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터랑 문자하는 맷
🕶x🕷
2025. 1. 13. 21:29
- 피터가 맷을 연애 대상으로 보지 않아서,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맷
01.
피터의 연애 고려 대상에 맷 머독이 전혀 포함되지 않는 게 보고 싶다. 근데 맷은 피터를 좋아하는.. 그런 거. 맷은 맥박으로 상대가 나에게 호감이 있는지 알 수 있는데, 피터는 정말 평온한 거지. 친구! 스파이더맨이 데어데블에게 보이는 마음은 딱 거기였던 것이다… 라는 이야기 보고 싶다.
맷이 마음을 자각했던 날, 데어데블과 스파이더맨은 팀업이 끝나고 숨을 돌리고 헤어질 때였어. 평소라면 피터가 먼저 같이 밥 먹자며 이야기하고 맷이 됐다며 갔을 텐데, 그날은 피터가 먼저 권유하지 않았던 거지. 그러니까 왠지 허전해진 DD. 데어데블을 두고 “먼저 갈게요!”하고 가버린 스파이더맨.
막상 피터가 쿨하게 나오니까 맷의 기분이 묘해졌음. ‘오히려 편하잖아’하고 생각하는데 왠지 기분이 안 좋아. 변호사 사무실에서도 계속 미련 없이 돌아서서 웹스윙하고 가버리는 스파이더맨이 떠오르는 거야. 평소랑 너무 달랐잖아. 그동안 너무 거절해서 기분 상했나, 팀업하면서 피터 기분 상하게 했나 고민하기.
하루 종일 예민하게 굴던 맷 머독이 포기에게 한 소리 듣고(의뢰인한테도 짜증 내듯이 말하잖아. 너 마스크 안 쓰고 있거든?) 내린 결론은 그거야. 나 스파이더맨 좋아하네. 그래, 피터 좋아하는 것 같아. 응, 좋아해. 다행히 맷 머독은 이런 감정에 대해서 인정이 빨랐음. 꼬박 하루가 걸렸지만.
다행인 점은 스파이디가 맷 머독의 집을 마치 제 집처럼 들어오고 나가는 녀석이라는 거야. 열려 있는 창문이 무엇인지 기가 막히게 알아차리고 들어와서 집주인을 기다리는 게 특기인 애였음. 어쩐지 그러는데도 화가 안 나더라. 그냥 그렇구나. 하고 넘길 수 있었던 이유가 있었다 싶은 맷.
스파이더맨의 특기가 그런 것이니까, 아마 데어데블과 스파이더맨이 팀업을 할 이유가 없더라도 일주일 안에 피터가 맷 머독의 집을 무단으로 침입해서 우유나 간식을 꺼내 먹으며 “왔어요? 이거 맛있네요”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때 저녁이나 먹으러 가자고 하면 되겠지. 맷이 웃으며 생각함.
‘좋아한다’라는 걸 자각하고 인정하니까 어쩐지 자기 행동이 납득이 되는 맷이 보고 싶다. 잘 먹지도 않은 시리얼이나 간식거리를 굳이 사서 찬장에 넣어두고, 집에 자주 붙어 있지도 않으면서 우유를 꼬박꼬박 사두던 이유가 피터 때문이었어. 피터가 좋아하니까.
이제 알겠네.
맷은 또 우유를 사뒀고, 간식거리로 찬장을 채워둠. 간단한 일이잖아? 자연스럽게 찾아와서 제멋대로 굴고 있는 스파이더맨에게 ‘저녁 같이 먹을래?’하고 묻는 게 전부잖아. 그리고 맷 머독은 누군가에게 약속을 권유해서 거절당해본 경험이 거의 없었어. 어쨌든 호감 가는 얼굴이라는 거겠지.
맷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 피터 파커.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피터는 또 맷 머독의 집에 무단침입함. 냉장고에 우유가 있길래 목이 말라서 마셨고, 찬장에 간식이 있길래 멋대로 뜯어 먹었어. 벽에 웅크리고 앉아서 과자를 씹다가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서 자연스럽게 인사했지.
“왔어요?”
그리고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눴음. 맷이 저녁은 먹었냐고 묻길래, “먹었으면 여기서 과자나 뜯어 먹지 않았을 거예요.”라고 답했고, 아직 배고프냐고 묻길래, “한창 잘 먹을 나이죠.”라고 답했음.
“잘 됐네.”
맷의 말에 뭐가 잘 됐다는 건지 생각하는 피터.
내가 배고픈 게 잘된 일이에요?
“피터, 같이 저녁 먹자. 나도 바빠서 못 먹었거든.”
맷의 목소리가 어쩐지 다정했어. 맷이 뭔가 같이 먹자고 권유하는 게 흔한 일은 아니어서 떨떠름한 피터가 좋다. 선글라스를 쓴 변호사 맷은 어쩐지 기분이 좋아 보였고, 일단 저녁밥은 사줄 눈치였지. 그리고 스파이더맨은 잘 먹을 나이야. 답은 뻔하지.
“근데 저 스파이더맨 차림인데, 스파이더맨이랑 변호사로 가는 거예요? 저녁 회식 장소가 어디 옥상이신가. 옥상이면 피자 배달도 좋아요. 저 가끔 옥상으로 주문하는데 기가 막히게 잘 찾아오더라구요.”
하며 피터가 쫑알거리는데 맷이 자기 방으로 휙 가더니 정장이랑 셔츠를 피터에게 건네주는 거야.
맷이 준 옷을 쥐고 잠깐 멍하니 맷 쳐다보는 피터.
“어…. 입어야 해요? 맷, 우리 어디 잠입해야 해요? 뭐 어디 킹핀이 디너쇼라도 하는 거예요? 아, 잠입미션 가는 거구나! 저 그런 거 좋아해요. 영화에 나오잖아요. SPIDEY and DEVIL, 스파이미션! 근데 거기 음식도 준대요? 저 진짜 배고픈데.”
일단 입으라니까 대충 슈트 벗어 던지고 셔츠랑 바지랑 입는 피터 보고 싶다. 맷이 맹인인 거 알고 있고, 스파이더맨 엉덩이 사진도 인터넷에 팔 리는 마당인데 부끄러울 게 뭐 있어. 훌렁훌렁 잘 벗어 던지고 갈아입는 피터. 셔츠단추 잠그면서 “그래서 잠입은 어디로 하는데요?”하며 조잘거렸음.
맷이 피터에게 넥타이 매주는 게 보고 싶다. 저녁 먹자는 말이 진짜 밥을 같이 먹자는 말이라는 걸 인식 못하는 피터에게 넥타이를 매주면서 말하는 거지.
“우리 진짜 밥 먹으러 갈 거야, 피터.”
일부러 가까이 붙어서 숨결이 닿는 거리인데, 피터는 잠입이 아니라는 것에 실망한 상태야.
무슨 대단한 밥을 사주려고 옷도 갈아입으라는 건지. 킹핀이 여는 파티라도 망치러 갈 줄 알았는데, 아니라니 피터가 실망한 눈치가 가득한 거지. 맷은 괜찮고 분위기 좋은 곳을 떠올려서 피터의 팔을 잡고, 식당에서 밥을 먹었고, 피터는 잘 먹었고, 이야기도 잘 나눴지.
진짜 그랬지….
맷이 자연스럽게 피터의 팔짱을 껴도, 닿아도 피터는 그냥 담담했음. “여기 맛있네요, 맷.” 진짜 밥만 잘 먹었던 거임. 맷네 집에 옷은 벗어 줘야 하니까 저녁 잘 먹고 밤길 같이 걸으면서 수다 떠는 두 사람. 늘 그렇듯이 주로 피터가 말하는 편이었어.
한참 떠들던 피터가 저녁 사줘서 고맙다고 하는 거야.
“사실 그렇게 우리가 가까운 사이는 아니었잖아요? 그래도 생각보다 맷이 저 싫어하는 건 아닌 거 같아서 다행이네요.”
피터가 유쾌하게 말했음. 팔짱을 끼고 걷는 피터는 정말 별생각이 없는 것이다. 사실 맷은 지금까지 스파이더맨의 심장 소리가 어떤지 제대로 살펴본 적이 없었음. 그냥 피터가 쫑알거리는 게 시끄럽지만 대충 소음처럼 두고 살았던 거지. 피터가 어떤 생각으로 맷과 같이 있고, 팀업을 했는지는 궁금해하지 않았던 거야.
그래, 이젠 알았어. 스파이더맨은 데어데블은 사이가 좀 안 좋은 친구로 알고 있었다는 걸. 맷에게는 피터가 꽤 친한 애였는데. 아니 그 정도 만나고 팀업하고, 이야기 나눴으면 가까운 사이여야 하는 거 아니야? 피터와 맷이 서로를 생각하는 게 달랐어. 피터의 심장 소리는 평소보다 빠르긴 했지만 정말 순수하게 ‘생각보다 우리 좋은 친구였네요(맛있는 것도 사주고)’라는 의미의 기쁨이었던 거지.
집에 마음대로 와도 봐줬는데. 맷은 피터에게 자신의 공간을 내어준 것인데, 피터는 그냥 맷이 귀찮으니 무시하는가 보다 생각했던 게 좋다. 스파이더맨의 친구 바운더리에 있었던 데어데블.
“생각보다 좋은 사람이었네요, 맷!”
피터는 맷이 빌려준 정장을 훌렁 벗어서 소파에 던져두고 스파이더맨 슈트로 갈아입고 창문으로 나갔어.
피터는 도대체 데어데블을 뭘로 생각했던 거야?
팀업 끝나면 밥 먹자, 같이 수다 떨자 하던 건 그냥 장난이었어?
그간 피터를 대충 대한 업보를 맞은 맷.
친구, 그래 친구에서 연인이 되기는 보통은 어렵지 않아. 맷은 그런 경험이 자주 있었음. 하지만 문제는 스파이더맨의 ‘친구’의 개념은 보통과 다르다는 거야. 피터는 이야기 한 번 나눈 사람도 친구라고 생각해. 그 친구에는 온 길거리 자경단원들이 포함되어 있겠지. 스파이더맨은 데드풀도 친구라 말할 거야.
자각을 했더니 더 답답해진 맷이 보고 싶다.
아, 차라리 모르고 살았으면 괜찮은데. 스파이더맨이 데드풀이랑 데어데블을 비슷하게 친구라고 부르고 다닐 거 생각하니까 좀 짜증 나는 거야. 울버린도 친구일 거야. 길 가다 만난 시민도 스파이더맨 친구겠지. 스파이더맨의 친구가 되지 않는 게 더 어려울 거야, 이 뉴욕에서는. 오래 알고 지냈으면 뭐해. 많고 많은 뉴욕커들과 데어데블은 똑같이 스파이더맨의 친구인데.
더 예민해진 채로 출근한 맷이 포기에게 또 한 소리 들었음.
02.
보통 그러고 나면 기분이 나빠서 그만 좋아하든지 해야 하는데, 맷은 오히려 더 열이 받으면 좋겠다. 내가 피터를 왜 좋아하는지는 모르겠는데, 피터가 날 그런 녀석들이랑 동급으로 생각한다니까 너무 모욕적이잖아. 맷 머독이 그렇게 피터 파커와 분위기를 내기 위해 노력하기로 하는 게 보고 싶다.
맷 본인도 피터를 ‘왜 좋아하는지’는 모르겠고, 피터가 미련 없이 휙 돌아서니까 그게 괜히 신경 쓰이고 마음 쓰이는.. 그런 게 좋다. 맷 머독은 연애 사업에서 큰 실패를 한 적이 없었음. 물론 사귄 뒤에 끝이 나쁜 경우는 종종 있었지만 사귀기까지 과정은 어렵지 않았지. 타고난 얼굴, 말솜씨, 능숙한 스킨십, 초감각.
상대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정말로 큰 장점이었음. 변호사 맷 머독이 제대로 자리에 붙어 있지도 않지만 어떻게 좋은 결과를 내놓는가. 다 그런 법이야. 사람들이 좋아할 이야기를 하고, 맥박을 읽어서 또 다른 좋아하는 것들을 해주는 거야.
피터에게 맞춰주는 것도 어렵지 않을 것이란 생각이 드는 거지.
그렇게 맷 머독은 피터 파커에게 작업을 걸기로-호감을 유도하기로 했어. 피터는 맷보다 어리고, 연애 경력도 많아 보이지 않았고(스파이더맨의 형편없는 말솜씨를 봐, 누가 좋아하겠어), 무엇보다 맷이 권유하면 킹핀을 혼내주러 가자는 말에도 “좋아요”하고 가는 애였거든.
