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피터] 위장결혼 - 03

🕶x🕷/소설

2025. 6. 7. 15:59

 

 

키스 정도는 친구 사이에도 할 수 있는 거야. 열이 오른 두 뺨을 손으로 식히며 피터가 되뇌였다. 맷과 살기 시작한지 일주일이 넘어가며 익숙해질 법도 했지만 여전히 아침인사는 피터에게 어색하고 부끄러운 일이었다. 키스 자체가 싫은 건 아니다. 하지만 스파이더센스가 팅글거리는 것을 느끼며, 맷과 타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입을 맞추는 것이 마치 둘 사이를 과시하는 행위처럼 느껴지는 건 엄격히 다른 문제였다. 거기에 맷이 키스를 너무 잘한다는 문제도 있었다. 모자란 호흡을 찾으며 맷을 따라가다보면 머리가 멍해져서, 연기 중이라는 것도 잊고 열중하고 말았다.

그래서는 안되는 거잖아.

혼자만 너무 집중하거나 긴장한 것처럼 굴면 안되는데, 맷처럼 차분하게 역할을 하는 것이 참 어려운 일로 느껴졌다. 경험의 차이일까.

자연스럽게 해야하는데 마음처럼 되질 않는다. 피터는 관계에서 소극적으로 굴고 있음을 스스로도 알았다. 그저 맷이 하는대로 어색하게 따라가고만 있는 게 저답지 않다는 것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법적인 부부니까. 서류상으로는 결혼한 것이니까 일단은 맷과 피터는 부부가 맞았고, 맷의 이웃들은 이제 막 함께 살기 시작한 신혼부부로 오해하고 있었다. 일일이 ‘우리 결혼했어요’하고 인사를 돌린 것도 아닌데 이웃의 아주머니들은 이미 두 사람의 관계를 알고 있다는 듯 눈이 마주치면 자상히 눈웃음을 보여주셨다. 그런 시선은 정말로 익숙하다. 월세방을 뺄 때 받았던 시선과 같은 그 웃음은 피터를 초짜로 만들고 있었다. 이제 막 결혼해서 모든 것이 서툰 부부, 남편을 따라 헬스키친으로 오게 된 청년으로 피터를 오해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사실이지만, 오해다.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를 가짜 결혼 관계였으니까.

함께 출근을 하며 헤어지기 전에 키스를 하는 건 정말로 평범하고 평범한 일반적인 부부의 일상일 것이다. 그러니까 맷과 사랑스럽게 키스를 하고, 포옹을 하고, 뺨에도 뽀뽀를 하다가 아쉬운 표정으로 헤어지는 것이 피터가 해야할 역할이었다. 히어로가 아닌 일반적인 부부를 많이 본 적은 없지만 피터가 생각하는 결혼은 일단은 그랬다. 거기에 꽃도 가끔 선물하고, 이벤트도 하면서—피터는 애인과 부부의 차이를 알 수 없었다— 그렇게 지내는 게 부부가 아닐까. 그러니까 키스 정도는 익숙해져야한다. 그게 비록 맷 머독과의 키스라고 해도 말이다. 피터는 떨리는 제 마음을 애써 달랬다.

“휴우-, 일단은 지금에 집중하자.”

여전히 화끈거리는 뺨을 손바닥으로 꾹 누르며 피터가 중얼거렸다. 몇 주만에 얻어낸 면접기회인데 아침에 했던 키스 생각으로 이걸 날려먹을 수는 없었다. 면접을 앞둔 회사 건물 앞에 도착한 피터는 두 뺨을 손으로 꾹꾹 눌렀다 떼고, 굳센 마음을 먹은 뒤 안으로 들어갔다. 일주일간 스파이더맨의 정보를 내놓으라는 요구에 시달리는 동안 잘렸던 회사보다 좀 더 큰 규모를 가진 곳은 입구부터 화려했다.

