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피터] 책임감
🕶x🕷/소설
2025. 3. 31. 13:48
- DAREDEVIL (2022) 읽은 후 쓴 글
수 시간 비행기를 붙잡고 있는 일은 초인에게도 어려운 일이다. 날개 일부분이 부서져서 균형을 잃을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힘으로 그것을 온전히 붙잡고 있어야 하는 그런 일, 말이다. 혹여 추락하게 되면 얼마나 많은 사람이 죽게 될까. 물론 그 안에 타고 있는 것은 교도소를 탈주한 범죄자들이었고, 그의 닌자 부하들 몇몇이었다. 실수로 힘을 조금이라도 더 주거나 주지 않아 나약한 부품들이 공중에 날아간다고 생각해보자. 비행기는 추락할 것이고 산산이 부서진 잔해들 사이에는 수십 명의 뉴욕의 반갑지 못한 손님들이 섞여 있을 것이다. 거기엔 스파이더맨 자신도 있을지 모르는 일이다. 긴장이 풀리자 몸이 뻐근하고 피로가 몰려왔다. 그저 안락하고 작은 침대에 몸을 뉘고 세상이 흘러가도록 내버려 두고 싶을 따름이었다.
닌자 부하들, 그러니까 ‘그’의 닌자 부하들. 피터는 데어데블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어떻게 사람이 몇 달 만에 변해요? 언제는 나랑 잘 지내고 싶다면서? 탓하는 말들이 피터의 목구멍에 차오르고 있었다.
거짓말쟁이, 위선자, 바보, 멍청이, 빨간 닌자…. 생각나는 그에게 어울리는 말들을 나열하자 조금 마음이 가벼워졌다. 하지만 그 뒤로 이어지는 말에 피터는 다시 머리를 감싸 쥘 수밖에 없었다.
맷은 도움이 필요해.
피터 벤자민 파커의 머릿속은 늘 이런 식이었다. 모르는 체하자며 애써 고개를 돌려놓고도 결국 그곳으로 가서 할 수 있는 모든 걱정들을 늘어놓고, 온몸으로 그를 막아서고도, 여전히 스스로 부족했음을 탓하고 말았다.
거기서 조금만 더 설득해 봤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맷이 처한 상황을 나는 모르잖아. 어떤 이유가 있을 수 있지. 교도소에 들어가서 범죄자 열댓 명을 탈옥시킬만한 어떤 중요한 이유…. 피터는 두 손을 얼굴로 가린 채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진짜 이러기에요? 어떤 말로도 그를 두둔할 수 없었다. 피터가 알고 있는 것이라고는 데어데블은 맷 머독이라는 사실이었고 그것은 딱히 지금에 와서는 도움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 피터를 괴롭게 할 따름이었다.
맷 머독은 뉴욕에서 죽었고, 데어데블은 그냥 데어데블이다. 대부분의 히어로 친구들이 알고 있을 이야기에 피터는 데어데블과 맷 머독의 연결고리가 더해지고 만 것이다. 맷 머독은 데어데블이고, 그는 맷 머독을 버려둔 채 데어데블로 살고 있다.
차라리 맷이 마스크를 벗어주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아마도 그랬다면 데어데블은 그저 슈퍼히어로 비즈니스에서 제일 믿음직한 친구였던 사람 정도로 피터에게 남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제는 믿지 못하는 사람으로 말이다. 맷의 붉은 머리칼과 초점 없는 눈을 보자 피터는 마법처럼―원래 이쪽 일이 다 그런 법이다― 맷 머독과 데어데블 사이의 연결고리를 다시 이을 수 있었다. 데어데블에 대한 기억에서 빠져 있는 퍼즐 몇 조각을 침대 아래에서 찾아내어 드디어 완성한 기분이었다. 맷 머독이 연쇄 살인 누명을 쓴 스파이더맨을 변호해 주었던 일이나, 그에게 슈트를 빌려 입었던 순간들, 그리고 그의 정체를 잊게 된 순간 그를 의심했던 순간들이 피터의 머릿속에 빠르게 지나갔다. 이런 순간을 겪어보는 사람들을 본 적은 있었으나 피터 스스로가 겪게 될 줄은 몰랐던 일이었다. 그렇게 보면 공통점이 많은 편이다.
