은 걸까 생각하며 슬쩍 눈길을 돌려봐도 색안경을 쓴 변호사님의 마음은 알 수가 없었어. 아닐 거야. 마법이 그렇게 쉽게 풀릴 리가 없지. 어떤 각오로 한 일인데. 모든 걸 다 버릴 각오로 저지른 일이야. 피터는 수업 내용이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어.

- 거기 학생은 어느 과죠?

- 네??

- 학생 말고, 그 옆에 잘 차려입은 분.

수업을 하던 중 교수님이 피터 쪽을 보며 질문을 했음. 머릿속이 복잡하던 피터는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그 질문이 자신의 옆에 앉은 맷을 향한 말임을 알았어. 확실히 공학부에서 정장을 잘 차려입은 학생은 보기 드물지. 게다가 맷은 대학생보다는 나이도 있잖아(피터는 이 생각을 하면서 맷에게 조금 미안해졌어). 맷도 곧 그 질문이 자신을 향한 것이라는 걸 깨닫고 눈썹을 으쓱이며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보였어. 공대생을 쫓아 들어와서, 우연히 수업이 시작하여, 청강을 하게 되었다고 변명하면 이상하게 들리려나.

맷이 그럴싸한 이유를 생각하여 말하려던 사이에 피터가 먼저 입을 열었어.

- 법학부 친구인데…, 부전공에 관심이 있다고 해서 청강 중이에요!

법학부라는 말에 교수도 고개를 끄덕였어. 그쪽은 연령이 또 다양하니까. 위기를 어떻게든 넘긴 피터는 작은 한숨을 푹 쉬며 맷을 슬쩍 바라봤어. 맷은 여전히 미소를 지으며 피터에게 “변명 고마워요.”하고 말했지. 피터는 강의 내내 맷에게 묻고 싶었어. 왜 날 쫓아왔어요? 피터 파커를 기억해요? 제가 스파이더맨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나요? 맷, 저 사실 힘들고 무서워요. 세상에는 친절하고 다정한 사람들 많은 만큼, 무서운 사람들도 많아요.

나를 향해야할 것들이 주위 사람들까지 다치게 만드는 것이 너무 두려워요. 스파이더맨은 모든 걸 망쳐버릴 테니까.

피터는 두 손은 무릎 위에 모으고 손을 꼼지락거리며 입술을 씹었어. 다 말하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지. 피터 파커에게는 대화 대상이 필요했어. 스파이더맨으로 여러 이웃들에게 농담을 떠드는 것도 좋지만, 피터 파커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해. 하지만 동시에 이런 욕심을 내서는 안 된다는 이성이 경고를 했지. 메이 파커를 기억해. 노먼을 떠올려봐. 너 때문에 다친 친구들을 생각해. 강의시간 내내 피터의 머릿속은 다시 그날로 돌아가는 것만 같았어. 메이 파커를 잃었던 날.

이름을 부를 때마다 심장소리가 우는 것 같은 피터. 쿵쿵 울리는 소리가 아주 낮게 가라앉아 있는 것 같았어. 이런 대학생이 힘들만한 일이 무엇일까. 물론 많겠지. 여긴 사연이 많은 뉴욕이니까. 하지만 보통은 본인의 이름을 부른다고 해서 그렇게 슬프게 울지 않는단 말이야. 이름에 서글픈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 Peter. 흔하디흔한 이름인데, 이상하게 입에 익었어. 맷은 그 이름을 혀끝으로 굴려봤지. 피터 파커와 스파이더맨. 이 연결고리를 도저히 알 수 없단 말이야. 그런데 이상하게 익숙했어.

피터가 간절하게 떠올리는 기억을 잃은, 혹은 잃어가는 사람이 스파이더맨 사건에 관련된 피해자라면? 피터가 스파이더맨의 혐의와 관련이 있어서 뉴스에 오른 적이 있었나? 스파이더맨이 어떤 사건에 연관되어 있었지? 미스테리오 말고도, 스파이더맨이 있었던 사건.

- …I’m sorry, May.

피터가 두 손을 모으고 아주 작게 말했지. 정말 작은 소리여서 한숨처럼 들리는 그런 말이었어. 하지만 맷의 귓가에는 무엇보다 정확하게 들렸지. 죄송해요, 메이. May…. Peter Parker, SPIDER MAN, May… Parker. 맷은 메이 파커라는 이름을 떠올렸어. 의뢰인이었던 거 같은데. 보통 의뢰인의 이름을 까먹지 않는데, 메이 파커가 어떤 사건의 의뢰인이었는지는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지. 하지만 스파이더맨과의 연관성은 알고 있었어. 데일리 뷰글에서 얼마나 시끄럽게 떠들었는지, TV가 없는 맷의 집에서도 들릴 정도였거든.