회사에 대해 알아보고 오는 편이 나았을 텐데, 피터는 어제도 늦게까지 스파이더맨 활동을 하느라 면접 준비를 할 틈을 내지 못했다. 게다가 아침에도 새벽 일찍 일어나 헬스키친 주변을 둘러보느라 준비된 것이라고는 오래 전에 적어둔 이력서와 급하게 관공서에서 발급받은 증명서 정도가 다였다. 어떻게든 되겠지. 피터는 언제나처럼 편한 마음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기로 했다.

“오늘 면접이 예약되어 있는-, 파커 씨?”

어색하게 주위를 둘러보는 피터에게 여직원 한 명이 다가왔다.

“아, 네. 제가 바로 파커, 피터 파커예요!”

서류나 잡동사니가 든 가방을 어깨 한 쪽에 매고 피터가 답했다. 면접이 예정된 사람은 나뿐인가. 피터는 따라오라 말하는 직원을 따라 걸으며 빌딩 내부를 이리저리 곁눈질하다가 이내 머릿속으로는 질문으로 나올만한 것들을 생각했다. 그 전 회사에서의 경력이나 어떤 업무를 했는지에 대한 질문도 있을 테고, 실험실이라고 했으니까 전문 분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른다. 끊임없는 탐구, 새로운 발견. 피터는 일자리를 알아볼 때 아주 잠깐 보았던 회사의 소개 문구를 떠올렸다. 차라리 공학이나 이론에 대한 질문이라면 얼마든지 대답할 수 있을 텐데. 문제는 따로 있었다.

파커 씨, 전 회사를 그만두게 된 이유가 있나요?

여기서부터 난관이다. 직원을 따라 엘리베이터에 오른 피터는 아랫입술을 꾹 씹으며 변명거리를 찾아봤지만, 결국 면접장소에 도착할 때까지 대답을 생각해내지 못했다. 넓은 사무실에 인사담당자의 앞에 앉은 피터는 이마에 맺히는 땀을 애써 손등으로 닦아내며 어색한 미소를 띠웠다. 담당자는 건네받은 이력서를 차분한 눈으로 읽다가 이내 무언가를 발견했는지 고개를 갸우뚱하며 피터를 힐끗 쳐다보았다.

“파커 씨?”

“네!”

피터가 자신있는 척을 하며 큰 소리로 대답했다. 스파이더맨을 할 때는 넘치는 유머가 이런 순간에는 나오지 않는게 문제지만, 피터 파커는 어떻게든 이런 위기를 해쳐나갈 수 있을거라고 피터는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여기에는 ‘피터 머독’이라고 적혀 있군요.“

아. 머독.

이력서는 적어도 몇 달 전에 쓴 것이고, 증명서는 오늘 발급받은 것이니까. 당연히 성이 바뀌어 있었겠지. 맷의 성이 ‘머독’이었다. 그리고 지금 맷과 결혼한 피터는 당연히 ‘피터 머독’이 되어 있는게 당연했다. 누구의 성을 따를지도 이야기를 안했으니 당연히 맷의 쪽을 따르는 게 되어 있었을 거고, 피터는 이 문제에 대해서 불평할 처지가 아니다. 메이 숙모를 끌어들이지 않을 수만 있다면 그 지옥 같던 의자에 몇 주는 더 앉아 있을 수 있다는 각오를 했으니까. 