쉬울 거 같았어.
그날부터 맷은 피터가 하는 권유를 거절하지 않았음. 다소 거친 신체활동(때리는 것도 힘든 법이야)으로 땀에 젖은 슈트가 몸에 들러붙었지만, 피터가 버릇처럼 “역시 우리 손발이 잘 맞는 거 같아요, DD! 오늘의 멋진 팀업을 기념하면서 건배라도 할까요?”하는 피터에게 “그래”라고 대답해줬어.
그리고 피터의 반응은 놀라움과 기쁨이었던 거야.
“와, 역시 우리 진짜 더 친해진 게 맞네요?”
까칠하던 동료가 드디어 건배해 줄 마음이 생겼다잖아. 물론 건배는 안했지만 그 전에 맷의 집에 멋대로 들어가서 우유 마시고, 과자 먹고, 놀다가기도 했지만 그래도 데어데블이 건배해준 적은 없다구!
둘 다 슈트 차림이니까 어디로 갈까 하다가 결국 작은 술집으로 갔어. 사람들이 데어데블과 스파이더맨의 등장에 놀란 눈치이기는 했지만 다들 취객이니 즐거운 해프닝으로 보는 모양이었음. 피터는 거기서도 오렌지주스나 콜라가 좋다고 했음.
“저 술 안 해요.”
피터가 술을 마시지 않는다는 이유는 정말 멋들어지는 설명이었음. 취기에 누굴 다치게 하면 안 되니까, 게다가 알코올에 약해서, 마시지 않는다. 이런 말에 어느 자경단원이 마시라고 권유할 수 있겠어.
“정말 생각이 깊네, 스파이디.” 보통 이 나이면 친구들이랑 술도 자주 마시고 그러지 않나?
피터 파커는 정말 과학자 모임만 참석하는 거야? 하는 생각을 하며 맷 혼자만 마시고, 피터는 정말 주스만 마셨어. 이야기는 즐거웠지.
“킹핀 녀석 요새 겁먹어서 큰 사건 못 일으키는 것 같아요. 이참에 헬스 키친에 있는 갱단들 겁주는 투어라도 다닐까요? 저도 가끔 무게감 있어 보이면 좋죠.”
진짜 대부분이 다 ‘마스크 이야기’여서 문제지. 솔직히 맷은 이런 이야기를 좋아했음. 포기에게 ‘킹핀에게 경고를 하러 갔는데’라고 태연하게 이야기할 수 없잖아. ‘미쳤냐?’는 소리를 먼저 들을 것이고, ‘너 진짜 미쳤냐’는 소리를 또 듣겠지. 하지만 피터랑은 달랐어. 피터는 이런 이야기를 재밌어하지.
맷은 피터가 떠들어대는 것을 듣는 게 나쁘지 않았어. 피터의 형편없는 농담들과 장난. 그게 싫었다면 팀업을 이렇게 오랫동안 이어 나가지 못했겠지. 스파이더맨과 데어데블의 활동으로 다소 조용해진 헬스 키친 이야기를 하는 피터는 꽤 즐거워 보였어. 맷도 그랬으니까. 조용한 킹핀, 안전한 뉴욕.
맷이 그때 킹핀의 맥박이 어땠는지 설명해 주자 피터가 여느 때보다 즐거운 웃음소리를 냈음.
“DD, 전 이런 게 좋아요.”
범죄자들을 때려주는 거? 당연히 즐겁지.
“우리가 길거리 삶을 지키는 거요.”
…비슷한데 다르네.
결국 맷 혼자만 마신 건배 모임이 되었음. 피터는 웹스윙으로 돌아가 버렸고, 맷은 데어데블 차림으로 집에 돌아갔음. 피터가 좋아하는 것, 호감을 얻는 방법이 길거리 활동이라면 계속 같이하면 되는 거잖아? 데어데블이 하는 일이 그거니까. 헬스 키친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가끔은 폭력도 필요해.
근데 그러면 평소랑 다를 게 없잖아. 맷은 사무실에서 서류를 살피며 맷은 피터에 대해 생각해 봄. 말이 많고, 즐겁고, 장난 좋아하고, 잘 먹을 나이고, 그런데 술은 안 마셔. 그러니까 스파이더맨 웹스윙 소리가 매일 밤 들리는 거지. 개인 시간이라는 걸 가지는 것 같지도 않았음.
바른 생활을 하신다?
03.
맷은 의뢰인과의 약속을 위해 사무실을 나섰어.
날이 추웠어. 맷은 재킷과 코트에 장갑, 목도리까지 다 하고 나와야할 정도로 추웠던 거지. 케인을 들고 걷는데 맷이 익숙한 맥박 소리를 드는 거지. 스파이더맨은 방사능 거미에게 물린 탓인지(이건 뉴요커라면 모두가 아는 사실이야. 피터가 매일 같이 떠들고 다니거든.), 평범한 사람과는 심박이 달라서 체취가 아니더라도 알아볼 수 있었음.
게다가 좋아하는 사람이잖아.
왜 좋아하는지는 모르겠고, 나이도 맷보다 어리고, 상대는 전혀 맷 머독을 좋아하는 눈치도 없지만 일단 맷이 좋아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니까. 팀업도 얼마나 자주 했는데 알 수밖에 없지.
때마침 피터가 조금 멀리서 걸어오는 중이었던 거야. 옆에는 요즘 일하는 곳 동료들인 모양이었음. 피터의 직업은 워낙 자주 바뀌는 편이어서 그때그때 피터 파커가 어떤 일을 하는지 잘 알지는 못했지만 피터가 사람들과 이야기하고 있던 주제가 딱 그랬거든. 과학쟁이들.
피터는 맷을 눈치 못 챈 거 같고, 그냥 모르는 체하면서 서로 갈 길 가는 게 맞겠지 싶은데 피터랑 이야기하는 사람이 그러는 거야.
“너 안 추워, 피터?”
이런 날씨에 겉옷도 없이 다니는 건, ‘저는 추운 겨울날에도 스판덱스 슈트 한 장으로 다니는 스파이더맨입니다!’하고 광고하는 꼴이 아닌가 싶은 맷.
확실히 추울 거 같았어. 피터가 숨을 내쉴 때마다 피터가 내뱉은 따뜻한 입김이 차가운 공기 때문에 곧장 차가워졌으니까.
“피터.”
피터랑 마주치는 타이밍에 맷이 자연스럽게 부르면 좋겠다.
“맷?”
여기서 만날 줄 당연히 몰랐으니까 놀란 눈치였음. 맷의 집이 아닌 곳에서 데어데블이 아니라, 선글라스를 쓴 변호사 맷 머독을 만나는 건 피터도 오랜만이었어. 뉴욕에서 걸어서 마주칠 때도 있네. 피터는 딱 그 정도로 생각했음. 그 정도로 마주치기 힘들었거든. 그때 맷은 피터의 손목을 잡고 가볍게 당기는 거야. 갑자기 맷에게 당겨진 피터가 균형을 잃고 맷에게 가까이 붙은 꼴이 되었음.
“이런 날씨에 그런 차림으로 다니는 건 좋은 생각은 아닌 거 같은데요, 피터 군.”
그러고는 맷이 자기가 하고 있던 목도리를 피터에게 주는 게 보고 싶다. 목도리를 잘 둘러주고 어깨를 두드려주며 말하는 거지.
“이건 오늘 저녁에 돌려줘, 스파이더맨.”
작은 소리여서 피터만 들을 수 있었음. 그러고 맷은 그냥 휙 걸어가는 거지.
어…? 저 사람 왜 저래?
보통의 관계라면 두근거릴만한 상황이었어. 지나가다가 만나서, 추워 보이니까 목도리도 둘러주고 갔잖아. 당연히 피터의 맥박이 오르던지,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게 맞는 반응이라 생각하는데 피터는 정말 떨떠름한 눈치였어. 그리고 동료들이랑 나누는 대화도 맷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는 거야.
잘 차려입은 잘생긴 사람이 피터에게 그러고 갔으니까 당연히 다들 질문을 했지.
“아까 그 사람 누구야, 피터?”
애인이냐, 무슨 사이냐, 잘생겼던데 쏟아지는 질문에 피터가 당황해서 허…하고 헛웃음을 지었음.
잘생겼어요? 잘생기긴 했지…. 그런데 밤에 보면 그 생각 바뀔걸요?
“그냥 친구예요. 변호사라던데….”
변호사라니까 더 난리야. 애인이 아니라면 소개해 줘도 되지 않으냐는 말에 피터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하는 거지.
“성격이 별로라서 후회하실걸요.”
그리고 맷은 레이더 감각을 갖고 있다는 게 문제야. 피터랑 꽤 거리가 벌어졌지만 피터의 목소리가 그대로 들렸음.
“그렇게 다정해 보였는데?”
사람들의 질문을 슬금슬금 피하며 피터는
“오늘 실험의 성과가 꽤 괜찮았죠?!”
하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어. 일 이야기. 사람들은 곧장 남은 실험을 어떻게 해야할지 고민하느라 변호사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을 잊어버렸지. 그렇게 피터가 맷과 점점 멀어졌어.
‘그래, 성격이 별로다?’
맷은 지팡이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며 한쪽 입꼬리를 올려 웃었음. 추워서 얼른 약속 장소로 가야 하는데 자꾸 생각나는 거지.
성격이 별로라서.
… ★ …
목도리를 돌려줘야 하니까 피터가 오늘도 집에 먼저와 있을 줄 알았던 맷은 같이 먹을 저녁을 사 들고 집으로 갔어. 근데 피터는 아직 없었던 거지. 늦나? 해서 기다리는데 피터가 밤이 늦도록 안 오는 거야. 잠깐 전화해 볼까, 하다가 목도리 받아내겠다고 보일까 봐(성격 별로랬잖아) 고민했음.
그때 멀리서 웹스윙 소리가 들리고, 창문 열어주는데 피터 몸에서 탄내가 가득 나는 게 좋다. 일찍 오려고 했는데 화재 현장이 있어서 구조하다가 늦었다면서 피곤한지 하품하면서 말하는 피터.
“그래도 낮에 준 목도리는 잘 챙겨 왔…, 어?“
불에 들어갔다 나왔잖아. 목도리가 타서 엉망이 되어 있는 거지.
피터는 미안해하면서도 꿋꿋하게
“저는 안 추운데 맷이 맘대로 주고 간 거잖아요, 맷 책임도 있어요.”
하며 변명했어. 변상 요구해도 저는 할 말 없어요. 피터의 태도에 어이없어서 웃는 맷이 보고 싶다. 감각이 예민한 맷이 아무에게나 자기 옷이나 물건을 빌려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좋아해서 둘러주고 갔더니 그걸 변상 요구할 거라고 생각해? 포기에게도 내 옷 안 빌려주는데.
웃는 맷 보면서 눈치 보던 피터가
“어…. 변상할 필요는 없는 거죠?”
하면서 이야기해서 “그래” 하기. 다 식은 거라도 괜찮으면 먹으라며 포장해 온 음식 주려는데, 피터 손이 좀 이상한 거지. 피부가 불에 탄 것 같았음. 끼고 있는 장갑도 멀쩡하지 않은 거 같고. 결국 맷은 익숙하게 구급상자 꺼내왔어.
“손.”
강아지에게 손 달라는 것도 아니고…. 피터는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맷에게 손을 내어줬음. 보기보다 괜찮은데. 아…, 맷은 보는 게 아니지.
다들 재킷에 뭐에 걸치는 날씨에 스판덱스 슈트만 입고, 불에 들어갔다 나왔으니 멀쩡한 게 없지 싶은 맷. 장갑을 벗어둘 필요도 없었음. 뭘 쥔 건지 타서 손이 다 드러났으니까. 맷은 스파이더맨의 장갑이었던 천 쪼가리를 찢어냈어. 이미 타버린 천은 쉽게 피터의 손에서 떨어졌음.
“그래도 오늘 거기 있던 사람들은 다 구했어요. 모처럼 고마워요, 스파이디! 소리도 듣고…. 운이 좋은 날인가 봐요.”
슈트가 탄 거랑 자기가 화상 입은 것은 생각도 안 하는 피터. 소파에 앉아서 맷한테 손 내밀고 조잘거리기. 그리고 피터의 마냥 긍정적인 태도에 웃으면서 연고 발라주고, 치료 삼아서 손 만지는 맷이 보고 싶음. 피터는 진짜 별생각이 없었고.
‘맷이 변상 요구를 안 한 것도 역시 운이 좋은 날이야.’
금방 나을 텐데 연고 발라 주길래 얌전히 손 내밀고 떠들던 피터는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음.