스파이더맨이 가는 곳마다 혼란과 참사가 잇따릅니다.

메이 파커는 폭파 사건의 사망자였어. 그때 도우러 가야하나 고민했던 기억이 났지만 맷은 무엇을 도우려 했는지는 명확히 생각나지 않았어. 메이가 의뢰인이었던가? 그러면 피터는 메이의 가족이고, 스파이더맨이 벌인 일의 유가족일까. 스파이더맨이 연관 있다는 추측만 있을 뿐 그 사건은 제대로 된 결론도 내지 못하고 종결되었을 거야. 증거가 부족했다고 들었으니까. 연관된 피의자가 있었다면 포기의 연락망에 금세 닿아서, 참견하기 좋아하는 변호사들이 가만히 있지 않을 거거든. 맷은 빠르게 메이와 피터, 스파이더맨의 연결점을 머릿속으로 이었어. 피터는 스파이더맨의 팬보이가 아닐지도 모르지. 하지만 스파이더맨을 미워하는 사람도 아닐 것 같아. 이건 데어데블의 추측이었어.

메이를 생각할수록 피터는 자신이 이러면 안 된다는 사실을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어. 메이처럼 또 다른 사람을 잃게 된다면 견딜 수 없을 거야. 그러니까 누구에게도 기대면 안 돼. 온전히 네 힘으로 서야해. 스파이더맨, 넌 혼자여야만 해.

그런 생각을 할수록 피터는 일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어. 혼자니까 더 강인해져야하는데 눈가가 시큰거렸지. 강의도 무엇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어. 맷이 피터 파커를 기억하는지, 변호해주었던 그 날을, 벽돌을 재빠르게 잡아주었던 그 순간을 기억하느냐고 묻고 싶었어. 그게 아니라면 왜 나를 쫓아왔어요? 피터 파커가 무엇이 특별하다고, 이렇게 관심을 주는 걸까. 피터는 두 손을 맞잡고 호흡을 고르기 위해 애썼어. 얼른 강의가 끝나서 도망치고 싶을 뿐이었지. 조금만 더 있다가는 맷에게 무엇이든 술술 불어버릴 것만 같았거든.

- 괜찮아, 피터.

맷의 손이 피터의 허벅다리 위에 닿았어. 가볍게 손바닥으로 허벅지를 툭툭 두드려준 맷이 피터를 슬쩍 돌아보며 말했어. 무엇이? 피터는 맷이 피터에 대해서 무엇을 알고 있는지 묻고 싶었어. 그냥 같은 대학을 다니는 후배가 아니라, 진짜 피터 파커를 알고 있냐고 옷자락을 꽉 붙잡고 애원하고 싶었지. 날 기억해줘요. 욕심을 내면 안 된다고 생각할수록 맷이 다가와. 피터는 자꾸만 흔들렸어. 그래서 과제도 주제를 바꿨는데, 맷이 자꾸만 피터의 의지를 시험하는 것만 같았어. 메이 숙모, 저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요.

피터와 맷은 서로에게 집중한 채로 수업이 끝난 줄도 모르고 말없이 앉아 있었어. 맷은 메이 파커와 피터 파커의 연관성을, 피터의 바닥까지 떨어진 심장소리가 아프다고 생각하고 있었고, 피터는 자꾸만 먼저 말을 걸어오고 다가오는 맷에게 기대고 싶은 마음을, 솔직하게 말하고 싶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애써야했거든. 학생들이 모두 나가고 강의실이 조용해지고서야 피터가 주위를 둘러봤어.

…수업 하나를 제대로 집중도 못하고 날려버렸네.

- 맷, 역시 공학 이야기는 재미없죠?

피터가 가벼운 농담조로 말했어. 심장소리는 전혀 웃고 있지 않은데 말이야. 맷은 천천히 눈을 깜빡이다가 긴 숨을 뱉고 웃었어.

- 사실 피터에게 노트 돌려주러 찾았던 거예요.

맷이 품에 숨기고 있던 노트를 꺼내어 책상 위에 올렸어. 피터는 그제야 자신이 노트를 돌려받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어.

