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맷피터] 위장결혼 - 04

🕶x🕷/소설

2025. 6. 9. 22:06

 

 

친절한 이웃 스파이더맨. 지금은 모두가 장난처럼 말하는, 그리고 피터가 어느 순간부터 제게 붙인 별명은 갑작스럽게 시작된 것이 아니다. 오해 받는 게 익숙한 피터는 설명하기보다는 도망치는 쪽을 택해버리는 버릇이 있었다. 피터 본인도 깨닫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맷이 봐온 스파이더맨은 어려서부터 성격이 급했고, 조금이라도 상황이 잘못되면 변명도 하지 않고 달아났다. 함께 범인을 잡았음에도 불구하고 경찰이 오자 놀라 도망가는 스파이더맨을 대신해서 데어데블은 몇 번이나 그의 편을 들어주며 해명을 해주곤 했다.

이 녀석은 스파이더맨이 잡은 겁니다. 스파이더맨은 좋은 사람니까요.

오래전부터 스파이더맨을 알아왔던 맷은 이런저런 이유로 그와 만나고, 부딪혔으며 서로를 이해하는 동료로 남았다. 창문이 열려 있다는 이유로 멋대로 들어와 우유를 털어먹는 겁이 없는 우유 도둑이자, 맷에게 의지하러 제멋대로 찾아오는 거미에게 맷은 그냥 쉴 자리를 주었다. 잠깐 숨을 돌리고, 투정을 부리기도 하며, 이따금 흐느끼다가 갈 수 있는 장소. 맷은 피터가 선하다는 걸 알았고, 그런 사람에게 이 정도는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넌 착하니까. 피터가 스스로를 지킬 수 있을 만큼 강하다는 것을 알지만, 동시에 그것을 모두 놓을 정도로 친절하다는 것도 알고 있는 매튜는 피터를 도와주었다. 스파이더맨을 모르는 뉴욕 시민과 히어로는 거의 없지만, 스파이더맨이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너무도 적었다.

 

잔잔히 두근거리는 심박이 안정적으로 울렸다. 아침이 되었지만 피터는 여전히 잠에 빠져 있었고 쌕쌕거리는 숨소리를 들으며 맷은 모처럼 피터보다 먼저 눈을 떴다. 얌전히 잠에 빠져 있는 피터는 맷과 같이 침대를 쓰는 게 익숙해진 모양이었다. 곁에 누군가가 있다는 것은 꽤 안정감을 준다. 누워 있던 그대로 몸을 돌린 매튜는 쌔근쌔근 잠든 피터의 머리칼을 가볍게 만져보다가 이불을 당겨 피터에게 덮어주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가운 차림으로 거실로 나온 맷은 여전히 침실에서 이불에 파묻힌 피터의 숨소리에 작게 웃으며 소파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정신을 깨웠다. 피터가 늦잠을 잔 덕분에 모처럼 맛있는 커피를 마실 수 있었다. 사무실로 출근하지 않는 주말이라 여유가 있었다. 맷은 미뤄두던 일을 할 각오를 했다.

쓰지 않는 방을 깨끗하게 닦고, 가구를 채워넣자. 데어데블 물건 따위를 대충 넣어두던 방이었지만 일단 정리하고 보니 책상과 책장, 피터가 필요한 가구 몇 개 정도는 들어갈만한 크기가 되었다. 가구까지 살 필요는 없다며 사양하길 반복하던 피터는 결국 맷의 기세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네 집처럼 생각하라니까. 이미 서류상으로도, 이웃에게도 부부로 알려져 있는 마당에 이곳이 피터의 집이 아니라고 말하는 건 이상했다. 맷 머독의 집이니까. 결국 피터 머독의 집이기도 하다. 이미 서류에 이름을 넣을 때부터 책임질 각오를 끝마쳤던 맷은 데어데블 물품을 모두 다른 방으로 몰아두고, 피터가 쓸 방을 깨끗하게 치웠다. 여기서 거미줄 용액을 만들던, 과학도구를 사서 연구를 하던 마음대로 쓰게 둘 생각이었다. 피터는 여전히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는 모양이니까, 공학서적 따위를 사서 꽂아두어도 좋을 것 같았다. 슈트를 넣어둘 옷장도 있어야겠다. 맷은 점점 늘어나는 구매목록을 머릿속에 정리했다.