그냥 약 발라주는데 이렇게 손을 조몰락거릴 일이야? 맷이 눈이 안 보이니까 그런가 보다, 하는데 손가락으로 발라주는 게 아니라 아예 흡수를 시켜줄 것처럼 맷이 피터의 손을 매만지고 있었음.
화상 입으면 연고를 이렇게 만져서 흡수시켜야 하나? 물어보면 화내려나. 맷이 만지는 게 간지럽기도 하고, 두 손 내민 채로 생각하고 있는 피터. 할 수 있는 게 없어.
입을 떼면 화낼 거 같고(맷은 변호사지만, 데어데블이잖아), 손을 멀뚱히 쳐다보기도 뭐해서 맷을 쳐다보고 있었음.
피터도 보는 눈이라는 게 존재했음. 미인들을 알아보는 눈이라는 게 있다는 거야. 맷 머독은 확실히 잘생겼지. 하지만 누구에게 소개시켜 준다고 생각하면 그 사람에게 너무 미안한 일 아니야? 변호사 머독 씨의 정체를 알고 있는걸. 잘생기면 뭐 해요. 화가 얼마나 많은 사람인데. 데어데블일 때는 사람을 아주…
“피터.”
“네?”
맷은 피터가 자기 얼굴을 빤히 보고 있다는 걸 알았음. 근데 그게 두근거리는 의미는 아닌 것 같아. 그냥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는 것 같았음. 연고 발라준다는 핑계로 피터 손을 만졌는데, 맷은 좋았어. 팀업할 때 정신없이 맞잡긴 하지만 이렇게 만져볼 기회는 없으니까.
장갑보다 부드럽네. 피터의 회복 능력은 일반인보다 뛰어나지만 만능은 아니야. 맷은 잡고 있는 손의 감각으로 화상으로 벗겨진 피부가 아물고 새로운 살이 돋아나는 것을 느낄 수 있었음. 빠르지만 느긋한 속도로 낫고 있는 피터의 손은 아마 한 시간쯤 뒤면 멀쩡해지겠지.
피터의 손에서 느껴지는 감각에 맷은 자기 손까지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어.
어?
맷이 피터의 손등에 입을 맞췄음. 연고가 잘 스며든 피터의 손등은 부드럽고 따뜻했지. 맷의 얼굴을 구경하면서 ‘잘생겼지만 밤에는 폭력적인 사람’은 인기가 있을까 생각하던 피터가 손등에 닿는 촉촉하고 부드러운 감촉에 눈을 크게 떴으면 좋겠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거죠?
피터의 머릿속이 잠깐 정지되었음. 스파이더맨이 할 말을 까먹는다는 것은 정말 나쁜 신호야. 비상등이 켜진 거랑 같은 거거든. 지금 피터 파커의 머릿속에 비상등이 켜졌어.
비상입니다. 지금 무슨 상황인가요?
“아무거나 잘 먹지? 네가 늦게 와서 식긴 했는데, 멀쩡할 거야.”
피터의 손은 어느새 피터의 무릎 위에 놓여 있었어. 피터가 상황을 파악해 보려 하기도 전에 이미 끝나버린 거지. 꿈이라도 꿨나 싶은 정도야. 맷은 아무렇지 않게 포장해 온 음식을 꺼내고 있었고, 피터는 잠깐 앉아서 자기 손을 쳐다봤음. 맷이 꼼꼼히 발라준 덕분에 미끄덩한 연고가 손에 잘 발려서 손이 조금 부드러워진 정도로 남아 있었어.
역시 잘못 본 게 맞나 보다. 손등에 뭔가 닿은 기분이 드는데, 내가 분명 본 것도 같은데, 역시 좀 피곤한 거 같아.
방금까지 화염 속에서 사람들을 구하고 온 피터의 머리는 제대로 된 판단을 내리지 못했어. 머릿속의 비상등이 이미 그 불길 속에서부터 켜져 있었을지도 모르잖아.
피터는 맷의 맞은편에 앉아서 식은 음식을 먹었어. 화상 입은 손이 조금 쓰라리긴 했지만 참을 만했어. 음식을 먹으며 맷이랑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는 동안 다 치유되었는지 그런 아픔도 언제 있었냐는 듯 사라졌지. 이만 돌아가 보겠다는 피터에게 맷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자고가. 피곤해 보이는데.”라고 말했지.
아, 확실히 피곤해요.
“진짜죠? 나중에 숙박비 청구하지 마세요.”
피터는 하품을 길게 했음. 웹스윙할 생각에 피곤했던 게 사실이니까. 어쩌다 보니 외박까지 하네. 딱 그 정도의 생각으로 자고 가기로 했음. 피터 파커는 정말 피곤했어. 이대로 자버릴지 고민하는데 피터의 눈에 숯덩이가 된 맷의 목도리가 들어왔어.
저거, 진짜 부드럽고 좋았는데.
목에 닿는데 거칠하지도 않고 딱 보드랍고 따뜻하게 감기는 게 비싼 거겠지. 타버린 목도리를 쳐다보고 있으니까 피터 본인도 옷과 몸이 불 속에 데워져 나왔다는 걸 그때 깨달았음.
“맷, 저 온몸에서 석탄 냄새가 나는 것 같은데…, 샤워도 해도 돼요?”
“그건 물어보고 하는 거야? 피터, 너도 양심이란 게 있었네. 타올은 선반에 있어.”
“에이, 제가 얼마나 양심적인 거미 인간인데요….”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말하는 피터를 보며 맷이 한숨 쉬며 웃었어. 욕실로 들어간 피터가 문을 닫고, 맷은 타버린 목도리를 쓰레기통에 넣었음. 욕실에서 나는 물소리 사이로 피터가 흥얼거리는 노랫소리가 들렸음. 정말 위기의식이라는 게 없는 녀석이야, 피터는.
목도리를 감아줄 때도, 약을 발라줄 때도, 그리고 방금도 피터는 정말 맷을 친구로 생각한다는 게 분명했어. 저런 애가 왜 좋은지 맷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음. 이런데도 심장이 꿈쩍 안 하는 피터에게 애쓰는 것보다 맷 머독을 좋아하는 사람을 찾는 게 더 빠를 텐데 말이야.
피터를 좋아한다는 건 알지만 ‘왜’인지는 여전히 모르는 맷. 나 싫다는 사람에게 매달리는 타입도 아닌데 말이지. 맷은 서랍에서 피터가 입을만한 옷을 꺼내어 욕실 문 옆에 두었어. 맷이 정리하는 동안에도 피터는 열창을 하고 있었음. 욕실에 울려서 더 잘 부르는 것으로 들리는 모양이지. 저런 것도 귀엽다 생각하는 걸보니까 진짜 좋아하나 보다.
“I wanna be somebody to someone, oh~!”
피터가 하이라이트로 갈수록 가성을 쓰기 시작했음. 맷은 터지는 웃음을 꾹 누르며 여분의 베개와 이불을 꺼내어 소파에 두었음. 아무리 그래도 침대에서 같이 자자고 하면 그건 싫어할 거 같았거든.
샤워를 마치고 덜 말린 채로 나온 피터. 머리칼에서 물이 떨어졌음. 기껏 포근하고 괜찮은 옷으로 꺼내줬는데, 떨어지는 물에 맷이 빌려준 옷도 젖어가고 있는 거지.
맷은 말없이 난방기를 강하게 틀었음. 스파이더맨 복장도 그렇지만 피터는 감기에 걸리고 싶어서 안달이 난 애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물론 그렇게 말하면 ‘저 이십 대 중반이거든요’라고 하겠지만 말이야.
바로 졸리니 자겠다는 피터를 억지로 일으켜서 맷은 피터의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말려줬음. 평소면 피터가 몇 마디 던져야 했는데, 정말 피곤한지 하품만 하며 “이제 자도 돼요?”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음. 자고 가라고 안 했으면 웹스윙하다가 어느 옥상에서 노숙하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맷.
맷의 손길에 피터는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는 거야. 아까까지는 불속에서 옮아온 냄새를 달고 있던 피터는 이제 비누와 바디워시, 그리고 멀리서도 피터임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체취만을 담고 있었어.
쪽
피터의 머리칼에 또 키스하는 맷. 잘 말린 머리칼은 보송하고 부드러웠어. 맷은 피터의 머리칼에 코를 박고 잠깐 웃었어. 맷의 욕실에 있던 샴푸 향이 피터에게서 났거든. 향이 극히 적은 편이어서 피터 본인은 못 느낄 테지만 말이야.
맷은 피터의 머리통에 짧게 입 맞추고 머리를 대충 쓰다듬어주곤
“잘 자, 피터.”
하며 굿나잇 인사를 남겼음. 그러고는 수건을 빨래통에 던져 넣고 방으로 들어갔지. 맷의 손길에 꾸벅꾸벅 졸던 피터는 잠깐 멍하니 맷이 닫은 방문을 보다가 소파에 누워서 이불을 덮었어.
오늘 나 진짜 이상한 거 같아.
아까 머리칼에 뭐가 닿았는데 손이었는지 뭐였는지 제대로 판단이 안 되는 피터. 눈꺼풀이 너무 무거웠어. 깊게 생각하기 보다 그냥 잠드는 쪽을 택하기로 했음. 맷이 난방기 온도를 높여둔 덕분에 거실 소파도 충분히 따뜻하고 좋았어.
04.
피터와 맷의 관계는 여전히 친구였어. 대신 전보다는 좀 더 친한 사이? 피터의 생각은 그랬음. 요 몇 년간의 관계보다 최근이 제일 가깝지 않을까 생각하며 피터는 휴대폰을 확인했어.
[요즘 바쁜가 보네?]
아, 맷이다. 문자 메시지는 불편하다는 맷에게 피터는 음성인식으로 채팅을 할 수 있는 애플리케이션을 만들어주었음.
일명 ‘Parker Chat’이야.
음성인식은 기본적으로 갖고 있는 기능이지만 목소리에 반응한다는 게 워낙 완벽하지 않잖아. 물론 토니 스타크처럼 재력이 있다면 AI와 친구도 하고, 사람보다 인공지능이랑 더 오랜 시간을 보내도 괜찮겠지만 보통의 사람들은 그렇지 않으니까.
피터가 이걸 맷에게 만들어준 이유는 간단했어. 피터 파커가 매일 전화 통화를 할 시간이 없다는 거야. 그건 맷도 마찬가지였고. 변호사랑 연구원이 서로 시간을 내서 같은 시간에 전화한다는 게 얼마나 꿈같은 이야기인데. 게다가 이 둘은 부업까지 뛰고 있는걸. 전화를 하는 것보다 패트롤을 돌다가 마주치는 게 더 빠를지도 몰라.
부재중 전화에 맷이 있어서, 피터가 다시 전화를 했지만 계속 엇나가서 못 받기를 반복하니까 결국 피터가 업무시간에 조금 딴짓을 하며 만든 게 이것이었음.
맷이 목소리로 ‘Parker’라고 부르면(SPIDER나 DEVIL도 고려해 봤는데, 맷이 파커로 해달래) 저절로 애플리케이션이 맷이 하는 말을 입력해 주었고, 그 말은 피터에게 전송되었어. 피터가 맷에게 메시지를 보내면 기계음으로 맷에게 전달되는 간단한 기능을 갖고 있었음.
영역을 좀 더 넓히면 애플리케이션을 다운로드한 다른 사람들과도 가능할 거라고 피터가 설명했지만 맷은 단호하게 “피터, 너만 연락이 되면 돼.”라고 말했음. 그래서 결국 피터 파커가 업무 중 잠깐 한 딴 짓의 결과물인 파커 챗은 오직 맷과 피터를 위한 것이 되었어.
[조금요]
[하고 있던 연구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생겼거든요]
처음 예상한 것과 다른 결과가 나와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나 뭐라나. 차라리 혼자 진행했다면 금방 끝냈을 텐데, 하고 생각도 해봤지만 일개 연구원이 무슨 힘이 있겠어. 내 회사라도 차리지 않으면 이 추가 업무에서 빠져나갈 수 없는 노릇이다 싶은 피터. 휴대폰을 잡고 맷에게 하소연하는 글을 썼다가 다시 지웠음. 데어데블에게 피터 파커의 슬픈 삶을 이야기하는 건 이상하니까. 그 사이에 맷이 채팅을 한 번 더 보내는 거지.
[그럼 오늘 밤에는 거미 친구는 없는 거야?]