- 아, 죄송해요! 제가 이걸 잊고 가버렸네요!

피터가 책상에 올려진 노트에 손을 뻗는데 맷이 냉큼 노트를 반대 손으로 잡고 들어버렸어. 피터의 손이 뻗은 게 무색하게 말이야. 피터는 맷의 손에 들려 있는 자신의 노트를, 그러니까 욕심쟁이의 바람이 들어있던 노트를 올려다보다가 다시 맷의 얼굴을 쳐다봤지. 맷이 자신과 뭘 하려는지 예상도 할 수가 없었어. 장난치시는 건가.

- 피터, 우리 좀 걸을까요?

- 네?

- 피터에게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카페로 가도 좋고요.

결국 캠퍼스를 걷기로 했어. 추운 날씨인데도 말이야. 어쩔 수 없었어. 피터는 지금 위기였거든. 지금 따뜻한 카페에 가서 포근한 마음으로 변호사님과 마주 앉으면 묻는 게 무엇이든 술술 벌어버리고 말거야. 그게 변호사님을 다치게 한다고 해도. 차라리 차가운 바람을 쐬면서, 칼날 같은 바람이 뺨을 긁고 지나가면 마음이 냉정해질 수 있을 거 같았어. 피터 파커의 나약한 마음을 다잡아야해. 피터는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 위의 옷자락을 꽉 잡으며 스스로에게 말했어. 냉정해져, 피터. 기대고 싶어 하지 마. 변호사님이 다칠 거야. 피터 파커와 함께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추운 날씨 때문에 붉어진 맷의 코끝과 뺨을 보며 피터는 맷의 말대로 카페를 가야했나 잠깐 후회했어. 변호사님이 추워 보이잖아. 미안해지는 마음을 애써 외면하며 피터는 발끝을 보며 걸었어. 피터의 낡은 스니커즈 옆으로 맷의 케인 끝이 톡톡 땅을 두드리고 있었지.

- 이렇게 대학교 캠퍼스를 걷는 것도 오랜만이네요.

- 자주 오지 않으셨어요?

- 그때마다 벤치에 앉아 있었잖아요. 피터 옆에서.

맷이 까먹었냐는 듯 말했지. 피터는 아, 하고 소리를 냈다가 고개를 끄덕였어. 벤치에서 과제를 할 때마다 맷이랑 마주쳤던 게 늘 맷이 캠퍼스에 올 때마다 벤치에 왔기 때문이구나. 그러고 보면 처음부터 맷이 피터를 찾아주었다는 생각이 들었어. 기억하든 못하든. 초코바를 준 것도 그렇고 말이야. 정의로운 변호사님이니까 주변에 관심이 많은 거겠지.

- 사실 오늘이 대학교 오는 마지막 날이거든요. 하던 일이 끝나서요.

- 아…, 이젠 맷이랑 못 만나겠네요.

- 그래서 궁금했어요. 무슨 과제이기에 그렇게 열심히 하나…, 진짜 주위에 기억이라도 잃은 사람이 있나 싶을 정도로 열심히 적었잖아요. 피터, 물어봐도 돼요? 아, 싫으면 싫다고 해도 돼요. 그런 권리는 보장해야죠, 변호사로서.

피터의 심장소리가 다시 쿵쾅거리며 울렸어. 사실 이런 건 천천히 물어봐야하는 건데, 맷 머독의 성질이 느긋하지 못한 탓이지. 맷은 피터에게 메이 파커의 이야기를 하게 된다면 어떨까 고민했어. 더 아프게 할 생각은 없지만, 피터 파커와 스파이더맨의 관계, 그리고 그 사이에 있는 메이 파커의 죽음이 이상했거든. 변호사는 탐정이 아니지만, 스파이더맨이 연관되어 있다면 데어데블이 도움이 될지 누가 알겠어. 맷이 오지 않아도 피터는 계속 노트를 품에 담고 살 테니까. 대학생의 가슴 아픈 고민 정도는 해결해줄 수 있으면 좋잖아. 맷은 애써 자신의 호기심을 포장했어. 호기심인지 기시감인지 알 수 없는 그것. 피터와 벤치에 나란히 앉기 전부터 이 대학생을 알고 있었던 것만 같은 그런 기분 말이야. 스파이더맨과 피터 파커의 이름이 유달리 입에 익은 것처럼.