피터의 스파이더맨 슈트 몇 벌은 여전히 상자 안과 세탁기를 반복해서 오가고 있었고, 피터가 집에서 입는 옷은 대부분 맷의 것이었다. 어제도 밤 늦게 들어와 맷의 옆에서 잠이 든 피터는 옷을 멋대로 꺼내어 입고 있었다. 맷은 피터가 자신의 옷장에서 티셔츠를 꺼내어 입는 것을 굳이 지적하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었다. 함께 쓰는 옷, 함께 쓰는 빨래바구니. 평소에 입는 옷은 슈트와 같이 세탁하면 물이 들고, 원단이 엉망이 되어서 별도로 나누어 세탁기를 돌려야했다. 데어데블 슈트와 스파이더맨 슈트는 같이 빨아도 괜찮은 재질이었고, 세제 두 스푼과 땀냄새 제거제 따위를 넣으면 땀과 피냄새 따위는 깔끔하게 사라진다. 맷은 잠들어 있는 피터가 티셔츠 안에 여전히 입고 있는 스파이디 슈트를 벗겨버릴까 고민하다가 깨우지 말자며 세탁기를 돌리는 것을 포기했다. 집에서는 슈트를 제대로 벗어두라고 이야기할까 싶을 때도 있었으나 조금이라도 스파이더센스가 울리면 창문으로 튀어나가야하니까, 옷을 갈아입는 시간을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하는 행동임을 알고 있어서 그냥 그대로 두었다. 우유를 마시며 천장에 올라가는 정도가 아니라면 맷은 피터에게 큰 잔소리를 할 생각은 없었다.

“맷… 좋은 아침이에요.”

잠에서 깨어난 피터가 하품을 길게하며 침실을 나왔다. 맷은 소파에 앉은 채 피터의 발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살짝 돌렸다.

“오늘은 가구를 사러가야겠어.”

“흐음, 꼭 살 필요는 없는데요….”

맷의 단정적인 어조에 피터는 말끝을 길게 흐리며 냉장고 문을 열어 우유를 꺼냈다. 어제 하루종일 웹스윙을 하고 다녀서인지 아침부터 배가 고프다. 우유팩을 꺼내고 다시 냉장고를 닫은 피터는 그대로 우유곽 입구에 입을 대고 우유를 마셨다. 컵을 쓰지 않은 탓에 입가를 타고 티셔츠에도 우유 몇 방울 떨어졌다. 그것까지도 명확하게 알아차릴 수 있는 맷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피터가 입은 티셔츠도 제대로 세탁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졸린지 우유를 마시고도 하품을 하고 기지개를 편 피터가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소파로 다가왔다. 피터가 할 행동을 알고 있는 맷은 머그컵을 든 팔을 옆으로 치워 공간을 내어주고, 피터는 맷의 무릎 위에 자연스럽게 앉았다. 사람에게 붙어 있는 걸 좋아하는 거미. 스파이더맨 활동을 할 때에도 자연스럽게 누군가의 곁에 있는 걸 좋아하는 피터는 맷의 집에서도 제멋대로였다. 맷은 소파 앞 테이블로 손을 뻗어 커피가 남아 있는 머그컵을 내려두고 제 무릎 사이에 앉아 자리잡은 피터가 떨어지지 않도록 한 팔로 피터의 허리를 잡았다. 티셔츠에 옅게 남은 얼룩과 피터의 입가에 묻은 우유가 맷이 입은 가운에 스치며 우유냄새가 옮았다. 이불 속에서 나온지 얼마 되지 않은 몸은 평소보다 더 따끈했다.