결혼이라는 게 생각보다 많을 걸 바꾸는 것 같다. 자신의 성이 바뀌어 있음을 뒤늦게 깨달은 피터는 두 손을 꽉 쥔 채 허벅지 위에 올렸다. 모든 것은 스파이더맨에서 시작됐고, 결국 그게 맷과의 결혼이라는 결과가 되었다. 게다가 피터 파커를 감시하기 시작한 소속도 불분명한 사람들 때문에 맷과 동거까지 해야한다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 피터는 이미 머릿속이 엉망이라 이런 사소한 변화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매일 스파이더맨 활동을 마치고, 창문으로 들어가 몸을 대충 뉘이던 낡은 침대를 잃어버린 탓이다. 피터는 월세방에 있던 낡은 이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상처가 난 채로 대충 잠을 자느라 핏자국도 남아 있던 얄팍한 천은 피터의 삶과 비슷했다. 낡고, 엉망이고, 거칠며, 값싸다. 부드러운 것은 없지만 동시에 그래서 망가뜨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리고 맷의 집에서 살아야한다는 것은 결국 망가뜨리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한다는 것과 같은 말이었다. 피터는 무엇이든 망치는 재주가 있었다. 그게 물건이던, 사람과의 관계이던.

함께 침대를 공유하는 사람이 있다. 그리고 그게 DD-, 맷 머독이다. 그것은 맷의 집에 멋대로 들어가서 우유를 훔쳐 마시던 것과는 또 다른 다른 감각이었다. 아마도 그건 맷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피터는 멋대로 추측했다.

그러니까 성이 바뀐 것 정도는 이해해야만 한다. 맷은 집도 공유해주며 부부 행세에 맞춰주기 위해 노력중이었다. 하루아침에 부부가 되어서 키스를 하고, 함께 침대에서 잠까지 자야하는데도 맷은 피터를 탓하는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다가 언제나처럼 자연스럽게 대해주며 토닥여주는 맷을 어색하게 대한 것은 피터 자신이었다. 그리고 결국 이 상황은 스스로가 야기한 것이라고, 피터는 마음 속으로 자신을 탓했다.

“아… 그게, 제가 얼마 전에, 결혼을…”

당황한 피터가 말을 더듬었다. 결혼이라는 단어에 혀가 꼬였지만 어떻게든 발음을 해냈다.

”이력서가 수정이 안된 모양이군요.”

인사담당자의 표정이 나쁘다. 피터는 오늘의 면접이 벌써부터 끝났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것은 스파이더센스도 필요하지 않은, 파커의 감이었다.

 


 

피터를 부를 걸 그랬나. 맷은 가로등 위에 아슬아슬하게 발을 걸치고 짧은 후회를 했다. 시각을 잃은 대신 감각이 일반인의 몇 배로 예민해진 그는 사람을 눈으로 보지 못해도 그밖의 감각으로 구별해낼 수 있었다. 인간이 저마다 지닌 신체반응이나 체취는 살아온 삶에 따라 더욱 차이가 명확해져서, 맷에게 사람을 쫓는 일은 숨을 쉬는 것처럼 간단한 일이다. 하지만 레이더센스가 맷에게 뛰어난 감각을 주었지만, 동시에 그것은 소음이나 너무 많은 정보들에 쉽게 지치고 예민해지게 만들었다. 뉴욕의 도로는 복잡하고 화가 많은 사람들은 툭하면 클락션을 울려댔다. 그 소음이 얼마나 천둥처럼 치는지 보통의 사람들은 인지조차 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번개가 치는 듯한 도로 위, 와이어를 사용해 최대한 빠르게 이동하는 경찰을 쫓아봤으나 다시금 귓속을 치는 소리에 잠깐 집중을 잃은 사이에 대상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해가 지고 있는 모양인지 기온이 아까보다 훨씬 내려갔다. 컨테이너 따위가 모여 있는 항구가 가깝기 때문이기도 했다. 밤이 되면 물가 주변은 바람이 심하게 부니까. 모자란 경찰들의 대화로 도난 당한 귀금속이 부두 근처에 있다는 것은 알아냈으니, 여기서부터 강을 따라 가다보면 발견할 가능성이 조금 있을지도. 데어데블 마스크를 쓴 맷은 빌리클럽으로 가로등을 툭툭 치며 생각에 빠졌다. 대신 그렇게 되면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는 게 문제다. 밤이 지나고 해가 떠올라도 끝내지 못할 게 분명했다. 빠르게 움직이는 건 데어데블의 전문 분야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역시 스파이디에게 연락을 하는 게 나을까. 피터를 부르면 적어도 새벽까지는 끝낼 수 있을 듯 싶었다. 가로등에서 다시 다른 건물의 옥상으로 와이어를 이용해 가볍게 허공을 가르며 올라간 맷은 슈트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던  휴대폰을 꺼냈다. 피터가 면접을 본다고 말하긴 했지만 점심 즈음에는 끝이 났을 테니까, 평소대로라면 스파이더맨 활동을 하고 있을 것이다.