거미친구? 표현 재밌네. 그럼 맷은 악마 친구인가. 맷의 말에 잠깐 입술을 삐죽이며 웃음을 애써 참았어. 마스크를 쓰고 있었으면 농담이라도 한가득 할 수 있었을 텐데, 피터 파커는 아직 오스코프에 갇혀서 뇌를 열심히 굴려야 했어. 피터는 액정에 손가락을 꾹꾹 눌렀어.
[악마 친구랑 동네 돌 시간은 있어요!]
“피터, 이거 좀 봐줄래요?”
“네! 갈게요!”
휴대폰을 가운에 넣고, 다시 연구에 몰두하다가 문뜩 피터가 생각하는 거지. 요새 맷이랑 진짜 친해진 것 같네…. 그거 말고는 긴 생각은 안 했으면 좋겠다. 친한 동료야 많은 법이고, 매주 만나는 길거리 동료도 있는 걸. 매일 연락하는 친구? 있을 수 있지. 피터의 생각은 그랬음. 맷은 여전히 피터에게 연애 대상보다는 친구였으면 좋겠다. 그냥 맷이랑 가까워져서 좋다. 이 정도의 감정이었음.
프로젝트가 바빠서 해가 다 져서야 회사에서 탈출할 수 있던 피터. 뒤늦게 휴대폰을 확인하니까 맷이 또 채팅을 보내온 거지.
[언제쯤 끝나?]
[오스코프 근처에서 의뢰인이랑 만날 일이 있거든]
[전화 줘]
두어 시간 전에 온 것이었어. 전화 달라고 하면 굳이 이걸 만들어준 보람이 없잖아. 피터는 한숨을 작게 쉬고 채팅을 입력했어.
[전화할 시간이 없어서 만든 거라구요]
[지금 나왔어요]
너무 늦게 확인했으니까 맷도 돌아갔겠지 싶었어. 슈트로 갈아입고 웹스윙을 해서 퀸즈에 들렀다가 헬스 키친으로 가면…. 정문으로 나서면서 피터가 피곤한데 지하철이 낫나 고민하는데 멀리서 맷이 걸어오는 것이다. 피터는 전혀 모르고 있었는데, 같이 나서던 동료들이
“어, 저번에 그 변호사다.”
라고 말해서 그제야 알았어. 확실히 맷 머독은 기억에 남을 외모였으니까 동료들이 기억하고 있어도 이상하지 않지. 정장과 코트가 저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도 드물 거야. 피터 파커가 정장을 입어봤자 ‘어디 댄스파티 다녀오니?’라는 소리밖에 듣지 못할 것이지만, 같은 옷도 맷이 입으면 태가 사는 것 같았어.
직업이 주는 분위기? 아니면 외모인가?
피터가 맷을 보며 생각하는 사이에 맷이 피터 앞에 섰음.
“퇴근이 늦네.”
날씨가 날씨니까 맷은 이번에도 코트에 장갑까지 하고 있었으면. 맷의 손에는 맹인용 지팡이가 들려 있었음.
오늘은 목도리는 없네. 아, 내가 태워 먹었지.
추워서 코끝이 빨개진 맷을 보면서 피터가 웃음을 터뜨렸어. 추위라고는 모르고 살 것 같은 데어데블이 사실 추위를 엄청나게 탄다고 하면 사람들이 놀랄 거야. 악마도 추위를 타나요?
“혹시 나 기다렸어요?”
장난기 어린 피터의 말에 맷이 싱긋 미소를 짓는 거지. 그 잘생긴 미소. 피터는 맷의 미소를 보면 불안해졌음. 보통 저런 미소는 같이 닌자를 해치우러 가자던가, 킹핀에게 경고하러 가자던가, 어쨌든 커다란 계획이 있을 때 짓는 표정이라구.
맷이 대답하기 전에 가지 않고 있던 동료 몇몇이 피터의 옆구리를 찔러왔으면 좋겠다. 딱 그거였음. 소개 좀 해줘. 피터는 주위에 이상하게 미남, 미녀가 많은 편이었으니까 이런 부탁은 흔히 들어본 것이었음. 그래서 이런 것만큼은 눈치가 빨랐던 거야.
네, 본부대로요. 나중에 후회해도 몰라요.
“맷, 여기는 제 오스코프 연구실 동료예요. 그리고 여기는…”
“맷 머독입니다. 맷이라고 불러주세요.”
눈치 빠른 맷이 먼저 자기소개를 했음. 피터는 힐끗 맷을 쳐다봤다가 한 걸음 뒤로 빠져주면 좋겠다. 네, 소개해 드렸습니다. 가벼운 악수를 한 뒤에 동료가 변호사라고 들었다고 물었고, 맷은 그냥 작은 사무실을 운영한다고 답했음. 피터는 그 사이에서 어색하게 서 있는 거지. 친절하게 웃는 맷이 어쩐지 낯설게 보이는 거야. 늘 저렇게 웃으면 정말 맷 머독이 데어데블인지 아무도 모르겠지.
‘근데 진짜 맷을 소개해줘도 괜찮은 걸까? 밤마다 나랑 같이 범죄 막으러 다니는데, 패는 게 아주…. 아, 맷이 연애하면 이젠 같이 안 가주려나.’
피터가 고민하던 사이에 짧은 대화가 끝나고 어느새 맷이 피터를 향해 서 있었음.
“피터?”
“아, 끝났어요?”
“응.”
맷이 물끄러미 피터를 보고 있었음. 물론 보는 게 아니라는 건 피터도 알고 있었지만, 기분이 그랬어. 선글라스 뒤로 비치는 눈이 왠지 그런 느낌이었음. 맷 머독이랑 이렇게 밖에서 만날 일이 많지 않단 말이야. 맷의 집 밖에서 마스크 없이 만나는 건 여전히 좀 낯설었던 거지.
“너 기다리고 있었어.”
“네?”
“기다리고 있었냐고 물었잖아. 확실히 이젠 춥네. 슈트만 입고 다니면 감기 걸리겠어.”
맷이 웃으며 말했음. 맷의 코가 붉어진 이유가 있었네, 싶은 피터. 아니 왜 멋대로 기다렸냐고 탓하고 싶었다가 입술을 꾹 깨무는 거지. 아무리 그래도 이 추운데 기다렸다는데 스파이더맨도 양심이란 게 있지. 악마친구랑 동네 산책 같이 가기로 해놓고 야근을 한 피터 파커가 죄인이죠. 그동안 휴대폰도 확인 안 했고 말이야.
“맷, 우리 따뜻한 곳에서 몸 좀 녹이고 가요.”
“바로 패트롤 갈 생각 아니었어?”
“변호사님을 이 추운데 세워뒀는데 양심 없이 어떻게 가요. 커피라도 마시며 생각해 보죠, 뭐.”
어차피 패트롤 돌고 집에 들어가서 자려면 새벽은 되어야 할 테니까. 자는 시간을 조금 줄이지 싶은 피터. 그렇게 나란히 걷는 게 보고 싶다. 맷은 코트에 장갑까지 하고 있고, 피터는 여전히 좀 얇은 옷차림이었음. 지팡이를 접고 피터 팔을 잡는 맷.
피터가 잠깐 놀라서 맷을 쳐다봤다가 한숨을 쉬고 잡기 편하게 팔 한쪽을 내어줬음. 연기력 끝내주시네요, 변호사님. 어쩌겠어요, 제가 협조해 드려야지. 피터는 부드럽게 팔을 쥐는 맷의 손이 간지러웠지만 꾹 참았음.
맷은 장갑을 끼고 있어서 아쉽다고 생각했음. 집에서는 맨손으로 만져볼 수 있었는데 싶은 거지. 피터는 어디까지 둔감한 건지 맷의 스킨십에도 움찔거리다가 바로 적응해 버렸음. 그냥 놀랐다, 정도의 반응이야. 이 둔감함이 짜증도 나는데, 동시에 재밌어진 맷.
손등에 키스해도 모르고, 머리칼에 입술을 꾹 눌러도 모르는 게 오히려 귀엽다 느껴지는 거야. 어릴 때나 지금이나 이런 점은 변하지를 않네 싶은 거지. 남 일에는 관심이 많고, 눈치도 빠르면서 자기 일에는 눈치 없는 점. 툭하면 다 자랐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어리다니까.
맷은 피터의 팔을 슬며시 쥐었다가 실수인 척 피터의 손을 잡았음. 피터는 맨손이었고, 맷은 장갑을 끼고 있었음. 피터의 손가락을 슬며시 쥔 것에 불과했음. ‘실수’여야 하니까. 맷은 팔을 쥐고 있던 손을 놓쳐서 손가락을 잡은 체를 했음. 수다를 떨며 걷던 피터가 갑자기 손을 잡아 오는 맷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웃음을 터뜨렸음.
“저 이제 애 아니거든요? 안 잡아도 안 튀어나가요.”
눈치 없는 파커. 자길 어린애 취급한다고 생각하는 피터의 말에 맷은 어깨를 으쓱이며 손가락을 쥔 손에 힘을 주었음.
“피터, 넌 툭하면 사라지잖아.”
“그건 맷도 비슷하잖아요. 어휴, 제가 더 친절하니까 잡아드릴게요.”
피터의 손끝을 쥐고 있던 맷의 손을 피터가 제대로 잡았음. 팀업할 때는 서로 위험할 때 손도 잡고, 되는 곳은 다 잡아서 당겨주고, 구해주곤 했으니까. 그냥 길 걷는데 손 정도야 잡을 수 있지. 스파이더맨의 ‘친구’ 개념은 스킨십마저 가볍게 만들었음.
온종일 시민들을 구한다고 손도 잡아주고, 포옹도 하고, 웹스윙으로 옮겨드린다고 안고 다닌 적도 있는걸. 감각이 뛰어나서 보이는 사람보다 더 잘 감지하는 맹인 변호사님의 손도 좀 잡을 수 있는 거지.
맷이 장갑을 끼고 있어서 피터의 손에 닿는 것은 뻣뻣하지만 부드러운 가죽의 감촉이었음. 맨살이 닿는 게 아니니까 부담도 없었지. 스파이더맨일 때는 손에도 장갑을 끼니까. 시민을 돕는 느낌이네, 하는 거야. 대신 그 시민이 오래 알아 온 길거리 자경단 친구, 데어데블인데다가 스파이더맨은 슈트 대신에 피터 파커 차림을 하고 있는 거지.
오늘의 커피는 피터가 샀음. 네가 어쩐 일이냐는 맷에게 피터는 어깨를 으쓱이며
“미안함을 아는 거미니까요?”
하고 농담을 했어. 맷의 코끝이 빨간 게 꼭 루돌프 같다고 생각했는데 말하면 얼굴을 찌푸릴 거 같아서 말하지 않았음. 데어데블이야 인상을 써도 괜찮지만 맷 머독이 그러면 잘생긴 얼굴 낭비 같잖아.
밤이니까 피터는 디카페인을 주문했고, 맷은 그대로 블랙커피를 마셨음. 패트롤을 돌기 전에 몸을 따뜻하게 하기에는 충분했지. 어두운 밤에 따뜻한 커피 한 잔은 모든 자경단원들이 좋아하는 코스일 거야.
“요즘은 킹핀이 조용하네요. 저번에 간 게 효과가 있긴 했나 봐요.”
“내가 통할 거라고 했잖아.”
“그러게 말이에요. 겁도 주고, 겸사겸사 불법 영업장으로 엮어버리다니…. 역시 법적이셔.”
자리에 앉자마자 나오는 것은 당연히 마스크 이야기였음. 맷이 데어데블이고, 피터가 스파이더맨이니까 지극히 당연한 소재거리였던 거지. 추운 날씨에 따뜻한 커피 한잔하면서 하기에는 딱 어울리는 이야기였음. 뭐 하러 이 추운 날에 스판덱스 슈트만 입고 뉴욕을 돌고 있겠어? 다 안전한 뉴욕과 범죄자들을 혼내주기 위해서라니까.
신나게 떠드는 피터를 맷이 웃으며 보고 있었음. 눈이 마주칠 수가 없는데 선글라스에 흐릿하게 비치는 맷의 눈과 마주친다고 느껴지는 거야. 맷이 보고 있는 게 아닌 걸 알면서도 말이야.
정말 이상하네. 피터가 짧게 생각했어.
05.
맷이 연락이 없네.
피터는 휴대폰을 쥐고 고개를 갸우뚱하며 생각에 빠져 있었음. 근래에 매일 같이 채팅을 보내오던 맷이 오늘은 아무것도 보내오지 않았거든. 먼저 뭐하냐고 물어볼지 생각하던 피터는 전화할 시간도 없이 바쁘다며 맷에게 투덜거렸다는 사실을 떠올렸음.
‘아, 바쁘다니까 이젠 안 하기로 했나?’