“아직 남았네요.”

멋대로 맷의 무릎에 올라앉은 피터가 맷의 눈가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흉터는 많이 옅어져서 지나치는 사람들은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로 남았지만 피터는 아직도 죄책감이 드는 모양이었다. 며칠만 더 있으면 사라질 텐데. 맷은 피터의 걱정 때문에 평소보다도 자주 명상을 해야했다. 오래전 스틱이 가르쳐준대로 집이든 사무실이든 어디에서든 마음을 내려두고 명상을 하면 회복이 조금이라도 빨라질 테니까. 덕분에 상처는 많이 나아서 포기가 잔소리하지 않을 정도가 되었다.

여전히 속이 상해 있는 피터의 시선을 돌리기 위해서 맷은 괜히 피터의 얼굴을 더듬었다. 턱과 코에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었고, 그 아래로 빠르게 나아가는 상처가 맷의 손끝에서 느껴졌다. 맷의 상처는 볼 때마다 죄책감을 느끼며 슬퍼하면서, 본인은 어디서 다쳐오는지 말도 안해주는 피터가 너무하다 싶어진 맷은 괜히 손으로 피터의 코를 살짝 꼬집었다.

“맷—, 다정하게 해줘요! 아파요!”

코를 꼬집힌 피터가 엄살을 부렸다. 맷은 피터의 허리를 붙잡은 팔에 힘을 주어 피터를 가까이 끌어당겼다.

“아기처럼 굴지마. 씻고 나오면 다시 붙여줄 테니까.”

“이 정도는 금방 나아요. 내일이면 사라질 걸요.”

“소독도 제대로 안했잖아. 그리고 오늘은 꼭 가구사러 갈 거니까. 피터, 같이 나가는 거야.”

피터에게 얼굴을 바짝 붙인 맷이 단호히 말했다. 피터의 숨결에서 우유 냄새가 나서, 맷은 웃음이 터질 것 같았지만 애써 표정을 단단히했다. 아, 그치만…. 피터가 잠시 눈을 굴리며 대답을 미루려했지만 붙잡혀 일어나지도 못한 채 맷의 무릎 위에서 웅얼거렸다. 가구를 사준다는데 왜 계속 사양을 하려는 것인지 피터의 마음을 맷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부담이 되는 걸까. 그렇다고해서 영원히 맷의 것을 공유하며 살 수는 없는 법이었다. 피터에게도 최소한의 본인의 공간은 있어야 한다는 게 맷의 생각이었고, 맷은 오늘은 꼭 빈 방을 채우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그럼 골동품 마켓에 가는 건 어때요? 아마 열었을 거예요.”

맷에게 꽉 잡혀 숨만 쌕쌕거리던 피터가 눈을 굴리다가 입을 열었다. 예전 집에서 살 때 쓰던 물건도 마켓에서 자주 구했다고 설명하는 목소리가 재밌어서 맷은 결국 표정을 풀고 피터를 껴안은 채 이야기를 들었다. 주말마다 열리는 시장에 가면 사람들이 쓰지 않는 가구나 물건들을 팔고 있어서, 피터는 이사를 할 때마다 그곳에서 필요한 것을 구했다고 했다. 타인이 쓰던 물건보다는 새것을 사는 게 더 나은 거 같은데. 예민한 매튜는 제 집에 들어올 가구를 까탈스럽게 고르고 싶었으나 피터가 너무도 즐겁게 웃는 탓에 지적하지 못했다.

“게다가 그 근처에 커피가 맛있는 곳도 있어요!”

“…그럼 가볼 수 밖에 없겠네.”

결국 미소를 지은 채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맷은 피터의 데이트 신청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럼 얼른 준비할게요!”