“—이런.”

휴대폰을 손에 쥐고, 음성으로 통화를 걸려던 맷이 짧게 탄식하며 앞으로 몸을 굴렀다. 빠르게 움직인 덕분에 갑자기 날아든 에너지를 피할 수 있었다. 그가 원래 서 있던 자리는 전기로 인해 그을린 냄새가 풍겼다.

“아까워라! 내가 한방에 데어데블을 잡았다고 알릴 기회였는데…!”

데어데블을 공격한 남성이 소리쳤다. 맷은 그 남자가 공중에 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전기를 제 몸처럼 다루며 그것을 마치 총알과 채찍처럼 사용하는 빌런, 일렉트로였다. 레이더감각으로 빠르게 알아차린 덕분에 공격은 피할 수 있었지만 몸을 구르던 사이에 휴대폰을 놓쳐버렸다. 맷은 제 휴대폰이 건물 아래로 떨어졌음을 알아차렸다. 명확하게 어디로 떨어져 있는지도 알고 있었지만, 일렉트로를 처리하기 전에는 그것을 줍는게 어려울 것이라는 것도 알았다. 일렉트로의 움직임을 따라 타닥타닥하며 공기중의 먼지 따위가 전기에 타버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런 것에 닿으면 멀쩡하기가 어려울 거야. 탄식 같은 한숨을 내뱉은 데어데블은 빌리클럽을 양손에 쥐고, 일렉트로에게 맞설 준비를 했다.

나중에 피터가 속상해 하겠는 걸.

본인 담당 빌런이 사고를 일으키면 자신이 잘못한 것처럼 사과를 하던 피터였다. 빌런을 매일 같이 따라다니며 관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면서 이런 일에 하나하나 죄책감을 느끼며 우울해하던 피터가 떠올라서, 최대한 공격을 잘 피해야겠다는 다짐을 하며 맷은 빠르게 날아오는 강한 에너지에 몸을 앞으로 던졌다.

 


 

“안녕, 베티. 조나는 있어?”

늦은 시간까지 바쁘게 움직이는 뷰글 신문사는 피터의 예상대로 여전히 환하게 불을 밝히고 있었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신문사 직원들을 이리저리 피하며 자연스럽게 사무실로 들어온 피터는 편집장 JJJ의 개인 사무실 앞에 자리를 두고 있는 베티에게 말을 걸었다. 피터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베티는 이내 피터의 얼굴을 보고 환한 미소로 그를 반겨주었다. 뷰글에서 제일 친절한 사람이 있다면 그건 베티일 거야. 피터가 반가움을 감추지 못하는 그녀의 표정을 보며 생각했다.

“피터—! 여긴 어쩐 일이야?”

“어쩐 일이긴. 지나가는 길에 들려본 거지. 뷰글은 내 마음의 고향이잖아.”

너무도 반가워하는 베티의 목소리에 피터는 어깨를 가볍게 위로 올리며 능청스럽게 굴었다.

“또 잘린 거지?”

베티는 피터 파커를 너무 잘 파악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였음을 피터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파이더맨을 뺀 나머지인 피터 벤자민 파커 말이다. 언제나 일을 망치는 건 모두가 아는 사실이어서, 피터는 어색하게 웃음을 터뜨리며 뒤통수를 긁적였다.