생각해보니 어제도 프로젝트 때문에 정신이 없다고 맷이 보낸 채팅을 대충 봤었고, 대답했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 거야. 그래, 이 정도로 대답을 안 하면 보내고 싶지 않겠지. 피터는 마지막으로 맷이 보낸 파커 챗을 확인했음. 어제 점심시간쯤이었어.
[찬장에 수프 같은 것도 사뒀어]
[시리얼보다는 나을 거 같아서]
맷의 메시지를 확인한 피터는 또 미안해지는 거야. 맷의 집에 멋대로 찾아가서 냉장고랑 찬장을 뒤적이는 것은 뻔뻔하게 굴 수 있었는데, 맷이 신경 써주기 시작하면 그건 또 미안하잖아. 그냥 맷이 먹는 걸 좀 나눠먹는 개념으로 생각하던 피터. 맷도 그렇게 신경 안 쓰는 눈치여서 괜찮은 줄 알았지. 지금이라도 답장해야할까 피터가 고민하고 있는데, 옆에서 동료가 말을 걸어왔음.
“피터, 맷 말이야…. 원래 메시지는 잘 안 보는 편이야?”
‘언제 번호도 교환하셨대. 문자를 안 보다니요. 매일 저한테 메시지 보내던 사람이 그러면 맷 머독이 아니라 어느 다른 머독 씨라도 되시겠어요? 데어데블이 아니라 친절한 머독 변호사님이신가.’
잘 보는 편인 것 같다고 대답하려던 피터는 맷이 자신에게 보낸 메시지가 일반 메시지랑 다르다는 걸 다시 깨달아서 잠깐 입을 닫았음. 맷을 위해서 만들어준 거였지. 피터가 만든 채팅 앱에서 피터는 자판을 두드려서 메시지를 보냈지만, 맷은 ‘파커’라고 한 뒤에 하고 싶은 말을 그냥 말하면 되는 것이었거든. 보통의 문자는 맷이 확인해도 답장을 보내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드는 피터. 자동으로 읽어주는 기능을 쓰니까 받았을 텐데, 분명 답장을 못 하고 있겠다 싶은 거야.
‘파커 챗’을 알려드려야 하나 고민하던 피터는 결국
“메시지는 잘 못 보는 편이라 전화로 하는 게 나을 거예요. 근데 변호사라… 바쁘잖아요.”
라고 대답함. 피터의 양심이 조금 찔렸지만 스파이더맨인 것을 비밀로 하는 게 좀 더 아팠으니까 괜찮았음. 딱히 나쁜 마음은 아니었고, 맷이 ‘파커’라고 부르면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하는 장면을 상상했더니 좀 이상해서 그렇다고 피터는 스스로 변명했음. 그러니까 맷이 쓰는 음성인식 명령어를 바꾼 뒤에 파커 챗이 아니라 머독 챗 같은 걸로 변경하면 알려주는 게 나으니까.
변호사라는 단어는 어디에나 만능처럼 작용했음. 동료는 금방 납득을 했고, 제자리로 돌아갔어. 피터는 파커 챗에 떠 있는 맷의 마지막 채팅을 보며 답장해야하나 고민했지. 어차피 오늘은 맷의 집에 갈 생각이었으니까 굳이 상관없나 싶어졌음. 집주인이 모를 때 슬쩍 들어가서 수프라도 먹으며 기다리다가 ‘신경 써줘서 고맙지만, 굳이 안 그래도 돼요.’라고 말하는 거야. 피터는 휴대폰을 주머니에 넣어두고 하던 일을 마저 했음. 일단은 맷보다 먼저 퇴근해야 가능한 계획이었거든.
결국 피터는 퇴근을 해냈어. 그리고 마치자마자 옥상에서 옷을 갈아입고, 웹스윙해서 맷의 집으로 가는 거지. 피터의 출입구인 창문은 늘 열려 있었음. 난방기도 안 틀린 걸 보면 맷이 아직 안 왔구나 싶었음. 피터는 맷이 파커 챗으로 말해준 찬장에서 인스턴트 수프를 꺼내어 전자레인지에 돌렸고, 그 옆에 과자 한 봉지도 손에 쥐었음. 맷이 신경 써주는 게 조금 미안한 거지, 전혀 안 먹을 생각은 없었던 거야.
피터는 자연스럽게 소파에 앉아서 데워진 수프를 먹으며 맷을 기다렸음. 오늘은 머독 변호사님이 바쁜 모양이네. 맷의 늦어지는 퇴근을 피터는 그저 가볍게 생각하고 있었음.
… ★ …
맷 머독은 지독한 감기에 걸렸음. 며칠 전, 피터에게 미안함을 느끼게 하려고(미안해서 쩔쩔매는 게 귀엽잖아) 피터가 일하는 오스코프 근처에서 서 있었던 게 화근이었어.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데어데블 슈트를 입고, 스파이더맨이랑 헬스 키친을 돌았던 것도 문제일지도 모르지. 요즘 날씨가 지독하게 춥잖아. 피터의 옷차림을 보면 피터가 먼저 걸려야 하는데 왜 내가 먼저 앓아눕는 거지, 싶은 맷.
사무실에는 못 나간다는 연락을 하고, 맷은 한참을 침대에 누워 있었음. 열이 높은 모양인지 도저히 몸이 움직여지질 않는 거야. 머릿속이 웅웅거리는 느낌이었음. 어릴 적 이후로 이렇게 아픈 적이 없었는데.
난방기 온도를 올려야 하는데 그것도 귀찮아서 맷은 이불에 파묻혀서 잤으면 좋겠다. 열이 너무 높으니까 차라리 추운 게 더 나은 것 같기도 했음. 지독한 감기로 인한 열과 두통 앞에서 초감각도 거의 기능하지 못하는 게 보고 싶다. 그래서 피터가 온 줄도 모르고 맷은 침대에 누워 있었던 거야. 입맛이고 뭐고 정말 아팠음.
맷은 자기 방에서 앓아누워 있고, 피터는 거실에서 맷이 늦네, 하며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서로가 집에 있는 줄도 모르고 있던 두 사람. 먼저 알아챈 쪽은 피터였음. 맷을 마냥 기다리고 있다가 그냥 심심해서 맷의 침실 문을 열어봤던 것임. 맷이 늦어도 너무 늦었거든. 남는 이불이 있으면 그거라도 빌려서 소파에 누워 있을 생각이었는데…, 침대가 헝클어져 있고 누가 누워 있는 것 같은 거지.
“맷? 집에 있었어요??”
피터가 놀랐음. 맷은 대답이 없었어. 집에 있었으면서 왜 안 알려줬냐고 투덜거리며 침대로 다가온 피터는 이불에 싸인 맷의 얼굴을 보고 더 놀라버리는 거지.
“맷…? 아파요…?”
식은땀을 흘리는 게 딱 아픈 사람이잖아!
피터가 놀라며 맷의 이마를 짚어봤으면 좋겠다. 열이 높았음. 피터도 체온이 높은 편이었는데 뜨겁다고 느껴지면 문제가 있는 거잖아. 놀란 피터가 빠르게 수건을 적셔와서 맷의 이마에 얹어주면 좋겠다. 식은땀을 흘려서 옷을 갈아입혀 줘야 하나 고민했는데 이불을 들춰보니 드로즈만 입고 자는 것 같아서 그대로 이불을 잘 덮어드리는 피터. 피터도 혼자 잘 때는 그러고 자니까.
그냥 아픈 사람의 맨몸을 본 기분이 돼서 조금 이상했을 뿐이야.
집에 있으면 있다고 말이라도 해주지. 피터는 난방기도 틀고, 구급상자에서 감기약도 찾아왔음. 맷이 약을 먹은 것 같지 않았거든.
‘수프도 데워 와야 하나? 먹을 만하던데…. 차라리 맷을 안아 들고 병원으로 가야하나? 맷은 감기 같은 거 안 걸릴 줄 알았는데!’
피터가 맷을 깨워서 약이라도 먹여야 하나 고민하고 있으면 좋겠다. 그리고 옆에서 부스럭거리며 어쩌지하는 피터의 목소리에 열기로 깊이 잠들었던 맷도 비몽사몽으로 깨는 게 보고 싶음.
“…피터?”
머릿속이 울려서 피터의 목소리만 겨우 알아보는 맷. 피터 목소리인 거 같은데 어딨는지 모르겠는 거야. 어지러웠음.
“맷! 정신이 들어요? 괜찮아요? 많이 아파요? 병원 갈까요? 웹스윙은 무리니까…. 택시를 불러서 가야겠죠?”
꿈인지 뭔지 모르겠는데 피터가 너무 시끄러운 거야. 귓가에 울리는 상상 속의 피터 목소리가 싫은 건 아닌데(아프니까 피터가 보고 싶었나 보지), 말이 많은 건 사실이잖아. 맷이 몸을 일으키니까 이마에 얹어져 있던 축축한 수건이 바닥으로 떨어졌음. 어지러워서 이마에 손을 대고 앓는 소리를 내는 맷. 뜨거운 이마 위에 조금 미지근하고 부드러운 피터의 손이 얹어졌음.
피터가 놀라서 괜찮냐며 맷에게 가까이 가서 이마에 손을 댄 거야. 열을 확인할 생각이었음.
어?
피터의 손을 맷이 꽉 붙잡았음. 확실히 체온이 여전히 뜨거운 거 같다고 생각하면서 떨어진 수건을 다시 적셔와야 하나 고민하던 피터는 자기 몸이 앞으로 기울고 있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어. 손을 확 잡아당긴 맷 때문에 피터의 상체가 앞으로 당겨졌거든. 피터 파커의 머릿속 비상등이 켜졌어.
비상입니다. 지금 무슨 상황인 거죠?
입술에 닿는 뜨겁고 부드러운 감촉이 무엇인지 깨닫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음. 그리고 깨닫기도 전에 벌어져 있던 입술 사이로 뭐가 들어오는 거야. 뜨겁고 말랑한 혀였음. 피터는 그제야 맷의 눈이 가까이 있다는 걸 알았음. 긴 속눈썹을 가진 맷의 눈이 피터의 눈앞에 있었음. 마주 보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피터가 눈을 질끈 감았어.
피터의 한 손을 꽉 붙잡은 맷은 손도 입술도 다 뜨거워서 피터의 머리가 핑 도는 거야. 맷에게 닿은 곳이 달아오르는 느낌이었음.
맷 머독은 성격은 별로였지만, 키스는 끝내주게 잘했어.
한참 키스를 하고서 맷이 피터에게서 떨어졌음. 여전히 한 손은 맷에게 잡힌 채였음. 피터는 숨을 색색거리며 놀란 눈으로 맷을 보고 있었음. 피터의 머릿속이 정지되어서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몰랐음. 피터가 인식한 상황은 방금 맷이랑 키스했다는 거, 맷의 입술이 너무 뜨거워서 지금 입술에 화상을 입은 기분이 든다는 것뿐이었음.
“…이제 조용하네.”
맷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말했음. 그 지독하게 잘생긴 미소. 그리고 맷은 다시 쓰러졌으면 좋겠다. 침대에 정신을 잃은 맷 앞에서 피터는 화끈거리는 입술을 손등으로 덮고 크게 숨을 쉬었어.
정말 이상해…. 피터가 울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생각했음.
지금 아파서 정신없는 맷한테 키스 당한 거 같은데 누구랑 착각한 건지도 모르겠다는 거야. 첫 키스는 당연히 아니지만 기분이 이상하잖아. 침대 옆에 주저앉아서 소리 없는 비명을 지르던 피터는 여전히 아파서 앓는 맷을 힐끗 보고 훌쩍이며 떨어진 수건을 적셔왔음.
‘어쩌다 데어데블을 간호하고 키스까지 당하게 된 거죠? 친절한 이웃은 입술도 내어줘야 하나요? 아무리 친절해도 제가 입술을 막… 주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역시 맷을 소개해 주는 게 아니었는데….’
파렴치한 맷(감기 걸리면 아무에게나 키스한다니)의 옆을 떠나지 못하는 피터. 입술의 화끈거림은 꽤 오랫동안 남아 있었어.
06.
“파커. 요즘 바쁜가 보네?”
사무실에 앉아 있던 맷이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 말했음. 그리고 다시 놓아두고 손으로 서류를 보다가
“파커. 보면 전화줘.”
하고 다시 명령어를 말하는 거야. 여전히 피터는 답이 없었어. 결국 맷이 다시 입을 열었음.
“파커. 피터, 같이 킹핀 혼내주러 갈까?”