원하는 장소로 결정되자 피터가 냉큼 맷의 팔을 치우고 일어나서 욕실로 달려갔다. 정말 제멋대로야.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소리. 문틈으로 새어나오는 젖은 냄새와 바디워시의 향기. 잠시 피터를 안고 있던 그대로 앉아 있던 맷은 곧 자리에서 일어나 가운을 벗어 세탁 바구니에 던져넣고, 휴대폰을 찾았다.

“벤 유릭에게 전화”

시각장애인 맞춤으로 설정된 휴대폰이 알아서 통화를 걸어주고 연결음이 이어졌다. 욕실 문 안에서는 피터의 콧노래가 들려오고 있었다. 피터에게 괜한 걱정거리를 얹어주고 싶지 않아. 맷은 피터가 바깥소리를 전혀 듣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휴대전화를 들고 그나마 소리가 더 들리지 않을 드레싱룸으로 들어갔다. 옷장 문을 열고 옷은 손으로 만져보며 고르는 사이에 연결음이 끊기고, 익숙한 유릭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탁할 게 있습니다.”

외출복을 고르는 맷의 손이 차분하게 움직였다. 욕실 안은 물방울이 이리저리 튀는 소리로 가득하다. 피터의 목소리가 타일에 부딪혀서 울림을 더하고 있었다.

 


 

마켓이 열린 거리는 사람들로 붐볐다. 흥정하는 사람들의 높고 낮은 목소리, 구석구석 파는 음식들의 냄새, 사람들이 가진 여러 체취들로 매튜에게 거리는 혼란스러운 곳으로 느껴졌다. 피터는 이곳이 꽤 익숙한 모양인지 잔뜩 신이 나 있었다.

“가구부터 볼거죠?”

맷이 어지러움에 익숙해지는 사이에 피터가 맷의 손을 꽉 붙잡아왔다. 부드럽지만 단단한 손이 좋아서, 맷은 그것을 꽉 붙잡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만 믿고 따라오라며 맷을 꽉 붙잡은 피터가 앞서가고 맷은 피터를 따라 걸었다. 놓치지 않도록 깍지를 낀 손이 뜨거웠다. 사람에 치이지 않고 이리저리 잘 피해다니는 피터는 중간중간 걸음을 멈추고 맷을 흘끗 돌아보거나, 이건 어떠냐며 말을 걸어왔다. 그러면 맷은 여전히 피터와 맞잡고 있는 손은 그대로 두고, 나머지 손을 뻗어 피터가 권한 가구를 이리저리 만져보았다. 세월이 묻어 있는 가구에는 먼지와 흙냄새가 배어있는 것도 있었고, 이따금 끔찍한 페인트 냄새가 남아 있는 것도 있었다.

“이런 건 집에 둘 수 없어.”

맷이 페인트칠이 된 책장에서 손도 대지 않고 표정을 찡그리며 말했다. 벌써 후각이 피곤해진 기분이 들 정도였다. 까다로운 맷의 기준에 피터가 뒤통수를 긁적이다가 맷에게 바짝 붙었다. 아주 옅은 라임향이 화학물질 냄새로 죽어가던 맷의 후각을 깨워주었다. 피터가 아침에 쓴 보습제의 향이었다.

“맷—, 기준이 너무 높아요.”

“너도 코앞에 싸구려 페인트를 가져다대면 싫을 거잖아.”

“그 정도로 심해요?”

피터가 책장에 코를 가까이 가져다대며 갸웃거렸다.

“응. 누가 내 얼굴에 페인트를 들이부은 느낌이야.”

아마 낡은 합판 재질이었던 기존 책장을 새것인 척하려고 색을 칠한 모양이라는 맷의 설명에 피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살 거면 원목이 좋아. 거기에 냄새도 괜찮아야 하고.”

집주인이 내민 까다로운 기준에 피터가 볼멘소리를 내며 투정을 부렸지만 맷은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가격은 상관없다는 맷의 말에 피터가 다시금 한탄했지만 그는 뻔뻔하게 굴기로 했다.