“이크, 벌써 소문난 거야? 역시 뉴욕 제일의 유명 신문은 속일 수가 없나봐.”

“JJ는 사무실에 있어. 근데 지금 좀 화가 많이 났으니까 조심히 들어가.”

“JJ는 언제나 화나 있잖아. 더 화났다간 터져버리는 거 아니야?”

“불레틴에서 더 잘 팔리는 기사를 낸 모양이야. 뉴욕을 지키는 영웅들! 저번에 큰 소동이 있었잖아, 어벤저스 같은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던 소동. 누가 멋진 사진을 제보했나봐.”

“아…”

베티의 설명에 피터가 작은 숨을 내뱉었다. 뉴욕을 지키는 영웅들—, 이었나. 피터는 그 기사에 사진기자의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조금 안도했다. 그 사진을 팔았던 때는 스파이더맨 일로 체포되기도 전이었던 데다가, 메이 숙모에게 드릴 선물을 위해서 돈이 필요해서 어쩔 수 없이 한 일이었다. 뉴욕을 집어삼킬 뻔했던 거대한 소동이 끝나고 모두가 안도할 무렵, 허리 벨트에 있던 소형 카메라가 떠올라서 잠깐 셔터를 눌렀던 것이 그렇게 멋진 기사가 될 줄은 피터도 예상치 못했다. 혹시라도 어벤저스나 다른 히어로들에 대해 나쁜 기사를 쓸 생각이라면 팔지 않겠다는 단호한 피터의 말에 불레틴 소속의 기자는 결코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을 뿐이지, 엄청나게 영웅적인 기사를 써줄 것이라고는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무튼 그 사진 한 장은 메이 숙모에게 달아드린 멋진 브로치가 되었고, 그것은 피터의 기억 속에서 빠르게 잊혀졌다.

이번에는 또 어떤 사진을 팔고, 어떤 기사가 될까. 피터는 열다섯 살 스파이더맨 활동을 시작하던 시기부터 뷰글에 제 사진을 팔았다. 뷰글이 길바닥 자경단원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한 행동이었고, 돈이 필요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는 말은 오래된 껌딱지 같은 변명으로 남았다. JJJ에게는 스파이더맨 사진만 파는 거니까. 피터는 악의적인 선동 기사에 자신이 찍힌 사진을 올리며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곤 했다. 뷰글 덕분에 피터 파커는 대학교를 졸업했고, 스파이더맨 활동도 계속해낼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만큼 스파이더맨의 평판이 바닥을 기었지만. 뷰글의 기사를 본 영웅들 대부분이 스파이더맨을 무시무시한 악당이나 악동 취급을 했던 것은 여전히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서 이따금 꿈 속에서도 그 장면이 떠오르곤 했다. 넌 하찮은 꼬맹이일 뿐이야. 꿈 속의 영웅들에게 몇 번이나 변명하던 피터는 이제는 꼬마가 아님에도 때때로 그 말을 되새김질하곤 했다. 뷰글의 기사로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스파이더맨을 두려워했지만-, 데어데블은 한 번도 그런 오해를 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맷이 편안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오해 받는 일이 지겹고 힘들어졌을 때, 침착하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의 존재가 필요한 때가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 피터는 맷에게 찾아가곤 했다. 지금에 와서는 다 어린 날의 추억으로 남았지만 말이다.

조나의 사무실은 언제나 그렇듯 커다란 호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누군가에게 전화를 하는지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화를 내던 조나는 피터의 등장에 미간을 씰룩거리더니 휴대폰을 내려두고, 피터를 쳐다보았다. 아, 나의 고향이여. 피터는 주머니에 찔러두었던 사진 몇 장을 꺼내어 태연하게 흔들었다.