피터는 잠시 말이 없었어. 쿵쾅거리며 엇박으로 울리는 피터의 심장소리가 그 속마음을 대변해주고 있었지. 망설임. 고민. 두려움. 여러 가지 감정들이 뒤섞인 특이한 피터 파커의 음악. 그 음악에 이름을 붙여준다면 무엇이 될까.

-제 생각을 말할게요, 피터. 어디까지나 추측한 거예요.

입술을 혀로 축이며 맷이 말을 이었어.

- 당신은 스파이더맨이 연관되어 있던 폭파 사고로 어머니, 혹은 가까운 친척이던 메이 파커를 잃었어요.

피터의 호흡이 빨라졌어. 맥박도 빠르게 올랐지.

- 그 사고는 제대로 밝혀진 게 없죠. 그 뒤에 스파이더맨에게 죄를 물어야한다는 의견이 있었지만 증거가 부족했고요. 하지만 피터 파커…, 피터는 스파이더맨이 범인이 아니라고 알고 있는 거죠. 그 폭발사고에 관련된 기억을 누가 잊기라도 했을까…, 여기까지가 내 추측이에요.

주먹을 꽉 쥔 손에 강한 힘이 들어간 게 느껴졌어. 하지만 그 주먹이 맷을 향한 것은 아닌 것 같았지. 그저 꽉 쥔 채로 감정을 꾹꾹 눌러 담는 것 같았어. 피터의 나이가 신체로 보았을 때 고작 열여덟에서 열아홉으로 보이는데, 이런 나이에 감정을 누르며 산다는 게 이상할 정도야. 피터의 심장은 솔직한데 그 솔직함이 밖으로 나오지는 못하는 것 같았지.

‘스파이더맨이 범인이 아니라고 알고 있다.’ 피터는 맷의 말에 진정을 할 수 없었어. 스파이더맨이 아니라면 누가 범인이겠어. 물론 폭탄을 던진 것은 노먼이었지만, 그렇게 된 과정에는 스파이더맨- 피터 파커가 얽혀 있었으니까. 피터는 묻고 싶었어. 내가 아니라면 누가 메이를 죽게 만든 거죠? 저는 누구를 원망해야 해요? 스파이더맨이 망친 것이 아니라면 누가 그런 거예요?

- 조심해요!

탁.

멀리서 날아오던 공이 피터의 눈앞에서 멈췄어. 분명 피터 팅글의 경고를 듣고 손을 뻗었는데, 피터의 손에는 공이 없었지. 공을 쥐고 있던 것은 맷이었어. 맷이 들고 있던 케인은 어느새 던져져 있었지. 야구공. 피터는 맷에게서 공을 받아들고 날아왔던 곳을 쳐다봤어. 캐치볼을 하던 대학생들이 공을 잘못 던진 모양인지 미안하다며 달려오고 있었지. 피터는 공을 다시 가볍게 그쪽으로 던져주고 다시 맷을 쳐다봤어. 창문을 깨고 벽돌이 돌아왔을 때도 맷이 막아줬었지.

- 어떻게 하신 거예요?

- 난 유능한 변호사니까.

맷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어. 그날처럼 맷이 스파이더맨에 대한 일도, 피터 파커에 관한 일도 해결해주었으면 좋겠다하는 생각이 들었지. 피터 파커는 지쳤어. 이야기를 쏟아놓고 묻고 싶었어. 정말 스파이더맨이 모든 것을 망쳤나요? 내가 존재해서 주위 사람들이 다친 걸까요? 전 이대로 평생 혼자 견뎌야하나요?

눈을 꽉 감았다 뜨며 피터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어.

- 변호사님은 스파이더맨이 그랬다고 생각하세요?

긍정도 부정도 아닌 물음으로 피터가 대답했어. 맷은 메이 파커에 대한 추측이 맞았음을 예상할 수 있었지. 메이 파커는 피터와 가까운 가족이었고, 폭파 사고로 사망했어. 그리고 맷 머독이 어떤 연유로 알고 있던 의뢰인이었을지도 모르지. 그 날 맷은 메이 파커의 사고 소식을 들었고, 스파이더맨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도우러 가야한다고 생각했어. 무엇을? 변호사 맷 머독이 도와야할 일이 무엇이 있었지.