킹핀 겁주기, 피터도 좋아하잖아. 맷의 비장의 카드이기도 했음. 하지만 여전히 피터에게서는 답이 없는 거지. 피터도 바쁘고, 연말이니까 그럴 수 있지. 그리고 연말에는 변호사 사무실은 조금 한가한 편이고. 남아도는 시간을 주체하지 못하는 맷 머독이 예민하게 구는 것일 수도 있잖아. 맷은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지만 아니라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었어. 피터의 마지막 답장이 이랬거든.
[신경 써줘서 고맙지만 굳이 안 그래도 돼요]
그리고 그 뒤로 피터는 답이 없었어. 아, 뭔가 잘못되었다 싶은 맷. 또 예민하게 구는 맷에게 포기가 한마디(너 진짜 연애사 안 풀린다고 그걸 티 내고 다니는 거 없어 보이니까 그만하라니까) 했지만 달라지는 것은 없었음. 피터 파커가 맷 머독을 의도적으로 피하고 있는데, 맷은 피터를 좋아해. 예민할 수밖에 없었지.
피터가 맷의 집에 오지 않은 지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었거든. 평소라면 집에서 간식이든 뭐든 꺼내 먹었을 피터는 흔적도 없었어. 왔다 갔던 체취조차 없었던 거임. 피터는 아무리 바빠도 맷의 집에 불법 침입해서 간식 먹고 가는 걸 좋아하는 애잖아. 무언가 단단히 잘못된 거야. 맷은 그 사실을 알아차렸지만 무엇이 문제였는지는 몰랐어.
피터를 마지막으로 본 곳은 맷의 집이었음. 열 때문에 누워 있다가 일어났더니 머리에는 젖은 수건이 올려져 있었고, 거실로 나가보니 소파에서 피터가 꾸벅꾸벅 졸고 있었던 거야. 회사는 어쨌냐는 맷의 말에 피터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아픈 사람을 두고 어떻게 가겠어요.”라고 대답했고, 멀쩡한 거 같으니까 약 잘 챙겨 먹으라며 가보겠다 했음.
그리고 맷이 고맙다고 파커 챗을 보냈음. 집에 간식 사둘 테니까 먹고 가라는 말도 같이.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피터가 보낸 답이 그거였어. 굳이 신경 쓰지 말란 말. 기계음으로 딱딱하게 뱉어진 문장은 선을 긋는 피터의 목소리로 들렸음. 맷은 누워 있던 동안의 기억이 희미했어. 피터가 기분 상할 일이 있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알 수 없었지.
피터에게 한참 채팅을 보내다가 오히려 보낼수록 악화되는 게 아닐까 뒤늦게 깨닫는 맷. 맷은 연애하는데 이렇게 힘든 적이 없었음. 보통은 상대도 호감을 가져주었고, 상대가 싫다고 한다면 맷도 미련을 두지 않았으니까. 혹시나 피터가 맷의 마음을 알아차려서 먼저 거리를 두려는 것일 수도 있잖아. 맷은 피터와 분위기 내려던 게 오히려 관계를 망친 게 아닐까 생각했음.
그런데 피터도 잘못이 있지. 맷이 전화를 자주 한다고 마음대로 1대1 채팅앱을 만들어줬잖아. 물론, 다른 사람도 쓸 수 있다고는 했지만.
맷이 한숨을 쉬며 피터를 찾아가야하 나, 뭘 잘못했지, 생각하는데 전화가 오는 거야. 피터일까? 했지만 번호를 교환했던 피터의 직장동료였음. 상대가 호감이 있다는 것은 맷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상대의 심박과 호흡만으로도 그 정도는 쉽게 알았지. 무시할까 고민하던 맷은 ‘피터의 직장동료’이니까 ‘피터와 같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라는 굉장히 이성적인 판단으로 전화를 받았음.
“아, 드디어 받으셨네요!”
“하하, 제가 연락을 드린다는 게 바빠서 깜빡했네요.”
자연스럽게 거짓말을 하는 맷. 통화로 들리는 소리에서는 피터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음. 자연스러운 안부 인사와 연말인사를 나누고, 끊을까 생각하는데 상대가 그러는 거야.
“오스코프에서 연말 파티를 하는데, 혹시 오실 수 있을까 해서요. 아, 파트너는 아니에요! 그냥 회사 파티인데… 초대는 자유라.”
회사 파티에 같이 가자는 초대였어. 거절을 해야하나 맷이 고민하는데 생각해 보니까 오스코프 연말 파티면 피터도 오는 거잖아? 맷이 고민하는 체를 하니까 상대가 먼저 피터도 온다고 말하는 거야. 피터랑 친한 변호사라니까 친한 피터가 오면 맷도 편하게 올 수 있을 거란 판단이겠지. 결국 맷이 수락하면 좋겠다. 웹스윙하고 다니는 스파이더맨을 쫓아 퀸즈까지 가는 것보다는 파티에 묶여 있는 피터 파커에게 다가가는 편이 더 나을 것 같아서였음. 스파이더맨은 데어데블에게 쉽게 도망쳐버리겠지만, 피터 파커는 맷 머독에게서 적어도 그 파티장 안에서 도망치지는 못할 테니까.
전화를 끊고, 파티 날짜와 장소를 떠올리는 맷. 크리스마스랑 멀지 않는 날이었어. 아마 파티를 하고 그 뒤에는 신년까지 휴가겠지. 이런저런 계산을 하며 맷은 여전히 대답 없는 파커를 생각했음.
“파커, 나중에 봐.”
피터에게 메시지가 전송되었음. 맷은 인정하기로 했어.
그래, 나 성격 별로네.
피터가 의도적으로 피한다고 피터의 직장동료를 이용해서 회사 파티까지 쫓아가려는 게 좋은 성격은 아니잖아. 하지만 피터도 설명 없이 피하는 게 ‘친구’답지는 않으니까. 맷이 미소를 지었음.
… ★ …
피터는 도저히 맷에게 답장을 보낼 수 없었음. 맷 머독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어. 얼굴을 보면 맷이랑 입술을 부딪쳤던 게 생생하게 떠오를 것 같아. 맷이 아파 누웠던 날 이후로 피터는 차마 맷의 집에도, 헬스 키친 근처로도 가지 못했으면 좋겠다. 맷은 기억을 못 하는 모양이니까 자연스럽게 대하거나 차라리 ‘누구랑 착각한 거예요?’ 하며 장난스럽게 웃으며 물어보면 되는 일이라는 걸 알면서도 말이야.
계속 도착하는 채팅을 애써 무시하며 피터는 책상에 얼굴을 박고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음. 차라리 맷에게 ‘내 입술 도둑!’이라고 소리치고 싶었는데, 그러면 맷은 오히려 뻔뻔하게 굴 것 같은 거야.
‘아파서 착각했네. 내가 뭐가 좋다고 피터 너랑 키스하겠어?’
라고 맷이 뻔뻔스럽게 대꾸하는 걸 상상했더니 더 열 받았음. 실제로 한 말은 아니었는데(맷은 자기가 키스했다는 사실도 모르는 눈치야), 피터 파커가 만들어낸 맷 머독의 이미지는 그랬음. 잘생겼는데 뻔뻔하고 성격 나쁜 사람, 밤에는 범죄자들을 패는 헬스 키친 악마.
그리고 아프면 아무나 착각하고 키스하는 나쁜 악마.
피터는 입술을 손등으로 닦아내며 한숨을 쉬었어. 첫 키스가 아니어서 다행이다. 그랬으면 더 억울했을 거야. 감기 걸린 사람에게 착각 당해서 키스한 게 첫 키스라면 끔찍하잖아. 아프면서 키스는 또 왜 그렇게 잘하는 거야. 짜증 나. 그때 맷을 한 대 때려야 했는데.
떠올리니까 다시 입술이 홧홧해졌어. 사람 체온이 좀 뜨거운 정도로 화상이 입지는 않는데, 피터는 마음에 화상을 입은 것 같았음.
휴대전화를 치우고 한참 연구에 몰두하다가 피터가 휴대폰을 확인했음. 파커 챗에 메시지가 여러 개 와 있었는데,
[나중에 봐]
마지막 메시지가 이거였어. 피터는 고개를 갸우뚱했음. 오늘도, 내일도, 그리고 올해까지는 피터는 맷을 피해 다닐 작정이었거든. 맷이랑 약속을 한 것도 없는데 나중에 언제 보자는 거지?
피터가 고민하다가 그냥 무시했으면 좋겠다. 어차피 피터는 맷을 피해 다닐 거거든. 당분간은 다른 ‘친구’랑 팀업하고 놀아야지. 피터의 생각은 그랬음. 그리고 일도 바빴으니까.
늦게까지 남아 있다가 퇴근하는 피터는 혹시나 맷이 있을까 봐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걸었음. 다행히 맷은 보이지 않았지. 확실히 이젠 정말 춥다 싶은 피터. 코를 훌쩍이며 걷는데 가게에 눈이 가는 거야. 겨울 외투나 모자 같은 것들을 쓰고 있는 마네킹이 피터의 눈에 들어왔음. 그리고 목도리. 맷을 안 봐야지 생각해 놓고 왜 목도리를 보니까 맷이 생각나는 것인지 피터는 알 수 없었음. 그냥 코가 빨갛게 되어 기다리던 맷이 떠올랐어. 그리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피터의 손에 잘 포장된 목도리가 든 쇼핑백이 쥐어져 있던 거임.
‘감기 걸려서 아무한테나 키스하지 말라는 의미로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해야 하나…. 아냐, 올해까지는 맷 얼굴 볼 생각도 없어. 근데 내가 태워 먹은 목도리가 없어서 감기 걸렸나? 아, 미안해하지 마! 그만 생각해, 파커!’
피터는 쇼핑 봉투를 집에 던져두고 패트롤을 돌았음.
스파이더맨 활동과 몰아치는 프로젝트로 피터는 정말 바빴어. 오스코프에 출근해서는 여러 연구와 프로젝트에 참여해야 했고, 일이 끝나면 스파이더맨이 되어서 뉴욕의 시민들을 도와야 했거든. 맷을 보지 않는 거랑 시민을 돕는 것은 별도였음. 데어데블은 유독 헬스 키친에 집착하는 자경단원이었고, 스파이더맨은 퀸즈 중심이긴 했지만 바운더리가 넓은 자경단원이었음.
데어데블을 보고 싶지 않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헬스 키친을 피해서 다니면 된답니다!
피터는 의도적으로 맷이 보낸 파커 챗을 무시했고, 헬스 키친으로 가지 않았어. 그렇게 지낸 지 약 2주 정도가 지났지. 처음에는 얼굴 보는 게 불편해서 그랬던 것인데, 바쁘니까 맷에 대한 생각도 금방 사그라들어서 잊고 있었던 거 같기도 했어. 피터 파커의 삶이 워낙 복잡하잖아. 지치고 바쁜 일상에서 ‘맷의 실수’는 금방 잊을 수 있었음.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가면 책상에 던져둔 선물이 보여서 싱숭생숭한 기분이 되긴 했지만 금방 잠에 들어서 괜찮았음. 그냥 내가 써버려? 하며 몇 번이고 잘 포장된 목도리를 손에 쥐었다 놓기를 반복했지만 말이야. 크리스마스가 지나면 변명거리도 사라질 테니까. 박아두고 잊고 있다가 ‘아, 이런 게 있었네?’하며 치워버릴 거야. 그리고 상쾌한 기분으로 맷의 집에 가서 찬장에 간식이나 꺼내먹으며 인사하자.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07.
피터가 없네. 맷은 파티장을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음. 오스코프에서의 파티는 생각보다 규모가 있었음. 그냥 피터 같은 과학쟁이들만 모이는 걸까 했는데 오스코프의 유명세 덕분인지 유명인도 있는 듯했음. 물론 맷은 그닥 관심이 없었지만 말이야. 지금 맷에게 중요한 문제는 이 파티에 피터가 아직 오지 않았다는 거야.
동반을 권유해준 이가 보이지 않는 맷을 위해 팔을 내밀었지만 맷은 모르는 체하며 시각장애인용 지팡이를 쥐고 천천히 걸었음. 회장에 있는 여러 사람의 목소리과 심박이 들렸지만 그중에 피터는 없었음. 피터의 심장 소리는 크고 강하니까 금방 알아볼 수 있었거든. 맷은 사람이 많아서 어지럽다는 핑계를 대며 와인이 담긴 잔 하나를 들고 벽 쪽으로 붙어 있었어. 회사에서 여는 파티도 불참이라니. 정말 피터답다는 생각이 드는 거야. 아마 또 어디서 거미줄을 쏘고 다닐 것 같았음. 그게 피터 파커가 좋아하는 일이니까.