”사진이 필요하다고 들었어요.“

”흥, 내가 배신자의 사진을 뷰글에 실어줄 것 같아?“

조나가 소리치듯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어 잠시 눈을 끔뻑이던 피터는 곧 불레틴에 사진을 판 사실을 탓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알았어요?“

”내가 몇 년이나 파커 네 사진을 검토했는데, 그것도 모를 것 같아?“

”와, JJ—! 감동이라고 해야하나요. 그래도 다시 왔잖아요.“

피터가 능청스러운 체를 하며 웃음을 흘렸다. 게다가 난 사진도 갖고 있어요. 버릇처럼 찍어서 현상해둔 사진은 피터가 그나마 갖고 있는 재주들 중 하나였다. 공학과 관련된 일을 하는 게 제일이지만, 어려울 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법이다. 따가운 눈초리로 피터를 쳐다보던 조나는 팔랑팔랑 움직이는 사진을 내놓으라는 듯 책상을 두드렸다. 피터는 사진을 JJJ의 책상 위에 늘어놓으며 협상할 준비를 했다. 사진기자에게 중요한 것은 협상 기술이었다.

돈이 급한 것은 아니지만 맷이 돌려받게 해준 보증금으로 평생을 살 수는 없는 법이다. 게다가 지금도 맷의 집에서 무전취식하다시피 살고 있으니까. 적어도 오늘 장보는 것 정도는 태연하게 계산할 수 있어야하지 않겠는가. 같이 장을 보자고 권해주던 맷의 목소리를, 저녁에 늦지 말라하던 장난스러운 말투를 떠올리며 피터는 조나의 앞에서 어깨를 폈다.

“더 나은 걸 찍어와, 파커. 그렇다면 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지.”

JJJ가 사진을 던지며 단호히 말했다. 오늘은 글렀구나. 조나가 던져버린 사진들이 바닥에 툭툭 떨어지는 것을 보며 피터는 속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결국 얻은 것도 없이 약속 시간이 되어버려서 허겁지겁 매튜의 집으로 돌아가야 했다.

”맷? 아직 퇴근 전인가…?“

약속을 까먹고, 슈트를 입은 채 창문으로 들어온 피터는 조용한 거실을 이리저리 두리번 거렸다. 뷰글에서 오는 길에 소매치기를 잡느라 더 늦어버려서 맷에게 한 소리를 들을 각오를 했는데 집주인은 와 있지도 않았다. 같이 장보자고 먼저 말했으면서 잊어버린 건 아닐까. 맷에게 전화를 걸까 고민하던 피터는 일단 기다려보자며 슈트를 입은 채로 마스크만 벗어던지고 부엌으로 갔다. 확실히 장을 보긴 해야겠다. 냉장고를 열자 보이는 것이라고는 미네랄워터와 맥주 몇 캔, 우유 정도 밖에 없었다. 우유곽을 손에 들고 흔들자 거의 남지 않아 찰랑이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웹스윙을 하느라 목이 말랐던 피터는 그 남은 우유를 팩에 입을 대고 냉큼 마셔버렸다. 정말 있는 게 없잖아. 입가심 밖에 되지 않는 적은 양이 아쉬워서 입술을 할짝였다. 맷이랑 슈퍼에 가면 우유를 적어도 세 팩은 사와야겠다고 다짐했다.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은 더 지나갈 무렵, 피터는 맷에게 전화를 걸었다. 늘 늦는 피터를 지각쟁이라 놀리던 사람의 등장하지 않으니 아무래도 불안해졌다. 시각장애를 가진 변호사는 위협받기 딱 좋은 위치에 있었다. 물론 맷은 데어데블이니까 그런 위협에 넘어가거나 크게 다친 적이 없었지만, 언제나 약자를 보호하는 사람은 위험한 위치에 있는 법이었다. 맷이 일부러 어려운 사람을 변호사 일로도 돕고 있음을 아는 피터는 혹시나 맷이 이 밤에 악의를 가진 사람과 싸우는 것은 아닐지 걱정이 들었다. 스파이더맨이나 데어데블은 마스크 안의 사람을 모르니까 복수할 수 없으나, 변호사 맷 머독은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으니까. 스파이더맨과 가까운 피터 파커가 체포당했던 것과 같은 논리였다.