“네가 정말 쓰고 싶은 걸로 골라.”

깍지를 낀 손을 당겨 냄새나는 책장에서 피터를 떨어뜨린 맷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검붉은색으로 코팅이 된 색안경에 살짝 비치는 맷의 텅빈 푸른 눈동자가 반짝거려서, 피터는 잠시 맷의 얼굴을 쳐다보다가 이내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그렇게 결국 저렴한 가구를 파는 곳을 지나치고 딱 봐도 고급스러운 것으로 보이는—일단 피터의 눈에는 그랬다— 판매자가 많아보이는 곳으로 향했다.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는 책상 같은 것들이 불규칙적으로 놓여 있었다. 피터는 맷의 손을 꼭 잡은 채로 그 사이를 걸었다. 정말 원하는 것. 너무도 간단하지만 동시에 어려운 말이다. 싸고 부숴도 괜찮은 것이라는 기준이 빠지면 도대체 무엇을 중심으로 정말 쓰고 싶은 것을 택해야할지 알 수가 없어졌다. 폭신하고 부드럽던 매튜의 이불과 침대, 소파 같은 그런 것들을 말하는 걸까.

저기가 나을 것 같아. 갈피를 잃은 피터가 가구들 사이에서 길을 잃자, 이번에는 맷이 피터를 붙잡고 앞장섰다. 여러 판매부스를 지나서 맷이 도착한 곳은 사람들이 많은 중심에서 벗어난 한적한 부스였다. 가구나 물품이 많지 않았고 가게를 보는 주인도 의자에 앉아 다른 일을 보는 듯했다. 맷의 감각으로 보면 무언가 다른 걸까. 맷과 함께 가구들 사이를 걸으며 생각하던 피터는 익숙한 책상을 발견하고 잠시 발을 멈췄다.

“…저거.”

피터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가리켰다. 맷은 손가락의 방향은 알 수 있었지만 피터가 갑자기 멈춰선 이유는 알 수가 없어 고개를 갸웃거렸다.

“벤 삼촌이 쓰던 책상이랑 똑같은 거 같아요. 기억이 맞다면요….”

기억 속에 벤 삼촌의 서재에는 저런 책상이 하나 있었던 것 같은데, 확신할 수 없어서 피터가 말끝을 흐렸다. 익숙한 형태에 색깔이긴한데 사실 너무 오래되어서 기억이 다를지도 몰랐다. 하지만 어쩐지 너무나 익숙하다. 피터는 천천히 책상으로 다가가서 그 위를 가볍게 쓸어보았다. 맷처럼 감각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사실 알아본 것은 색깔이나 형태 때문일 뿐이지만 원목의 가구 한 구석에 얼룩이 남아 있는 것조차도 어쩐지 벤 삼촌의 서재에 있던 그 책상이 맞다는 확신을 가져다주었다. 짙은 색에 조금 고급스러움을 담고 있는 책상에 앉아 있던 벤 삼촌의 모습은 흐릿하다. 하지만 주인 잃은 벤 삼촌의 책상에서 멋대로 거미줄 용액을 만들었던 기억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메이 숙모와 함께, 벤 삼촌의 물건을 정리하면서 결국 함께 팔아버렸지만 말이다. 그리고 거기엔 벤과 메이가 선물로 주었던 현미경도 있었다.

“응, 좋은 책상이야. 재질도 좋아.”

테이블 위에 놓인 피터의 손 옆으로 맷도 손을 올려보며 말했다. 시간의 흔적이 남아 있긴 했으나 낯선 것은 없었다. 맷은 추억에 젖어 잠시 말이 줄어든 피터의 허리를 한 팔로 안은 채 주인이 있는 쪽을 가볍게 돌아보았다. 의자에 앉아 졸고 있던 가구들의 주인이 하품을 하며 일어나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보는 눈이 있으시네! 이거 정말 괜찮은 물건이에요.”