오스코프 회장이 연단에 올라 축하의 인사를 하는 동안에도 피터는 오지 않았음. 맷은 생각보다 규모가 있는 거 같다고 웃으며 맷의 얼굴을 기억하는 피터의 동료들과 인사를 나눴지. 맷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피터랑 같이 오셨어요? 피터가 안 보이네요….”
하고 물어오면 맷이 고개를 저으며 아니라고 답하는 대화였음.
“하하하, 저도 피터를 찾고 있어요.”
맷은 그렇게 답하며 와인을 마셨음. 확실히 대기업이 여는 파티답게 와인도 고급스러웠음. 피터도 없는 이 시끄러운 파티에서 온 보람이 없잖아. 턱시도에 나비넥타이까지 하고서 피터를 찾으러 왔다니 생각해 보니 우스운 거야. 나 싫다는 애가 뭐가 좋다고. 깔끔하고 묵직한 와인이 입에 쓰다 느껴졌음.
이젠 친구조차 싫다며 피터에게 밀어내진 기분이었어. ‘그’ 친구 좋아하는 스파이더맨에게 말이야. 피터가 좋아한다고 사둔 간식거리들이 여전히 찬장에 남아 있는데 그걸 어떻게 처리하지. 맷은 비어 있는 잔은 대충 아무 테이블에 올려두고 회장을 나갈 타이밍을 보고 있었음. 지팡이를 손에 쥔 맹인은 유명인이 많은 파티장에서도 시선을 끌기 좋았거든. 굳이 이런 곳에서 신기함이 담긴 시선을 받고 싶지 않았어.
자리를 피하려던 맷의 귓가에 익숙한 소리가 들리는 거야. 크고 강한 심장의 울림과 숨이 차지도 않으면서 과장되게 호흡을 고르는 숨소리.
“아…, 다행이다. 그래도 많이 안 늦었어.”
피터였음. 맷은 피터가 들어오기 전부터 피터가 왔다는 사실을 알았어. 수많은 사람 사이에서도 피터의 심장은 선명하고 강하게 울렸거든. 수백수천 명이 있어도 맷은 그 사이에서 피터를 찾아낼 수 있을 거야. 맷은 돌아가려던 생각을 빠르게 지웠어. 방금까지 분명 짜증이 났고, 화가 났는데 피터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잠잠해졌음.
나 진짜 피터 좋아하네.
웹스윙으로 급하게 온 모양인지 제대로 채우지 않은 셔츠와 주머니 속의 넥타이, 차갑게 식어 있는 피터의 몸을 맷은 근처에 가지 않고도 감지할 수 있었음. 피터는 여전히 맷이 이곳에 있는 걸 모르는 눈치야. 알았으면 심박부터 달라졌겠지. 일부러 데어데블을 피하고 있는 것 같으니까. 많은 사람 사이에서 팀원들을 찾아 회장 안쪽으로 들어가려는 피터에게 맷은 조심스럽게 다가갔음. 생각보다 규모가 큰 파티에 피터는 입을 벌린 채로 길을 잃었음.
“Pe—”
“Pete!! 안 보여서 찾았잖아!”
맷이 피터를 부르려는데 먼저 피터의 애칭을 부르며 다가온 사람이 있었음. 맷은 발걸음을 멈췄야 했지. 피터는 맷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어. 그래서 맷을 보는 대신 손을 흔들며 반겨주는 사람을 보고 안심하는 표정으로 다가간 거지. 피터가 일하는 곳이 오스코프잖아. 노먼 오스본의 회사, 그리고 해리 오스본은 그 아들이지. 해리는 피터의 대학 시절부터 함께한 친구였음. 팀원도 못 찾고 처음 보는 사람들 속에서 길을 잃었던 피터는 익숙한 목소리에 겨우 웃을 수 있었어.
“해리—! 아는 사람을 찾아서 다행이다…! 파티장을 잘못 찾아왔나 했잖아.”
피터가 우는 소리를 내며 장난스럽게 말했음.
“피터, 넌 매일 길을 잃잖아. 오늘도 그런 거야?”
“어…, 비슷해. 파커의 운수가 늘 그렇지. 해리, 넌 어쩐 일이야?”
“오스본이잖아. 오스코프의 연말 파티고. 설마 우리 아버지가 회사 직원들만 불렀을 거라고 생각해?”
해리의 농담 같은 진담에 피터가 소리 내어 웃었음. 어쩐지 모르는 사람이 많더라니. 직원들을 격려하는 게 아니라 오스코프의 과시용 파티였다는 사실을 깨닫는 피터. 해리랑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다가 다시 팀원들을 찾아야겠다며 사람들 속으로 들어갔음. 겨우 다른 아는 얼굴을 찾아서 반갑게 가려다가 피터가 멈칫하면 좋겠다. 그 사이에 맷이 서 있어서. 선글라스를 쓰고, 맹인용 지팡이를 쥐고 있는 맷 머독을 알아보는 것은 쉬웠음. 멋진 턱시도에 나비넥타이까지 잘 어울렸지.
아니 왜 맷이 여기 있어요?
피터가 잠깐 놀랐다가 노먼의 초대 명단에 맷 머독이 포함되어 있었을 수 있다고(일단 변호사니까) 생각을 했음. 근데 옆에는 맷이랑 변호를 교환했던 동료가 서 있는 거지. 파티에 누구나 데려와도 된다던 말이 떠오르는 거야.
아, 맷이 연애 사업 중이구나.
피터는 발걸음을 멈추고 다른 구석을 찾기로 했지. 맷 머독이랑 마주치지 않을만한 곳을 찾아서 피터는 발걸음을 옮겼어.
… ★ …
맷은 피터의 동료들과 변호사 생활이나 피터가 하던 프로젝트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음. 이런저런 실험의 성과들이나 그동안 얼마나 고달픈 시간을 보냈는지에 대한 한탄들이었지. 피터에게는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였어. 그런 와중에도 스파이더맨 활동을 빼먹지 않고, 맷의 집에 찾아와서 간식을 훔쳐먹던 피터가 대단하다 싶었지. 이야기를 나누면서도 맷의 감각은 피터를 향해 있었음. 해리 오스본과 나누는 ‘피터 파커’의 대화들. 그리고 해리와 떨어져서 다시 동료들을 찾아 다가오는 걸을 맷은 쉽게 알아차릴 수 있었음. 피터가 다가오면 이제 알았다는 듯이 자연스럽게 인사를 건네자. 서운했다거나, 짜증 났다거나 그런 티는 내지 말자고 맷은 다짐했음.
그런데 가까워지던 피터가 갑자기 다른 곳을 향하는 거야. 크고 강한 심장 소리가 쿵 하며 크게 휘청이더니 피터가 자리를 피하고 있었음. 맷 머독을 발견한 게 틀림없어. 맷은 피터가 자신을 피하고 있다는 확신을 얻을 수 있었음. 피터가 멀어지긴 했지만 여전히 회장 안에 있다는 것을 맷은 알 수 있었음.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빈속에 와인만 마시니 속이 안 좋네요.”
맷이 음식을 가져오겠다는 핑계로 자리를 옮겼어. 사람도 많은 큰 파티장에서 맹인이 자연스럽게 움직이며 장애물을 피해 다녔지만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음. 와인에 샴페인을 마신 사람들은 그냥 즐거운 대화에 빠져 있었으니까. 그리고 피터도 마찬가지네. 다른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 피터의 목소리 톤이 아까보다 조금 높아져 있었어. 피터의 손에 들린 유리잔이 문제였던 모양이야. 술은 안 마신다면서.
맷이 미간을 살짝 찌푸렸음. 응, 좀 화났어.
피터의 손에 들려 있는 샴페인은 이미 꽤 비어 있었어. 데어데블이랑 마실 때만 주스를 고집했던 건가, 하고 생각하면서 맷은 피터에게 다가갔지.
“피터.”
“어—? 맷? 아, 이런 곳에서 다 만나네요…!”
누가 들어도 어색한 톤으로 말하는 피터. 맷은 한숨을 쉬고 피터의 열려 있는 셔츠의 단추를 잠가주었어. 옷차림도 제대로 안 살피는 것도 참 피터다운 것 같았음. 피터의 바지 주머니에 들어가 있던 넥타이도 매주는 거야. 평소라면 피터가 ‘저 애 아니거든요?’ 하며 투정을 부릴 법도 했는데 오늘따라 피터는 조용했어. 피터의 심장이 조금 빨리 뛰긴 했지만 술이 약하다고 했으니까.
숨에서 느껴지는 달콤한 향기가, 한 잔만 마신 게 아닌 거 같았음.
“우리 할 말이 많을 거 같은데, 피터?”
“아…. 그 명령어 변경은 금방 할 수 있는데, 휴대폰 줄래요?”
“뭐?”
“Parker 말고 Murdock이나…. 아니면 그분 이름으로 바꿔드릴게요. 진짜 얼마 안 걸려요.”
피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맷은 인상을 썼음.
“피터, 너 취했어?”
“안 취했어요. 저 멀쩡하거든요.”
취객의 단골 멘트잖아. 맷은 피터의 심장이 과하게 뛰고 있는 게, 피가 빠르게 돌고 있는 게 모두 샴페인 때문이라고 결론 내렸어. 피터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거든. 맷이 묻고 싶었던 것은 ‘왜 나를 피하냐’는 거였어. 울컥 쏟아지는 감정에 피터에게 화를 내려던 맷은 이 파티가 오스코프의 파티임을 자각하며 입을 닫았음. 멀리서 피터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 같다고 생각한 ‘피터의 절친’께서 다가오는 중이었으니까. 해리 오스본이 오면 더 볼만해지겠지. 회장 아들이랑 말다툼하는 맹인이랑 그 사이에 직원 한 명. 어떤 드라마 같은 기사가 등장하겠어?
긴 숨을 뱉고 분노를 꾹꾹 누른 맷은 피터의 손을 꽉 잡고 파티장을 나섰음. “왜 그래요?” 하며 소리치면서도 피터가 얌전히 따라왔음. 맞닿은 맨손이 뜨겁고 부드러웠어. 진짜 취한 게 확실해. 과하게 뛰는 심장의 울림이 맷의 손바닥을 간지럽혔음.
아니 도대체 왜 그래요…?
피터는 놀란 눈으로 맷을 따라 회사 파티를 빠져나가고 있었어. 일부러 자리를 피해준 건데, 연애사업하기 좋으라고 명령어도 바꿔주겠다는데(파커를 부르며 다른 사람이랑 채팅하는 건 좀 그랬어) 맷이 왜 화난 눈치인지 알 수 없었어. 채팅을 읽고 무시해서? 그동안 팀업 하자는데 대답도 안 해서? 그런데 그건 데어데블이 보통 스파이더맨을 대하던 방식이잖아. 이렇게 친해지기 전에 말이야.
맷에게 잡힌 손이 뜨겁다 느껴졌음. 여전히 맷이 열이 나는 건가 했는데, 피터 본인의 체온이 높은 것 같았음. 손 정도는 늘 잘 잡았는데 이 순간에는 왜 이렇게 부끄럽고 창피한지 모르겠어. 샴페인 탓이지. 평소에 술을 잘 안 마셨잖아. 피터도 샴페인을 탓했어. 안 마시던 걸 마셔서 탈이 난 게 분명해.
오늘 이렇게 추웠나. 파티용 옷차림은 역시 바깥 공기를 견디기엔 얇았음. 피터는 익숙했지만 맷은 아니잖아. 얼마 전에 감기로 앓아누워서 사람을 착각했던 걸 생각하면….
피터는 맷에게 끌려가는 것을 그만두고 다리에 힘을 주었어. 힘은 내가 더 세거든요. 발갛게 달아오른 뺨에 찬 바람을 쐬자 식는 것 같았어.
“맷, 이러다 또 감기 걸려요.”
피터가 더 이상 끌려오지 않자 맷도 피터를 돌아봤음.
“왜 피한 거야?”
“네?”
“피하고 있잖아. 대답도 안 하고.”
“아까는… 분위기가 좋아 보이길래. 피해준 거라구요.”
“무슨 분위기?”
“그, 번호 교환했잖아요! 마음에 들었던 거 아니에요?”
“뭐?”
“파커 챗도…, 그러니까 바꿔준다고요. 어차피 연애하면 바쁠 테고, 팀업은 그래도 가끔 해요. 근데 올해는 싫으니까… 내년에요. 올해는 제가 기분이 영… 아니거든요.”
맷을 보면 입술이 따가워요. 마음도 따갑고요.