스파이더맨이 그랬을까? 맷은 마주한 적도 없는, 그저 이름으로 알고 있던 자경단 동료일 스파이더맨을 떠올렸지. 그의 나이도 어떤 사람인지도 아는 것 하나 없었어. 그런데 이상하게 그를 옹호해주고 싶었지. 그것은 데어데블 본인에 대한 변명일까. 맷은 어떤 대답이 피터에게 도움이 될지 골라야했어. 피터는 피해자 유가족이지. 하지만, 이상하게 스파이더맨을 미워하지 않을 것 같았어.

- 전 스파이더맨이 그랬을 거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다른 진범이 있었을지도 모르죠. 막지 못한 사고일수도 있겠군요. 모든 영웅이 모든 시민을 구해내는 영화 같은 일은 현실에서 좀처럼 일어나기 어려워요, 피터.

맷은 입술을 혀로 적시고, 피터의 호흡을 읽었지. 오히려 차분해진 호흡.

- 우리도 실수를 하니까요. 중요한 건 다시는 그 실수를 되풀이 하지 않는 거겠죠.

슈퍼히어로가 모두를 구해내는 해피엔딩만이 존재하는 영화 속 장면은 일어날 수 없어. 피터는 어릴 적 보았던 수많은 영화들을 떠올렸어. 결국 모두를 구하고 웃는, 그런 해피엔딩이 존재하는 영웅들의 이야기 말이야. 스파이더맨은 그런 엔딩을 결코 볼 수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포기할 생각은 없어.

피터의 발이 멈춰 있던 사이에 맷이 앞으로 걸어갔어. 피터는 맷의 등만을 볼 수 있었지.

- 볼 수 있던 마지막 날인데 자꾸 물어서 미안했어요, 피터.

맷이 앞으로 천천히 걸어가며 손을 흔들었지. 맷이 들고 있던 케인은 아래에 떨어진 채였어. 맷은 지팡이 없이 앞으로 잘 걷고 있었어. 그 모습이 어쩐지 이상하면서도 꿈같아서, 현실감이 사라졌지. 스파이더맨의 편을 들어준 변호사님. 혹시 피터 파커의 편이 되어줄 생각은 없나요. 실수를 할 때마다 별거 아니라고 말해줄 수 없나요. 피터가 차마 발을 움직이지 못하고 맷의 등을 바라봤어.

Go, Peter.

차마 발걸음을 떼지 못하는데 누군가의 목소리가 피터의 등을 떠미는 것 같았어. 피터는 그제야 제 발을 앞으로 뻗을 수 있었지. 숨 한 번 고르지 않고 빠르게 맷에게 달려간 피터는 처음으로 변호사의 옷자락을 쥐었어. 손목이나 다른 곳을 쥐면 맷이 다칠 것만 같아서, 겨우 잡은 게 재킷이었어.

- Mr. Murdock…, 제 이야기 들어주실래요?

맷은 재킷을 잡은 피터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걸 알았어. 겁에 질린 사람처럼 떨리는 손, 울 것 같은 목소리, 하지만 심장은 맷이 피터를 벤치에서 만난 그 어느 날보다도 강하고 우직하게 울렸지. 뒤죽박죽으로 흩어진 음들이 드디어 하나가 되어 울렸어. 건반을 힘주어 누르는 소리, 펌프질을 통해 뜨거운 피가 피터의 몸 곳곳으로 돌고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고 있었어. 피터가 용기를 낸 순간이겠지. 맷은 거절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어. 이상하게 피터에게 기우는 마음이 그랬거든. 지금 거절하면 넌 평생 후회할 거라고. 결국 맷은 고개를 끄덕였지.

- 어디 따뜻한 카페라도 갈까요, 피터?

추위에 붉어진 코가 된 맷이 웃으며 물었지. 피터의 팔을 슬며시 쥐었어. 앞으로 들을 상식을 뛰어넘는 이야기를 모르는 맷은 그저 피터와 스파이더맨의 연결고리를 떠올릴 뿐이었지. 거기에 닥터스트레인지이니, 다른 차원이니 하는 이야기들을 엮는 것에는 조금 긴 시간이 필요했어.

맷에게 팔 한 쪽을 내어주고 걸으며 피터는 처음으로 편안히 웃었어. 피터. 그 이름을 누군가가 불러주는 게 이렇게 따뜻할 일일까. 피터, 일어나. 피터, 학교 가야지. 피터, 네 잘못이 아니야.

그 날 이후로 처음, 피터는 누군가와 함께 길을 걸었어.

메이 숙모, 피터 파커는 이제 외롭지 않을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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