연결음만 계속되다가 끊어지는 통화는 피터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피터 파커는 언제나 모든 걸 망쳐. 소파에 누웠다가, 다시 일어났다가, 천장 위를 걸어다니며 정신 사납게 휴대폰을 들고 집안을 걷고 뛰던 피터는 결국 맷을 찾아나서기로 결심을 했다. 맷처럼 레이더센스가 있는 것이 아니지만, 일단 근처라도 둘러봐야만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아서 피터는 벗어두었던 마스크를 다시 뒤집어 쓰기 위해 손에 들었다.

끼익—. 그때 창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마스크를 손에 쥔 채로 고개를 든 피터는 창틀을 넘어 집안으로 들어오는 붉은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데어데블 슈트를 입은 맷이었다.

“맷…! 늦었잖아요!”

마스크를 던지듯 내려둔 피터가 투정을 부리며 맷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어둑어둑해진 바깥과 함께 불을 켜지 않은 집안 내부는 어두워서 매튜의 표정이 불분명했다. 맷—? 매튜에게 빠짝 걸어간 피터는 어쩐지 불안한 기분을 느꼈다. 스파이더센스가 울리지 않는 것을 보면 위험한 것이 아닌데도. 맷에게 다가가자 천이 탄 듯한 냄새가 났다. 피터는 곧 그게 맷의 슈트에서 나는 냄새임을 알아차렸다. 피터가 맷에게 붙어오자, 맷이 힘없이 피터의 품으로 무너졌다. 두근두근. 바짝 붙은 가슴팍에서 맷의 심장이 뛰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피터보다 조금 큰 키와 덩치를 가진 맷이 온몸을 기대어오자 피터가 잠시 뒤로 주춤주춤 밀렸지만 이내 중심을 잡고 맷을 두 팔로 꽉 붙잡을 수 있었다. 피터는 자동차도 들어올릴 수 있는 힘을 가진 스파이더맨이었다.

“피곤해, 피터….”

피터의 품에 완전히 기대어선 맷이 말했다. 목소리가 정말로 지쳐 있어서, 피터는 이대로 침실로 맷을 옮겨주어야할까 고민하며 맷을 어정쩡하게 두 팔로 안은 채 창문 앞에 서 있었다. 매튜와 바짝 붙어 있으니 아까보다 분명한 냄새와 감촉이 느껴졌다. 슈트가 타거나 피부가 그을릴 때 나는 그런 냄새.

“맷, 잠시만요. 소파로 가요.”

결국 맷을 붙잡고 뒤뚱뒤뚱 걸어 거실 소파로 데려가 눕힌 피터는 제 불안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었다. 데어데블 슈트 곳곳이 그을려서 구멍이 나 있었다. 게다가 마스크도 그을리고 찢어졌고, 그 사이로 눈가가 보일 정도였다. 결국 피터는 손을 뻗어 데어데블의 마스크를 벗기기로 했다. 누군가의 마스크를 멋대로 벗기는 게 거의 잘 없던 일이어서 어쩐지 어색하고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내가 정신을 잃었을 때 누가 마스크를 벗기고 있다면 그보다도 두려운 일이 없을 거야. 떨리는 손으로 맷의 마스크를 벗긴 피터는 매튜의 얼굴에 남은 옅은 화상자국과 멍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행히 맷은 정신은 있는 모양인지 눈을 천천히 뜨고 감으며 피터의 손길을 온전히 감당하고 있었다.