피터는 뒷말은 삼켰어. 얼굴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 맷의 얼굴이 그래도 잘생기긴 해서 피터는 웃음이 터졌음.
누가 이 사람을 데어데블이라고 생각하겠어.
“딱 올해만… 거리를 둬요. 내년에는 제가 다시 친절한 이웃으로 맷이 연기할 때 손도 잡아주고, 집에 또 불법 침입하러 갈게요. 지금은 제가 맷을 보는 게 불편해요. 친구끼리 이런 기분으로 보는 건 좀 아닌 거 같거든요.”
일주일만 있어 봐요. 키스한 기억은 다 덮어버릴 테니까. 피터는 습관적으로 손등으로 입술을 문지르며 맷을 쳐다봤음. 마주칠 리가 없는 맷의 눈이 피터를 보고 있는 기분이 들어서… 진짜 이상했어.
“연애 사업에 도움이 필요하면 그건 도와줄 수 있을 거예요.”
피터가 장난스럽게 말했음. 맷은 미간을 찌푸리고 있다가 피터의 말이 이어질수록 헛웃음이 나오는 거야. 도대체 무슨 오해를 하고 있는 건지. 그리고 피터의 동료랑 잘 되려고 한다고 해서 피터가 불편한 기분이 드는 것도 말이 안 되잖아. 맷은 피터의 손을 꽉 잡고 있었음. 피터의 목소리는 힘이 없었는데, 심장은 거세게 움직이고 있었어.
맷은 피터의 나머지 손도 잡아내리고 피터에게 입을 맞췄음. 말로 해봤자 피터랑 이야기가 안 될 것 같았어. 부드러운 입술은 피터의 체온이 높은 탓인지 생각보다 뜨거웠어. 숨결이 달다 했더니 역시 샴페인이 달콤한 탓이야. 피터의 손을 잡고 있던 맷의 두 손은 어느새 피터의 두 뺨을 감싸고 있었어.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잔뜩 굳어 있는 피터가 우스워서 더 바짝 붙었음. 싫으면 피터가 밀어낼 거야. 몇 주간 피터에게 무시당한 맷은 이제 마음대로 하기로 했어.
입술을 핥고 아프지 않게 살짝 물었다 떨어진 맷이 피터의 뺨을 단단히 붙잡은 채로 말하는 거야.
“파커.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별거 아닌 키스였는데, 피터의 체온이 높아서인지 맷은 입술이 뜨겁다 생각이 들었음. 손바닥에 닿는 피터의 뺨도 따뜻했어. 샴페인에 있는 알코올 때문인지, 아니면 아까의 키스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말이야. 피터의 심장이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음.
이제 스파이더맨은 데어데블을 ‘친구’라고 못 부르겠지.
맷은 쓰게 웃으며 자신이 넘어버린 선에 작별을 고했어. 상황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비상등이 켜진 피터의 머릿속은 더욱 혼란스러웠어. 맷이 키스를 잘 한다는 것만 더욱 확실해진 거야.
명령어로 켜진 Parker Chat에 메시지 하나가 보내졌음.
[내가 좋아하는 건 너야]
08.
크리스마스야. 가족과 연인과 어쨌거나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모두가 행복한 날이지. 그리고 스파이더맨은 오늘도 빌런들과 싸웠어. 그래도 전날에는 메이 숙모 댁에서 크리스마스 파티도 했고, 맛있는 것들도 잔뜩 먹어서 피터는 그렇게 슬픈 기분은 들지 않았음. 스판덱스 슈트는 확실히 추웠어.
절로 떨리는 몸을 주체하지 못하고 옥상에 웅크리고 앉은 피터는 휴대폰의 알림음에 슈트 바지에 끼워둔 휴대폰을 꺼냈어.
[피터 뭐해?]
맷이 보낸 메시지야. 피터는 잠깐 고민하다가 액정을 꾹꾹 눌러서 타자를 쳤어.
[패트롤 돌며 둘러보는 중이요]
[맷은 뭐해요?]
[네 생각하고 있었지]
피터가 으, 하며 얼굴을 찌푸렸어. 다행히 마스크를 쓰고 있던 덕분에 스파이더맨이 인상을 쓴 모습은 그렇게 추하게 보이지 않았지. 오스코프 파티 이후로 맷과 피터의 관계는 여전히 애매한 상태였음. 친구라기엔 이상하고, 애인이라기에는 피터가 아직 맷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몰랐어.
잠결에 닿았던 것들이 갑자기 선명하게 떠오르더니 생각 없이 잡았던 손도 부끄러워져서 피터는 맷을 마주할 자신이 없는 거야.
그래도 이제는 맷의 채팅을 무시하지는 않기로 했지. 그리고 올해가 지나면 다시 맷의 집에 가겠다고 약속 아닌 약속을 했어.
그 뒤에 맷이 보내는 채팅이 조금 노골적으로 변했다는 것을 제외하면 스파이더맨의 일상은 비슷했어. 긴 휴가를 얻은 스파이더맨은 열심히 이웃들을 지키는 중이야.
[전 맷 생각 안 해요]
[지금부터 하면 되지]
[왁, 느끼해.. 그렇게 해서 꼬셔져요?]
답장을 보낸 피터는 다시 슈트에 휴대폰을 꽂아두고 웹스윙해서 집으로 돌아갔음. 그래도 크리스마스라 그럴까? 빌런들도 엄청 시끄럽지는 않았거든. 자연스럽게 침대에 누운 피터는 뒤척거리며 맷과 채팅을 했어. 이리저리 돌아누우며 오늘은 사무실에 있다는 맷의 말에
[슬픈 크리스마스네요]
하고 답해주었지. 맷이 이모티콘을 볼 수 있었다면 슬픈 눈을 한 산타 이모티콘을 붙여줬을 거야. 그러다 휴대폰을 잠깐 놓아두고 누워 있던 피터의 눈에 책상이 들어왔음. 정확히는 책상 위에 있는 쇼핑백 말이야. 그래도 꽤 비싼 거였는데. 힐끗 그것을 보다가 다시 뒤돌아 누운 피터는 결국 벌떡 일어나서 쇼핑백에 담긴 잘 포장된 선물을 손에 쥐었어. 어차피 오늘이 지나면 주지도 못할 건데. 그냥 확 뜯어버려?
피터는 결국 포장지를 마구 뜯어버렸음. 확실히 레드는 과한 것 같아. 스파이더맨 슈트에 비하면 조금 어두운 톤의 레드였지만 피터에게 어울릴 색은 아닌 거 같은 거지. 목도리를 하고 다니는 스파이더맨을 상상하던 피터는 다시 맷과의 키스가 떠올라서 열이 올라버렸음. 이게 다 맷이 멋대로 목도리를 빌려줘서 그래.
부드러운 목도리를 다시 쇼핑백에 넣어둔 피터는 한숨을 푹 쉬고 집 밖으로 나갔어. 이번에는 스파이더맨이 아니라 피터 파커 차림이었음. 헬스 키친에 있는 변호사 사무실로 갈 거야.
… ★ …
갑자기 일이 생긴 맷은 크리스마스에 사무실에 와 있었어. 서류에 판례에 이것저것 확인할 게 많았거든. 포기는 집에 가봐야 해서 못 나왔지만, 귀를 기울이면 어느 집안에서 화목한 소리나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려서 그렇게 외롭진 않았음. 그리고 피터가 이젠 답장을 잘 주니까 괜찮았어. 맷은 피터가 약속한 올해까지만 기계음으로 참아볼 생각이었음. 친구든 연인이든 데어데블은 스파이더맨과 이야기하고 싶었으니까. 누가 범죄자들 때려준 이야기에 웃어주겠어.
키스한 순간부터 피터가 밀어낼 줄 알았더니 오히려 피터가 뻔뻔하게 굴기 시작했음. 그냥 키스 좀 한 친구 정도로 생각하는 게 아닌가 싶어질 정도였음. 이젠 손을 잡거나 모르는 체하며 슬쩍 뽀뽀하는 건 알아차리겠지. 맷은 조금 아쉬운 기분도 들었어.
“파커. 보고 싶어.”
명령어인 파커가 입에 익어버린 맷. 이제 맷은 습관적으로 피터에게 채팅을 보내고 있었음. 피터랑 전화도 만나는 것도 못 한다면 채팅이라도 마음대로 보내야지 하는 심보였어.
성격이 별로라 그래.
맷은 웃으며 손으로 서류를 살폈어. 이게 다 성격이 별로라서 그런 거야. 피터 넌 성격이 별로인 사람에게 찍힌 거야. 그러게 누가 데어데블을 두고 휙 가버리래. 그랬으면 좋아하는 줄도 몰랐을 텐데.
서류를 살피던 맷은 캐럴들 사이로 들려오는 익숙한 소리에 손을 멈추고 창가로 향했어. 발소리가 딱 피터였거든. 사무실 앞에 선 피터가 휴대전화를 쳐다보며 무언가를 분주히 입력하는 것 같았음.
[잠깐 내려올래요?]
피터가 먼저 찾아온 거야. 맷은 겉옷을 챙겨입을 새도 없이 사무실을 나가서 계단을 뛰어 내려갔어. 피터와 가까워질수록 익숙한 심장의 울림이 들렸지. 피터는 걸어온 모양인지 체온이 차가웠어.
“피터? 사무실로 올라오지.”
“아…, 아직 그럴 생각은 없어서요.”
“생각은 없는데 왜 찾아온 거야?”
맷의 투정 어린 말투에 피터가 웃음을 터뜨렸어. 피터의 웃음소리가 듣기 좋다고 맷은 생각했음. 사실 좀 외롭긴 했나 보지.
“이거 주려고요. 그… 감기 걸리지 마요.”
맷의 목에 피터가 목도리를 감아주면 좋겠다. 손이 조금 떨리고 있는 게 느껴져서 맷은 얌전히 피터가 감아주는 걸 기다렸음. 포근한 감촉이 나쁘지 않았어. 게다가 피터의 집에 꽤 오래 있었던 것인지 피터의 향기가 났거든. 맷은 미소를 지으며 피터를 바라봤음.
맷에게 목도리를 감아준 피터는 여전히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었어. 무언가 할 모양이라는 걸 피터의 심장 소리를 들을 수 있는 맷은 알고 있었지. 그래서 피터가 잘 묶어준 목도리가 상하지 않도록 피터가 당기는 힘에 맞추어 고개를 숙여주는 게 맷이 택한 일이었음. 아주 짧은 입맞춤이야. 거의 입술이 잠깐 닿았다 떨어진 거라서 키스라고 부르기에도 웃겼지. 맷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어.
“하하, 진짜 사무실로 올라갈 생각 없어?”
“네. 저 진짜 부끄럽거든요….”
“1월 1일에는 뭐해?”
“새로운 마음으로 스파이더맨을 하겠죠?”
“그러면 새벽에 만나서 같이 있으면 되겠네. 그러면 내년이잖아.”
맷의 말에 피터의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게 느껴졌음. 맷은 손을 뻗어 피터를 끌어안았어. 이유는 몰라도 진짜 피터를 좋아하는 거 같아. 뻣뻣하게 굳어 있던 피터의 손도 어느새 맷의 허리에 감겨 있었음. 빠르게 뛰는 심장 소리와 호흡이 피터의 대답을 대신해 주었어. 맷은 피터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어.
“Parker, Merry Christmas.”
명령어가 입력된 파커 챗에 또 메시지가 보내졌어.
[Merry Christmas]
크리스마스에 잘 어울리는 붉은색 목도리는 꽤 부드러웠어. 꽤 비싸긴 했지만 그런 보람이 있는 감촉이었지. 맷에게 안겨 있는 피터는 자기가 선물한 목도리에 얼굴을 묻었음. 맷의 품은 따스했지만 그날처럼 뜨겁지는 않았지. 맷보다 피터가 더 체온이 높은 탓이야.
화상을 입은 것처럼 따끔거리던 마음도, 입술도 이젠 잠잠해졌어. 이 추운 날에 겉옷도 입지 않고 내려온 맷을 피터는 꼬옥 안아주었지. 또 감기에 걸려서 누워 있으면 안 되니까. 또다시 감기라도 걸려서, 갑자기 키스 당하면 억울해서 안 될 것 같았거든.
키스를 한 사람은 기억도 못 하는데, 당한 사람만 기억하잖아. 그렇게 억울한 키스가 세상에 어디 있어.
머리칼에 닿는 부드러운 입맞춤에 피터는 웃음을 터뜨렸어. 이젠 꿈이 아닌 걸 알았으니까. 내년에 봐요, 성격이 별로인 애인 씨.
[I LOVE YOU, Matt!]
[AND HAPPY NEW YE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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