드디어 가구를 하나 정리한다는 사실에 신이난 주인이 활기차게 말했다. 맷은 자연스레 웃어주며 고개를 끄덕이고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냈다.

“신혼집 서재에 두면 오래오래 쓸 수 있을 겁니다. 신혼부부죠?”

“아… 그게.”

갑작스러운 물음에 잠시 생각에 빠져 있던 피터가 번뜩 고개를 들고 맷과 가게 주인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과하게 긴장하며 심장이 빠르게 펌프질을 시작하는 것을 느낀 맷이 피터의 허리를 잡은 손에 힘을 주어 피터를 바짝 끌어당겨 피터의 머리칼에 코끝을 댔다. 플로럴 향기의 샴푸향이 났다.

“네, 얼마 전에 결혼했습니다. 그렇지, 피터?”

“아… 네. 결혼한지 얼마 안 됐어요!”

결국 피터도 고개를 끄덕이며 맷의 말에 긍정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좋을 때구만. 신혼부부에게 비싸게 받을 수는 없지.”

가게 주인이 계산기를 두드려 가격을 보여주었다. 아마 할인이 된 가격을 보여주는 듯한데 맷에게는 납작한 계산기만 느껴질 뿐이었다. 매튜를 대신해서 가격을 확인한 피터가 조금 망설이는 모양이라, 맷은 고개를 숙여 피터의 귓가에 다시 장난스럽게 입을 맞췄다. 으앗. 간지러움에 깜짝 놀란 피터가 맷을 돌아보고, 매튜가 미소를 지으며 이걸로 하자며 단호히 말했다. 가격은 괜찮으니까. 맷이 다시 키스를 하기 전에 피터가 재빠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굴에 열이 잔뜩 오른 채로 맷의 지갑을 받아 계산까지 마친 피터는 배송지 주소까지 적어주고서야 부끄러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가게 주인의 흐뭇한 눈빛이 이제 막 결혼한 부부를 보는 그 표정이라, 얼굴이 더욱 달아오르는 기분이었다. 능청스럽고 다정한 남편을 연기한 맷은 피터가 매튜의 집주소를 쓰는 동안 얌전히 피터의 손을 잡은 채 서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 그럼 커피가 맛있는 곳은 어디야?”

“아까는 놀리려고 한 거죠? 스파이더센스도 안 울렸는데!”

“신혼부부라고 하면 할인해줄 거라는 걸 알았을 뿐이야.”

맷이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자 피터가 머리를 긁적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그런가. 결국 설득되어 넘어간 피터가 중얼거리는 것이 재밌어서 맷은 웃음을 머금은 채 피터를 허리를 껴안고 걸었다. 마켓에 나온 사람들이 많았지만 어차피 사람들의 시선은 맷에게 보이지 않으니 상관없었다. 피터도 이런 스킨십은 신경쓰이지 않는지 맷에게 바짝 붙어걸으며 즐겁게 떠들고 있었다. 키스보다는 이런 쪽이 더 부부 같이 보일텐데 피터는 전혀 이런 부분은 생각지도 못하는 듯했다. 굳이 말해줄 이유는 없으니까. 어지러운 거리를 훑던 감각이 어느새 피터로 고정되자 매튜는 스스로도 안정되었음을 느꼈다. 사람이 많고, 복잡하지만 견딜만했고 피터의 심장소리가 쿵쿵 크게 울리며 맷에게 감각의 방향을 짚어주었다. 일반인보다 강한 스파이더맨의 신체반응은 맷의 예민한 감각을 붙잡아줄 수 있을 만큼 크고 분명하다. 거기에 라임향과 플로럴향기까지 풍긴다는 사실은 이 거리에서 맷만이 알 수 있는 정보였다.

 


 

정말 평화로운 하루였네.