‘언젠가는 같은 테이블에 앉아 마스크를 벗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겠지. 신뢰만을 가지고, 마주하는 거야.’
맷의 말이 떠올랐다. 마스크를 벗은 그는 피로해 보였으며 변호사시절의 당차던 자신감은 없었다. 맷 머독이 죽고 데어데블만이 남겨진 그가 피터의 눈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으로 보였다. 길에 다니면 보이는 다양한 시민들 중 하나. 피터는 그를 돕고 싶었다.
그때 마스크를 벗고 ‘저는 피터 파커예요. 닥터 스트레인지의 마법으로 사람들에게 제 정체를 잊게 했죠.’라고 고백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데어데블이 맷 머독임을 알면서도 피터는 그에게 자신을 보여주지 못했다. 사실 스파이더맨의 정체를 이미 알게 된 사람은 많았고, 그에게 또 밝힌다고 해서 갑자기 세상이 무너지고 다시 피터 파커의 삶이 망가지는 일은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이미 망가진걸. 하지만 피터는 그러지 못했고, 결국 그것을 맷 머독과 스파이더맨의 일로 남겨두고 말았다. 피터는 맷 머독을 알고 있었지만, 맷은 피터 파커를 알지 못한다. 아마 같은 테이블에 마스크를 벗고 마주할 일은 없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몇 년간은.
맷의 기행奇行을 알게 된 후 꺼내어봤던 마스크가 책상 위에 있었다. 데어데블의 마스크. 그만두겠다던 데어데블의 말은 결국 거짓말이었다. 그는 다른 마스크를 쓰고 헬스 키친을 쑤시고 다녔으며, 온 시민들과 범죄자들을 놀라게 했다. 이런 마스크를 수십 수백 장을 받아내도 맷 머독은 멈추지 않을 것임을 피터는 알고 있었다. 두려움이 없는 사내. 데어데블은 그런 사람이다. 마스크를 손에 쥐고 양손으로 힘을 주자 뿔이 달린 천 쪼가리가 힘없이 늘어났다. 화풀이를 하고 있을 것일지도 몰랐다. 찢어질 듯 위태로는 붉은색 마스크가 어쩐지 안쓰러워지고 말았다.
“젠장, 맷…”
피터는 마스크를 던져두고 자리에 주저앉았다. 스파이더맨이, 피터 파커가 자꾸만 그를 돕고 싶어 했다. 괴로움이 스며든 어깨를 감싸고 안아주고 싶었다.
말해줘요, 맷. 내가 당신을 위해서 뭘 하면 되죠? 금고 문 부수기? 어울리지 않는 위협적인 모습으로 헬스 키친을 누비기? 당신을 위해서 싸울게요, 맹세해요.
닿지 못한 말들이 눈밭에 굴렀다. 나약한 짐승이 된 것처럼 친절한 이웃을 속인 그는 피터가 그를 걱정하고 껴안은 사이에 허리춤에서 웹슈터 카트리지를 훔쳐냈다. 웹슈터도 부숴버리고, 카트리지까지 훔쳐버린 그 때문에 결국 피터는 비행기를 온몸으로 붙잡고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는 피터 스스로가 거미줄이 되게 만들었다. 맷이 안쓰러워 보였던 것은 사실 처음부터 그의 연기일지도 몰랐다. 어디서부터 속였을까. 데어데블을 그만두겠다던 말부터 거짓이었으니 사실 전부 다. 맷 머독임을 밝히는 순간마저도 스파이더맨을 속일 작정이었을지도 몰랐다. 사악한 마음으로 친절한 이웃을 이용하는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자 분한 마음이 조금은 풀렸다. 맷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었고, 피터는 그의 진심을 알고 있었다. 세상이 스파이더맨을 순진하다고 말해도 피터는 흔들리지 않을 수 있었다. 스파이더맨의, 피터 파커의 책임감이라는 것은 눈앞의 사람을 돕고 지키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스파이더맨의 눈앞에는 맷 머독이 있었다. 데어데블이 아니라, 그저 한 시민이었다.
피터 파커는 진심으로 맷 머독을 돕고 싶었다. 맷 머독은 피터 파커의 책임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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