피터의 손이 상처에 닿는 게 따가운지 표정을 찡그리면서도 맷은 짜증을 내지 않았다. 평소와 다르게 진지한 피터의 숨결이나 손길이, 그리고 낮게 울리는 심장소리가 피터가 꽤나 떨고 있다는 사실을 맷에게 알려주었기 때문이었다. 빌런을 상대하다보면 어쩔 수 없이 생기는 상처일 뿐이다. 그것은 피터도 알고 있을 터였다. 맷의 집에서 구급상자를 찾아 다시 소파 앞으로 온 피터가 소독약과 연고를 찾는 동안 맷은 소파에 완전히 누워 피로에 젖은 긴 한숨을 뱉었다.

“webbie, 네 탓이 아니야.”

맷이 단호하게 말했다. 군데군데 타고 그을린 천이나 피부에 남은 자국으로 피터가 눈치챘음을 알 수 있었다. 피터에게도 맷에게도 상처는 언제든 생길 수 있는 것이었지만, 이런 화상을 입힐 수 있는 빌런은 한정적이었다.

답지 않게 왜 우느냐고 장난스럽게 말해볼까 생각하던 맷은 자신의 얼굴에 닿는 피터의 조심스러운 손길과 따가운 소독약의 느낌, 그리고 알싸한 알코올의 향을 느끼며 말을 뱉지 않았다. 슈트를 벗는 것까지 도와준 피터는 편안한 복장으로 갈아입은 맷을 결단코 침실까지 데려가주겠다며 고집을 부렸다. 결국 피터에게 안겨 침대까지 옮겨진 맷은 여전히 슈트를 입은 피터의 손목을 잡고 제 옆으로 끌어당겼다. 저대로 두면 다시 창문으로 나갈게 분명하다. 데어데블이 던진 빌리클럽에 전력장치가 고장난 일렉트로는 도중에 도망갔고, 다시 간다해도 찾을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네가 갈 필요 없어. 맷은 피터를 단호히 붙잡았다.

피터를 오랫동안 알아온 매튜는 피터를 제 옆에 눕혀두고, 피터의 얼굴이 있을 부근으로 고개를 움직였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숨결이 느껴지는 곳을 찾는 것은 쉬웠다.

맷의 시선이 피터의 얼굴에 닿았다. 침실에 있는 창문으로 달빛이 들어와 맷의 얼굴을 비춰주었다. 피터는 맷의 얼굴에 남아 있는 붉게 그을린 상처를 손끝으로 조심히 더듬었다. 피터의 손가락이 눈가를 향하자 맷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깊은 상처는 아니지만, 피터처럼 회복력이 뛰어나지 않은 맷에게는 일주일 이상은 갈만한 상처다. 하루이틀이면 나아버리는 피터와 달리 매튜는 일반인이었고, 변호사였다. 넘어졌다는 변명으로 넘어갈 수 있을까. 피터는 맷의 변호사 생활을 걱정해주며 상처를 매만졌다. 맷은 베개에 반쯤 얼굴을 묻고서 피터의 손에 제 손을 겹쳤다.

“울지마. 머리 울려.”

“안 울어요.”

피터가 훌쩍이며 답했다.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면접에서 떨어져서 그래요.”

눈물 섞인 목소리로 피터가 웅얼거렸다. 펑하고 터져버린 마음은 감정을 누르는 법을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죄책감이 짓누르는 가슴팍이 무거워져서 피터는 침대 위에서 일어나고 싶었다. 맷에게 손이 잡혀 있지만 않았어도 얼른 창문으로 나갔을 것이다. 차마 환자의 손을 떼어내지 못한 그는 맷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제 얼굴을 바짝 붙였다. 연고가 발려 있는 탓에 입술 부근에 끈적한 느낌이 남았다.

약간의 눈물과 우유. 젖어 있는 피터의 숨결이 맷의 뺨을 간지럽혔다.

 


ne님이 또 엄청난 맷피터 그림을 그려주셨기 때문에.. 하루에 오백 번씩 다시보고 있습니다.. ;-;

マトピ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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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e (@neuneon.bsky.social) 2025년 6월 8일 오전 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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