사고가 터지지 않을까 어렴풋 생각도 했지만 예상외로 정말로 아무것도 없던 하루였다. 맷은 피터와 손을 잡고 마켓을 구경하다가, 피터가 추천한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고, 서점까지 구경하다가 늦은 저녁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사람들이 많은 곳을 벗어나자 예민해졌던 레이더센스도 다시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또각또각 울리는 구둣발 소리. 오늘 하루가 마음에 들었는지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맷의 손을 꼭 잡고 걷는 피터. 낡은 가로등에서 스파크가 튄다. 맷은 집이 가까워질 즈음 이 하루가 조금 아쉽다는 생각을 했다. 소동을 바란 것은 아니지만, 무언가 조금 부족한 기분이 드는 건 사실이었다. 살고 있는 아파트가 가까워지고 건물 안에 있는 이웃들의 생활소음이 맷의 귓가에 울렸다. 데어데블이 되어 주먹을 휘두르고 싶다는 그런 충동이 찾아왔다. 낯선 이가 건물입구 근처에 숨어 있다는 것도 매튜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차라리 덤벼든다면 두들겨패는 것으로 해결할 수 있는데 상대는 언제나 근처를 맴돌고만 있었다. 굳이 피터에게 말해서 기분을 망치고 싶진 않다. 벤 삼촌의 책상 이야기로 시작해서 처음에 거미줄을 얼마나 형편없이 만들었는지 이야기하는 피터의 목소리가 밝고 경쾌해서, 그리고 중간중간 흥얼거려주는 노래가 계속되었으면 했다.

스파이더맨, 혹은 피터 파커가 정말 미움을 받는 모양이다. 아직까지도 매튜와 피터의 사이를 의심하는 감시가 있는 것을 보면 피터에게 트집 잡을 것이 겨우 이것 밖에 없다는 말이기도 했다. 저 노력이면 차라리 스파이더맨을 잡으려 하는 게 더 나을 듯 싶었으나, 결국 맷에게 두 사람은 같은 사람이어서 이쪽이 대응하기 편하다는 생각으로 이어졌다. 피터 머독의 결혼 관계를 의심한다면 그보다 더한 증거를 보여주면 그만이었다. 건물 입구로 들어가기 전 잠시 걸음을 멈춘 맷은 언제나처럼 고개를 숙이고, 피터의 허리에 손을 올렸다. 그때 피터가 결심한듯 맷의 옷깃을 잡았다.

쪽—

맷이 피터의 입술을 삼키기도 전에, 피터가 먼저 매튜의 뺨에 입술을 붙여왔다. 질끈 감은 눈에 잔뜩 힘이 들어간 손, 그리고 빠르게 뛰는 심장이 피터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를 맷에게 알려주고 있었다. 볼에 닿는 부드러운 감촉에 맷은 터지는 웃음을 애써 누르며 피터의 허리를 두 팔로 감쌌다. 겨우 용기를 내서 한 게 뺨에 뽀뽀하는 것인 피터를 굳이 나무랄 필요도 없었다. 피터의 반응으로 이미 상대는 납득했을 테니까. 부끄러움이 많은 아내라고 오해해준다면 그것도 좋은 일이다.

“그… 가끔은 노력해야할 것 같아서....”

피터가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깜빡이는 가로등의 불빛과 이웃들의 이런저런 목소리, 감시중인 이의 짜증스러운 한탄, 그리고 부끄러움에 어쩔 줄 몰라하는 피터의 숨소리까지 모든 정보들이 맷의 감각을 사로잡았다가 다시 피터로 돌아왔다. 피터의 입술이 닿은 뺨에는 아까 마신 커피의 향기가 남았다. 신선한 원두에 섞인 시나몬 향기, 맷은 피터가 마셨던 라떼에 시나몬 시럽이 들어가 있었음을 떠올릴 수 있었다. 맷의 뺨에 짧은 키스를 남긴 피터의 입술이 떨어지고, 잔뜩 구겨진 매튜의 옷깃에서도 손이 떨어졌지만 맷은 피터의 허리를 붙잡은 채로 서 있었다.

부족함이 없는 완벽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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